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곡관에 먼저 들어간 유방
기원전 209년, 호해(胡亥)가 2세 황제가 된 첫 해에 진승(陳勝)이 봉기했고 여기저기서 이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은 각각 오중(吳中)과 패현(沛縣)에서 반진(反秦)의 기치를 들었다. 이때 항우는 스물네 살, 유방은 마흔여덟 살이었다. 두 사람은 동지였다. 초(楚)나라 회왕(懷王)을 옹립하는 일에 함께했고, 성양(城陽)·정도(定陶)·옹구(雍丘)·진류(陳留) 등지에서 힘을 합쳐 진나라 군대와 싸웠다. 그런데 이후 두 사람은 관중(關中)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게 된다. 회왕이 약속하길, 제일 먼저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 관중을 함락하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고 했던 것이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가장 먼저 함양(咸陽) 동남쪽 교외의 파상(灞上)에 도착하게 된다. 진왕(秦王) 자영(子嬰)은 흰말이 끄는 흰 수레를 타고 지도정(軹道亭)으로 나와 항복했다. 유방은 함양 궁전으로 들어가서 승리를 만끽하는 대신 파상으로 회군했다. 누군가 유방에게 간언하길, 제후국 군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함곡관을 방어하라 했고 유방은 그 말을 따랐다.
이때 항우는 제후국 군대를 이끌고 함곡관을 향하고 있었다. 유방이 먼저 관중을 차지한데다가 함곡관까지 막고 있으니 항우는 분노가 치솟았다. 항우는 함곡관을 돌파한 뒤 홍문(鴻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홍문에서 유방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파상까지의 거리는 40리에 불과하다. 항우가 당장이라도 공격하면 유방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방의 10만 군대로 항우의 40만 대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항우가 공격을 개시하기로 정한 전날까지도 유방은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튿날 날이 밝으면 모든 게 끝장날 터였다. 하늘이 도왔을까. 항우의 백부 항백(項伯)이 밤에 유방의 군영으로 달려갔다. 그는 유방의 참모 장량(張良)을 만나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했다. 일찍이 항백은 장량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때문에 장량을 그냥 죽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장량은 항백을 따라 나서지 않았다. 장량의 주선으로 항백을 만나게 된 유방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함곡관으로 들어온 뒤로 감히 아무 것도 건들지 않고 항장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관문을 지키게 한 것은 도적의 출입을 막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항장군께서 오시기만을 밤낮으로 바라고 있었는데 어찌 감히 반역을 하겠습니까. 제가 배은망덕하지 않다는 것을 부디 항장군께 잘 말씀해주십시오.”
이날 유방은 항백을 형님으로 모셨고 두 집안의 혼사까지 약속했다. 항백은 유방에게 날이 밝으면 항우를 찾아가 사죄하라고 말해주었다. 항백은 그날 밤 항우 군영으로 돌아가 유방의 말을 전하면서 공을 세운 유방을 공격하는 것은 의롭지 않다며 항우를 설득했다. 항우는 이튿날로 계획했던 공격 명령을 거둬들이고 유방을 만나보기로 했다.
홍문연의 아슬아슬한 순간
이튿날 아침 유방은 기병 백여 명을 대동하고 항우를 만나러 홍문으로 갔다. 항우는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이 연회가 바로 그 유명한 홍문연(鴻門宴)이다. 홍문연에 참석한 이는 항우·항백·범증(范增), 그리고 유방·장량이다. 사실 홍문연에는 숨겨진 음모가 있었다. 바로 범증이 기획한 유방 암살이다. 전부터 범증은 유방이 천자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면서, 재물과 여색을 좋아하는 그가 함곡관으로 들어온 뒤 아무 것도 취하지 않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며 유방을 제거할 것을 항우에게 권했다. 이제 유방을 손쉽게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항우는 유방을 죽일 기미가 없었다. 바짝 숙이고 들어와 사죄하는 유방을 죽인다는 게 항우로서는 사나이답지 않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어쩌면 유방이라는 존재가 견제하고 경계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항우는 유방을 그냥 시원스럽게 용서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유방이 항우의 최대의 적수라고 생각하는 범증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유방을 없애야 했다. 범증은 항우에게 유방을 죽이라는 눈짓을 여러 번 보냈다. 항우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범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범증은 항우의 사촌동생 항장(項莊)을 불러, 검무를 추다가 기회를 봐서 유방을 죽이라고 했다.
“술자리에 주흥을 돋울 만한 게 없으니 제가 검무를 추겠습니다.”
항장이 검을 뽑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유방은 그야말로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놓였다. 바로 이때 항백이 다시 한번 나선다. 항백도 검을 뽑아 춤을 추면서 항장의 검으로부터 유방을 보호했다. 살벌한 기운이 감도는 이 순간, 한 남자가 갑자기 막사의 장막을 들추면서 난입한다. 유방을 호위하며 함께 홍문으로 와 있던 번쾌(樊噲)다.
번쾌는 눈을 부라리며 항우를 노려보았다. 이런 번쾌를 무엄하다고 질책할 법하건만 뜻밖에도 항우는 그를 “장사”라고 하면서 술을 주게 한다. 번쾌는 단숨에 큰 술잔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돼지 다리를 주자 번쾌가 방패 위에 익히지도 않은 돼지 다리를 올려놓고 검으로 썰어 먹었다. 항우는 또 그를 “장사”라고 했다. 이 말에 고무되어서였을까, 술에 취해서였을까, 아니면 작정한 말이었을까. 번쾌는 애써 공로를 세운 유방에게 항우가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죽이려고 하니 이는 멸망한 진나라를 잇는 격이라며 그러지 말라고 일갈한다. 항우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번쾌에게 앉으라고 했다. 얼마 뒤 유방이 측간에 다녀오겠다며 번쾌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지금 상황에서 최선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 것이다. 유방은 대동하고 온 기병들과 타고 온 수레를 놔두고 측근 네 사람만 데리고서 샛길을 통해 서둘러 파상의 군영으로 돌아갔다.
인사도 없이 도망친 유방의 뒤치다꺼리는 장량의 몫이었다. 장량은 유방이 항우에게 채 전달하지 못한 예물을 바치며, 유방이 술을 이기지 못해 인사도 못하고 떠났다며 대신 해명했다. 장량은 유방을 대신해 항우에게 백벽(白璧) 한 쌍을 바치고 범증에게 옥두(玉斗) 한 쌍을 바쳤다. 옥 술잔을 받은 범증은 즉시 그것을 바닥에 놓고 검으로 깨뜨리며 말했다.
“에이! 풋내기와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가 없구나. 항왕(항우)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반드시 패공(沛公, 유방)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포로가 될 것이다.”
범증이 ‘풋내기’라며 화를 낸 대상은 검무를 추다가 유방을 죽이는 일에 실패한 항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항우를 향해 내뱉은 말이었다.
깊이 멀리 내다보는 헤아림의 무게
며칠 뒤 항우는 서쪽으로 진격해 함양을 도륙하고 항복한 진왕 자영을 죽이고 진나라 궁실을 불태웠으며, 재물과 여자를 거두어 동쪽으로 돌아갔다. 이때 누군가 항우에게 권하길, 관중에 도읍하면 패왕이 될 수 있다고 했으나 항우는 “부귀해져서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알아주겠느냐”며 그 말을 무시했다. 이때만 해도 천하를 차지할 주인공은 누가 봐도 항우가 될 터였다. 하지만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역전되고 홍문연으로부터 사 년이 지난 뒤 항우는 최후의 순간을 맞게 된다.
패배를 몰랐던 항우는 자신의 마지막 날에도 거듭 말하길,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추적하는 유방의 군사 수백 명을 혼자서 죽였다. 항우는 배를 타고 오강(烏江)을 건너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살 수 있음에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 항우의 선택은, 살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항우를 찾아가 싹싹 빌었던 유방과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건 자존심이 아니다. 송(宋)나라의 학자 범준(范浚)은 항우가 범증을 얻었으나 쓰지 못했고 진평(陳平)을 얻었으나 쓰지 못했고 한신(韓信)을 얻었으나 쓰지 못했고 다들 원망하며 떠나가게 했다며, 그가 망하면서 어찌 하늘을 원망했느냐고 비판했다. “항우에게는 천하를 가질 재능(才)이 있었으나 천하를 가질 헤아림(慮)이 없었다.” 송나라의 문인 소순(蘇洵)의 이 말이야말로 항우와 유방의 운명을 가른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심모원려(深謀遠慮), 깊이 멀리 내다보는 헤아림의 무게는 운명을 결정지을 만큼 막중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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