삽로자(颯露紫), 권모과(拳毛騧), 백제오(白蹄烏), 특근표(特勤驃), 청추(靑騅), 십벌적(什伐赤).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과 함께 용감히 적진으로 돌격한 여섯 준마의 이름이다. 송나라 시인 장뢰(張耒)는 「소릉육준(昭陵六駿)」이라는 시에서 이 여섯 준마를 이렇게…
중국연구원 연구교수 이유진
한(漢)나라 고조(高祖) 때부터 중국은 왕족의 딸이나 후궁을 이민족 우두머리의 아내로 보내는 통혼 정책을 통해 화친을 도모했다. 이렇게 정략적으로 이민족에게 보내진 여인들을 화번(和蕃)공주라고 한다. 한나라 때는…
기원전 51년 정월,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나라에 입조해 선제(宣帝)를 알현했다. 이는 흉노와 한나라의 오랜 대립 관계에 마침표를 찍은 사건이다. 저제후(且鞮侯)선우 시기부터 흉노는 실크로드상의 요새 지역을 한나라에…
“신첩의 죽음은 천명이 아니옵니다. 다른 첩들이 저주하여 저를 죽게 만든 것입니다.” 기원전 54년, 태자 유석(劉奭)이 사랑하는 여인이 병사하면서 남긴 말이다. 이후 태자는 모든 여자를 멀리했다. 황실의…
일찍이 진시황은 장성을 쌓는 등 강성한 흉노를 늘 경계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의 죽음으로 중국은 혼란에 빠진 반면, 이듬해 흉노에서는 묵특(冒頓)이 선우(單于)가 되어 북방 초원지대를 통일해…
다다익선(多多益善), 아무리 많은 대군이라도 능히 거느릴 수 있는 한신의 능력 때문에 유방은 그가 절실히 필요했고, 역설적이게도 절실히 그를 제거해야만 했다.
기원전 209년, 호해(胡亥)가 2세 황제가 된 첫 해에 진승(陳勝)이 봉기했고 여기저기서 이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은 각각 오중(吳中)과 패현(沛縣)에서 반진(反秦)의 기치를 들었다. 이때 항우는…
진시황의 마지막 순행은 기원전 211년 가을에 시작되어 이듬해 여름까지 이어졌다. 수도 함양(咸陽)을 떠나 사구(沙丘)에서 죽기까지 아홉 달 동안의 진시황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형혹수심(熒惑守心)’이라는 천문현상이 있다. 형혹(화성)이 이동하다가 심수(心宿, 전갈자리)에서 머무는 것으로, 고대로부터 흉조 중의 흉조로 여겨졌다. 화성과 전갈자리 모두 붉은 빛이니 공포심을 더욱 자아냈을 것이다. 게다가 화성은…
기원전 212년, 진시황은 이전의 궁전이 너무 작다며 위수(渭水) 남쪽 상림원(上林苑)에 새 궁전을 짓기 시작한다. 바로 ‘아방궁’이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아방궁 전전(前殿)의 규모만 해도 1만 명을 수용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