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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문화의 이모저모 8] 곽거병과 마답흉노 석상

 

 

[사진1] 곽거병 무덤(빅토르 세갈렌 촬영)

 

 

한 무제와 흉노

  일찍이 진시황은 장성을 쌓는 등 강성한 흉노를 늘 경계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의 죽음으로 중국은 혼란에 빠진 반면, 이듬해 흉노에서는 묵특(冒頓)이 선우(單于)가 되어 북방 초원지대를 통일해 나갔다. 이어서 중국에서도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사 년 동안 벌인 초한지쟁(楚漢之爭)에서 승리를 거두고 기원전 202년에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200년, 한 고조 유방과 흉노의 묵특선우가 평성(平城)에서 맞붙게 된다. 이때 고조는 흉노에게 포위된 채 백등산(白登山)에서 일주일 동안 꼼짝없이 갇혀 있다가, 묵특선우의 아내에게 몰래 뇌물을 써서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쳤다. 이 사건이 있은 이후로 한나라는 황실의 여인을 선우에게 바치고 해마다 비단·쌀·솜 등을 흉노에게 바쳐야 했다. 덕분에 흉노와의 큰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한나라는 무제(武帝)가 즉위할 즈음엔 곳간이 가득 차고 재물이 남아돌았다.

  기원전 141년, 열여섯에 즉위한 무제는 흉노와의 굴욕적인 화친관계를 끝장내고자 했다. 넘쳐나는 재원과 젊디젊은 황제의 의지,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무제는 월지(月氏)와 연합해 흉노를 치고자 했다. 이때 월지와의 동맹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이가 장건(張騫)이다. 기원전 139년, 백여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월지로 떠났던 장건은 도중에 흉노에게 붙잡혀 십 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겨우 도망쳐 월지에 도착했지만 동맹 체결에 실패했다. 허망하게 한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또다시 흉노에게 잡혔다가 탈출에 성공한 장건이 장안으로 돌아온 건 기원전 126년이다. 동맹 체결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가지고 온 귀한 정보는 서역을 개척하겠다는 무제의 의지를 불태웠다. 서역으로 통하는 하서주랑(河西走廊) 일대를 장악하려면 흉노와의 일전은 불가피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곽거병

  무제는 위청(衛靑)을 대장군에 임명한 기원전 124년부터 막대한 병력을 동원해 흉노 토벌에 나섰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해 외삼촌 위청보다 빛나는 전공을 세운 이가 바로 곽거병(霍去病)이다. 열여덟(기원전 123)에 표요교위(驃姚校尉)로 임명된 그는 몽골고원 대사막 남쪽에서 흉노를 격파했다. 스물에는 표기(驃騎)장군이 되어 간쑤(甘肅)·닝샤(寧夏)·산시(陝西) 일대의 흉노 세력을 잇달아 공격하여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스물둘에는 고비사막을 건너 흉노의 본진을 공격해 큰 전공을 세움으로써 대장군 위청과 더불어 대사마(大司馬, 국방부장관 격)가 되었다.

  그의 스물은 눈부셨다. 봄·여름·가을에 잇달아 출병한 곽거병은 흉노의 여러 왕을 죽이거나 사로잡거나 투항하게 함으로써 흉노의 기반을 뒤흔들었다. 이해에 그가 공격한 지역에는 언지산(焉支山)과 기련산(祈連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서 흉노에는 슬픈 노래가 전해졌다. “우리의 기련산을 잃어 우리의 가축이 번식할 수 없게 되었네. 우리의 언지산을 잃어 우리 여인들의 얼굴빛이 사라지게 되었네.”(『서하구사(西河舊事)』) 언지산은 연지산(臙脂山)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서 자라는 화초의 붉은 즙이 연지로 사용된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기련(祈連)’은 흉노어로 하늘을 의미한다. 기련산은 바로 ‘천산’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흉노에게는 중요한 곳이었다. 삶의 근거지를 잃게 된 흉노의 슬픔이 앞의 노래에 담겨 있는 것이다. 한편 한나라 입장에서는 기련산에서 흉노를 몰아낸 건 하서주랑 일대의 영유권을 확보하게 된 쾌거였다.

 

 

마답흉노 석상의 의미

  젊은 영웅 곽거병은 스물넷에 돌연 사망하고 만다. 무제는 자신이 묻힐 능 옆에 곽거병의 무덤을 두도록 했다. 기원전 139년부터 기원전 87년까지 무려 반세기가 넘게 조성된 무릉(茂陵)의 사방에는 비빈과 공신과 궁녀의 배장묘가 분포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건 곽거병의 무덤이다. 누군가는 평생을 바쳐도 이룰 수 없는 공적을 너무도 젊은 나이에 성취한 곽거병, 그는 죽어서도 남다르다. 16개의 거대한 석상이 그의 무덤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곰·코끼리·멧돼지·소·말·두꺼비·개구리·물고기 등 다양한 석상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답흉노(馬踏匈奴)’ 석상이다.

  말과 흉노, 그야말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유목기마민족인 흉노에게 말은 분신과 같은 존재 아닌가. 그런데 마답흉노 석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양자의 이미지에서 아주 많이 어긋나 있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고 있어야 할 흉노가, 말 아래 깔린 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왼손에는 활을 오른손에는 화살을 쥐고 있는 덥수룩한 수염의 이 남자, 이를 악물고 눈알은 튀어나올 듯하다. 죽기 살기로 발버둥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형상이다. 말 위의 기마민족이 이렇게 말 아래 깔려 있다니! 높이 1.68미터 길이 1.9미터의 이 화강암 석상은 흉노와 한나라의 관계 전환을 극명히 반영하고 있다.

  마답흉노 석상은 기련산을 본떠 만들어진 곽거병의 무덤과 어우러져야만 그 의미가 오롯이 살아난다. 오늘날 곽거병 무덤 앞의 석상들은 질서 있게 정돈되어 있지만 원래의 배치는 이와 달랐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세갈렌(Victor Segalen)이 1914년에 촬영한 사진은 석상들의 원래 배치를 짐작케 해준다. 사진을 보면 마답흉노 석상은 곽거병의 무덤 바로 앞에 있고, 나머지 석상들은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다. 기련산 모양을 본뜬 곽거병의 무덤과 일련의 석상들은 바로 한나라의 손에 들어온 옛 흉노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다. 마답흉노 석상에 나타난 말과 흉노의 기묘한 모습은 한나라의 승리를 상징한다. 타자의 분신을 자기화하는 것만큼 완벽한 승리는 없을 터, 이 석상은 곽거병의 공적과 한나라의 권위에 대한 최고의 찬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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