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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문화의 이모저모 10] 왕소군 이야기

 

[사진1] 중국 4대 미녀상(서시·왕소군·초선·양귀비)

 

한나라에 입조한 흉노의 선우

  기원전 51년 정월,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나라에 입조해 선제(宣帝)를 알현했다. 이는 흉노와 한나라의 오랜 대립 관계에 마침표를 찍은 사건이다.

  저제후(且鞮侯)선우 시기부터 흉노는 실크로드상의 요새 지역을 한나라에 빼앗겼다. 서역 경영을 통한 수입이 감소하면서 흉노의 경제는 심한 타격을 입었다. 자연재해까지 더해졌다. 눈이 여러 달에 걸쳐 내리면서 가축은 죽고 백성은 병에 걸리고 곡식은 열리지 않았다. 게다가 내부의 권력 투쟁까지 극에 달했다. 다섯 명의 선우가 병립하던 상태를 호한야선우가 종식시키자마자 호한야선우의 형인 질지(郅支) 역시 선우로 나서서 그를 공격했다. 질지선우에게 패한 호한야선우는 한나라에 원조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흉노가 한나라에 복종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반대하는 신하들에 맞서 좌이질자(左伊秩訾)가 이렇게 말했다. “강함과 약함에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한나라가 강성하여 오손(烏孫)과 제후국이 모두 한나라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저제후선우 이래 흉노는 날로 쇠약해져 회복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비록 지금 강하게 버틸지라도 하루조차 안전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한나라를 섬기면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으나 섬기지 않으면 멸망의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이보다 나은 계책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호한야선우는 좌이질자의 계책에 따라 한나라 변방으로 남하하고 아들을 한나라에 입조시켰다. 질지선우 역시 아들을 한나라에 입조시켰다. 한나라와의 관계에서 질지선우보다 우위를 차지하고자 호한야선우는 자신을 더욱 낮추어, 기원전 51년과 기원전 49년에 직접 한나라에 입조했다. 결국 호한야선우는 한나라로부터 확실한 원조를 받았고, 질지선우는 열세에 빠졌다. 실크로드를 독점하려던 한나라에 의해 질지선우는 결국 살해되고 만다.

 

 

흉노 선우에게 보내진 왕소군

  호한야선우는 기원전 33년에 또 한나라에 입조한다. 이때의 입조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니, 호한야선우가 통혼을 요청한 것이다. 원제(元帝)는 세 번째 입조한 호한야선우에게 왕소군(王昭君)을 주게 된다.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입궁한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황제를 만나지 못해 슬픔과 원망이 쌓인 왕소군이 흉노로 가겠노라 자청했다고 한다. 원제는 호한야선우를 위한 연회를 열고 그에게 하사한 다섯 명의 여인을 불렀다. 이때 원제는 처음으로 왕소군을 보게 된다. 궁전을 밝힐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를 보고 원제는 깜짝 놀란다. 그는 왕소군을 곁에 남겨두고 싶지만 흉노와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었기에 결국 왕소군을 흉노로 떠나보낸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왕소군이 흉노로 가게 된 것과 관련해 전혀 다른 내막이 전해진다. 원제는 화가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후궁을 선택했기에 궁녀들은 죄다 화가에게 뇌물을 바쳤다. 그런데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고, 화가는 왕소군을 추하게 그렸다. 왕소군은 황제의 부름을 받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흉노에 보내질 여자로 선택되고 만다. 왕소군이 흉노로 가기 직전에야 그녀를 본 원제는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왕소군을 떠나보낸 원제는 화가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왕소군이 흉노로 떠나고 몇 달 뒤 원제는 세상을 뜨고 만다. 한편 왕소군은 흉노에 정착해 아들 한 명과 딸 둘을 낳는다. 그런데 그녀가 낳은 아들의 아버지와 딸들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다. 게다가 아들과 딸의 관계는 삼촌과 조카 사이다. 이는 아버지나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 흉노의 풍속 때문이다. 이러한 수계혼제(收繼婚制)는 혈족의 단결과 재부의 보존을 위한 제도로, 흉노를 비롯한 북방유목민에게서 일반적이었다.

  기원전 31년 호한야선우가 노환으로 세상을 뜬 뒤 그의 장자인 복주루(復株累)선우는 흉노의 풍속에 따라 왕소군을 아내로 맞고자 했다. 이때 왕소군은 한나라 성제(成帝)에게 한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성제가 내린 칙령은 “흉노의 풍속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왕소군은 복주루선우의 아내가 되어 두 딸을 낳는다. 호한야선우의 아내로 있으면서 낳은 아들은 이 딸들의 오빠이자 삼촌이 되는 것이다. 왕소군이 복주루선우와 부부로 지낸 기간은 11년이다. 복주루선우가 세상을 떴을 때 왕소군은 서른 중반이었다. 이후 왕소군의 행적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채옹(蔡邕)의 『금조(琴操)』에는 호한야선우가 죽은 뒤 왕소군이 음독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너는 한나라 사람이고 싶으냐, 흉노 사람이고 싶으냐?”라는 왕소군의 질문에, 그녀의 친아들이 “흉노 사람이고 싶다”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친아들의 아내가 되지 않고자 왕소군은 결국 독약을 삼켜 자살했다고 한다. 사실 수계혼제에서 친모자 관계는 예외이기 때문에 『금조』의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무튼 한나라에서 나고 자란 왕소군으로서는 흉노의 혼인 풍속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척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부자(父子)에게 능욕당하니 부끄럽고 놀라워라. 스스로 죽는 게 참으로 어려워 묵묵히 구차하게 살아가네”(석계륜(石季倫)의 「왕명군사(王明君詞)」)라는 표현은, 엄청난 가치관의 충돌과 문화충격으로 괴로웠을 왕소군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또 하나의 이야기, 또 하나의 슬픔

  중국의 4대 미녀로 꼽히는 왕소군을 가리켜 ‘낙안(落雁)’이라고 한다. 구슬프게 비파를 연주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기러기가 날갯짓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절세미녀의 비극적인 삶은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되었다. 왕소군 이야기는 여러 버전으로 변주되는데, 원(元)나라 마치원(馬致遠)의 『한궁추(漢宮秋)』에서는 원제와 왕소군이 사랑의 인연을 맺는 것으로 나온다. 어느 날 밤, 원제는 왕소군의 비파 소리를 듣고 그녀를 데려오게 한다. 왕소군이 궁에 들어온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왕소군에게 뇌물을 받지 못한 화가 모연수(毛延壽)의 농간 때문에 이제야 만나게 된 것이다. 위기에 처한 모연수는 흉노로 도망쳐 호한야선우에게 왕소군의 실제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여준다. 호한야선우는 원제에게 왕소군을 달라고 한다. 왕소군을 사랑하게 된 원제는 불같이 화를 내며 거절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반대한다. 달기(妲己) 때문에 망국에 이른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보라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왕소군은 흉노로 가겠노라 자청한다. 원제는 황제인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왕소군을 떠나보낸다. 흉노로 가던 왕소군은 흑룡강(黑龍江) 강변에 이르렀을 때 강물에 몸을 던진다. 호한야선우는 그녀를 묻어주고 모연수를 한나라로 보낸다. 한편 왕소군의 그림을 걸어 두고 밤낮으로 바라보며 슬퍼하던 원제는 꿈속에서 왕소군을 보고 깜짝 놀라 깨어난다. 기러기 울음소리 들려오는 한나라 궁전의 깊은 가을밤, 원제는 슬픔에 잠긴다. 다음날 원제는 왕소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모연수의 목을 쳐서 그녀의 영혼을 위로한다.

  『후한서』, 『서경잡기』, 『금조』 그리고 『한궁추』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이야기의 변주도 왕소군의 영혼을 위로할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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