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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문화의 이모저모 3] 여산 아방궁에 대한 단상

 

[사진1] 아방궁 옛터

 

 

하늘의 모습을 구현하고자 했던 아방궁 건설

  기원전 212년, 진시황은 이전의 궁전이 너무 작다며 위수(渭水) 남쪽 상림원(上林苑)에 새 궁전을 짓기 시작한다. 바로 ‘아방궁’이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아방궁 전전(前殿)의 규모만 해도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은 규모만큼이나 설계도 예사롭지 않다. 원래의 계획대로 완공되었다면, 구름다리 형식의 복도인 각도(閣道)가 위수를 관통하면서 아방궁과 함양궁이 연결되었을 것이다. 이는 천상(天象)을 땅위에 그대로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위수는 은하수를 상징한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북극성과 영실(營室)이 있듯이 위수를 사이에 두고 함양궁과 아방궁이 있으며, 두 별이 각도성으로 연결되듯 함양궁과 아방궁이 각도로 연결되는 구조다. 북극성과 영실은 천제(天帝)가 거주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통일을 이루고 삼황(三皇)과 오제(五帝)보다 위대한 ‘황제(皇帝)’가 된 진시황은 불멸의 신적 존재가 되고자 했다. 천제가 은하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듯 위수를 사이에 둔 함양궁과 아방궁을 오가고자 했던 것이다.

 
 

미완으로 남겨진 아방궁

  중국 역사상 황제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한 진시황은 스스로를 ‘짐(朕)’이라 불렀다. 이후 아방궁을 건설하면서부터는 ‘짐’ 대신 ‘진인(眞人)’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한다. “운기(雲氣)를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서 영원히 존재”하는 진인이 되고자 그는 불사약을 얻고자 했다. 진시황에게 진인의 길을 알려준 건 방사(方士)들이다. 방사 노생(盧生)은 황제가 머무는 장소를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해야 불사약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진시황은 함양 부근 200리 안의 이궁(離宮)과 별관(別館) 270채를 죄다 구름다리 형식의 복도로 연결했다. 그가 함양의 어느 궁전에 행차하고 거처하는지 지상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지상에서의 모든 것을 성취한 진시황은 ‘영원’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그 역시 인간에 불과했다. 방사 노생은 그에게 불사약을 선사하기는커녕 또 다른 방사 후생(侯生)과 함께 도망쳤다. 진시황은 불같이 화를 내며 함양에 있던 방사를 죄다 색출해 460명을 생매장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갱유(坑儒)’ 사건이다. 영생의 꿈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좌절감이 빚어낸 비극이리라.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죽어서 여산 기슭에 묻혔다. 아방궁을 짓기 시작한 지 두 해가 되던 해이자 갱유 사건이 있은 지도 두 해가 되던 해였다. 통일을 이루고 영생까지 꿈꿨지만 그는 이 땅에서 고작 50년을 살다 갔다. 천제가 은하수 위의 다리를 건너 은하수 이편의 궁전에서 저편의 궁전으로 건너가듯 함양성과 아방궁을 오가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이루지 못했다. 아방궁은 미완으로 남겨졌다. 2세 황제 호해(胡亥)는 어떻게든 아방궁을 완공하고자 했다. 황제가 바뀌었으나 가혹한 법 집행, 세금 징수, 노동력 착취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진승(陳勝)이 봉기하자 진나라는 뿌리째 흔들렸다. 여섯 나라는 다시 부활했고 더 이상 통일제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2세 황제는 자살했고 그 뒤를 이은 자영(子嬰)은 왕위에 오른 지 46일 째에 유방(劉邦)에게 투항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나 함양에 들어온 항우(項羽)는 자영을 비롯해 진나라 왕족을 모두 죽이고 궁전을 죄다 불태웠다. 당시의 불길이 석 달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가 기원전 206년, 진시황이 죽은 지 불과 4년 뒤였다.

 
 

두목이 아방궁을 노래한 이유

 

“여섯 나라가 멸망하고 천하가 통일되자 촉산(蜀山)이 민둥산이 되고 아방궁이 나타났다네. 300여 리를 덮어 하늘의 해를 가렸지.”

 

  아방궁이 지어지던 때로부터 약 천년이 지난 당나라 보력(寶曆) 연간, 두목(杜牧)은 「아방궁부(阿房宮賦)」에서 아방궁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묘사했다. 「아방궁부」에서는 항우에 의해 아방궁이 초토화되었다고 한다. 사실 항우가 불태운 건 아방궁이 아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방궁은 겨우 전전의 기초공사만 이루어졌을 뿐이며 불에 탄 흔적도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아방궁은 엄연히 망국을 상징한다. 백성에게 그 거대한 궁전 건설의 짐을 지운 진시황, 그리고 나라가 위기로 치닫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 채 아방궁 공사를 재개한 2세 황제, 이들로 인해 아방궁은 그 자체로 악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두목은 자신이 「아방궁부」를 짓게 된 이유가 “보력 연간에 궁전을 대대적으로 짓고 가무와 여색이 범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토목공사에 열을 올렸던 당시의 황제는 경종(敬宗)이다. 경종은 아버지 목종(穆宗)을 여러 면에서 쏙 빼닮았다. 국정엔 관심이 없고 오직 노는 데만 탐닉했다. 두 사람 모두 각저(角抵, 씨름)와 격국(擊鞠, 폴로) 마니아였다. 목종이 앓아눕게 된 것도 격국 때문인데, 여산(驪山) 화청궁(華淸宮)에서 돌아온 지 며칠 뒤 환관들과 격국을 하던 중 환관 한 명이 별안간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쇼크를 받아서 중풍에 걸렸던 것이다. 그렇게 목종은 여산 화청궁에 다녀온 뒤 앓다가 두 해 만에 서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산은 불길함의 대명사 같은 곳이었다. 목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여산행을 강행하려 했을 때 신하들은 이렇게 말하며 극구 말렸다. “옛날에 주나라 유왕(幽王))은 여산에 행차했다가 견융에게 피살당했습니다. 진시황이 여산에 묻힌 뒤 그 나라가 망했사옵니다. 현종(玄宗)께서 여산에 궁을 짓고 지내시다가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선제께서는 여산에 행차하셨다가 오래 사시지 못했사옵니다.” 만약 여산에 갔다가는 목숨도 나라도 잃을 것이라는 말에 경종은 코웃음을 쳤다. 그 이듬해 겨울, 경종은 야간 여우사냥에 나섰다가 한밤중에 궁으로 돌아와 술자리를 열었다. 술기가 올라와 경종이 옷을 갈아입으러 다른 방으로 간 사이에 갑자기 등불이 꺼졌다. 경종은 어둠 속에서 환관에 의해 피살되었다. 열여덟이었다.

  두목이 「이방궁부」를 지은 건 바로 경종이 죽기 한 해 전이다. 여기저기에 건물이 들어서던 당시에 두목은 작금의 사태가 천년 전의 데자뷰로 다가오는 듯했다. 게다가 당시 당나라는 진즉 내리막길이었고 환관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환관들은 멋대로 황제를 옹위하고 입맛에 맞지 않으면 시해하기도 했다. 경종은 이런 시대에 살면서 유흥에 빠져 지내며 환관을 믿었던 것이다. 신하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여산행을 강행한 경종은 결국 유왕·진시황·현종·목종의 전철을 밟았다. 이 어찌 여산의 불길함이 그를 덮친 것이랴.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라도 「아방궁부」의 마지막 구절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진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슬퍼할 겨를도 없이 망해 버려 후세 사람들이 그들을 슬퍼해주었다. 후세 사람들이 슬퍼만 하고 거울삼지 않는다면 더 후세 사람들 역시 이들을 슬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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