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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문화의 이모저모 21] 곽자의와 회흘에 대한 단상

 

[사진1] 대학습항 패방

 

 

내란과 외침으로부터 당나라를 지킨 곽자의

  현종·숙종·대종에 이어 덕종까지 무려 네 명의 황제를 섬기면서 안사(安史)의 난과 잇따른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당나라를 지킨 이가 있으니, 바로 곽자의(郭子儀)다. 안사의 난으로 도피해 지내던 현종과 숙종이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757년에 곽자의가 장안(長安)을 수복한 덕분이다. 오랜 전란으로 당나라의 병력이 허술해진 틈을 타서 763년에는 토번(吐蕃)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당시 황제였던 대종 역시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다가 곽자의가 장안을 수복한 덕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764년에는 삭방(朔方)절도사 복고회은(僕固懷恩)이 회흘과 토번 등 30만에 달하는 이민족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막아낸 인물도 곽자의다. 이듬해 이어진 토번과 회흘(回紇)의 침략을 격퇴한 인물도 곽자의다.

  숙종이 곽자의에게 “비록 나의 나라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경이 다시 세운 것이오”라고 한 말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 욕심내고 실행에 옮겼다면 제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지점에 곽자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권력은 천하를 기울일 정도였지만 조정이 꺼리지 않았고, 공적은 한 세대를 덮을 정도였지만 군주가 의심하지 않았다”(『구당서(舊唐書)』 「곽자의전」)고 역사는 전한다. 과연 그랬을까? 사실 곽자의는 모함도 당하고 의심도 받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당나라에 위기가 찾아왔고 번번이 그가 해결사로 나섰다.

  곽자의는 안사의 난을 계기로 삭방절도사에 임용되면서 군공을 세우게 된다. 삭방절도사는 북적(北狄), 즉 북쪽의 외적을 막기 위해 현종 때부터 설치된 관직이다. 당나라 때 약 70명의 삭방절도사가 있었고 그중에서 재상의 자리까지 오른 이가 무려 16명이나 된다. 곽자의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삭방절도사가 관할한 범위는 오늘날 닝샤(寧夏)를 비롯해 내몽고 하투(河套) 지역, 산시(陝西) 북부 및 간쑤(甘肅) 일부 지역이다. 역대로 삭방절도사는 돌궐·토번 등의 침략을 막아내면서 군공을 세웠다. 또한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절도사’는 당나라에게 ‘양날의 검’과 같았다. 변방을 지키기 위해서 절도사가 필요했지만, 막강한 권한을 지닌 절도사 자체가 위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이 대표적인 경우다. 평로(平盧)·범양(范陽)·하동(河東) 세 지역의 절도사를 겸한 그는 당나라 병력의 무려 3분의 1일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가 15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수도를 향했을 때 현종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망치는 일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현종이 삭방절도사로 임명한 곽자의가 안사의 난을 평정했다는 것이다.

 

 

대학습항과 청진사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나라는 몽골 고원의 위구르 제국(744-840)에게 도움을 청했다. 위구르 제국의 구성원은 당나라 때 회흘, 회골(回鶻)이라 칭해지던 튀르크계 민족이다. 곽자의를 도와서 안사의 난을 진압한 회흘 가운데 200여 명이 장안에 남게 된다. 이들이 거주했던 곳이 바로 ‘대학습항(大學習巷)’이라고 한다.

  ‘항(巷)’은 거리를 뜻하는데, 시안(西安) 서대가(西大街)의 성황묘(城隍廟) 남쪽 입구에서 서쪽으로 100미터 쯤 되는 지점에서 남북으로 뻗은 400미터의 거리가 바로 대학습항이다. 당나라 때 외교 업무를 관장하던 예부(禮部)의 주객사(主客司)와 외빈 접대를 담당하던 홍려시(鴻臚寺) 사이에 대학습항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외국인이 한족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도록 이곳에 학관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 거리에 ‘학습’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유래다. 이곳을 중심으로 현재 회민가(回民街), 즉 회족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회족거리 일대는 당나라 때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다양한 민족 성분의 상인·사절·유학생이 거주하던 곳이다. ‘안사의 난’의 진압을 도운 뒤 장안에 남았던 회흘 역시 이곳에 거주한 다양한 민족 가운데 하나다. 현재 이곳 거주민 대부분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지키고 있는 회족이다. 이들은 주로 원나라 때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건너온 색목인(色目人)의 후손이다.

  회족거리와 이슬람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는데, 청진사(淸眞寺)라고 불리는 이슬람 사원이 그 증거다. 시안의 대표적인 청진사 두 곳이 바로 회족거리의 대학습항과 화각항(化覺巷)에 있다. 서쪽의 대학습항 청진사는 서대사(西大寺)라고도 하고, 동쪽의 화각항 청진대사(淸眞大寺)는 동대사(東大寺)라고도 한다. 각각 중종과 현종 때 처음 세워졌으니, 회족거리의 이슬람 역사는 무려 1300년이 넘는다. 이곳에 정착하여 대대로 이슬람 언어와 전통을 지켜온 이들은 외교적 측면에서 훌륭한 자산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대학습항 청진사의 이맘(Imam, 이슬람교 성직자)이었던 핫산(哈三)이다.

  15세기 초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때 삼보태감(三保太監) 정화(鄭和)는 동남아시아와 인도와 아프리카를 누비는 대항해를 이어갔다. 그가 네 번째 항해를 떠나기 전에 통역과 고문의 역할을 해줄 적임자로 발탁한 이가 바로 핫산이다. 핫산은 정화를 수행하여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한다. 정화는 영락제에게 핫산의 공로를 보고하고 대학습항의 청진사를 중수할 것을 주청한다. 이 일이 바로 대학습항 청진사의 <중수청정사비(重修淸淨寺碑)>(명나라 때는 대학습항 청진사의 명칭이 ‘청정사’였다)에 기록되어 있다. 비석 정면에는 한자로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 비석은 훼손되어 가정(嘉靖) 연간에 새로 새겼는데, 대학습항 청진사의 남쪽 비정(碑亭)에 보관된 이 비석을 일명 ‘정화비’라고도 한다.

 

 

수도에서 자행된 이민족의 범죄

  곽자의를 도와 안사의 난을 진압한 뒤 장안 대학습항에 남았던 회흘 사람들은 과연 당나라 문물을 잘 ‘학습’했을까? 『신당서』 「회흘전」에 의하면, 대력 6년(771) 장안에 머물던 회흘 사람들이 시장에서 여자를 겁탈한 사건이 있었고, 이듬해에는 시장의 물건을 강탈하고 장안령(長安令)의 말을 빼앗았는데도 담당자가 감히 따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이 이렇듯 제멋대로 굴 수 있었던 건 당나라에 병력을 원조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를 빌미로 그들은 자신들의 말과 당나라의 비단을 교환하는 견마(絹馬) 무역에서 터무니없을 정도의 요구를 했다. 숙종 건원(乾元) 연간(758-760) 이후 그들은 해마다 수만 필의 말을 가지고 와서는 홍려시에 머물면서 약해 빠져 쓸모도 없는 말을 거의 강매하다시피 떠넘긴 것이다. 심지어 대력 10년(775)에는 멋대로 사람을 죽인 사건이 발생해 경조윤(京兆尹)이 체포했지만 결국 황제가 죄를 추궁하지 말라는 조서를 내리기도 했다. 또 같은 해에 동시(東市)에서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갇히자 옥리를 죽이고 탈옥한 사건도 있었다.

  당나라는 회흘을 이용해 안사의 난을 진압했으며, 이후에 회흘과 토번이 함께 쳐들어 왔을 때는 회흘을 설득해 동맹을 맺고 토번을 격퇴하기도 했다.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줘야 하는 법. 수도에서 자행되는 이민족의 범죄행위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다 그 이유가 있었다. 곽자의 역시 “조정이 꺼리지 않았고, 군주가 의심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더 위험한 적이 날뛰고 있으니 감히 그를 내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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