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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문화의 이모저모 20] 영태공주와 의덕태자는 왜 죽임을 당했나?

 

 

[사진1] 건릉의 무자비

 

 

701년에 일어난 황실의 비극

  690년, 측천무후는 성신(聖神)황제로 즉위하면서 나라이름까지 주(周)라고 바꿨다.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이 여황제는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이해에 연호는 재초(載初)에서 천수(天授)로 바뀌었다. 세계가 황제에게 속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게 바로 연호다. 새 황제가 즉위하면 자신만의 새 연호를 사용했다. 하늘의 길조나 나라 안팎으로 큰일이 생기면 연호를 바꾸기도 하는데, 측천무후는 690년부터 705년까지 무려 14개의 연호를 사용했다. 하늘이 내려주었다는 의미의 ‘천수’는 측천무후의 첫 번째 연호다. 측천무후가 황제가 된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리라. 701년은 장안(長安) 원년으로, 장안이 한동안 상실했던 수도의 지위를 회복한 해다.

  장안 원년으로 접어들기 한 달 전인 대족(大足) 원년 9월, 황실에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다. 이 비극 이후 측천무후는 수도를 낙양에서 다시 장안으로 옮긴다. 비극의 주인공은 이중윤(李重淪)과 이선혜(李仙蕙). 남매지간인 이들은 열아홉 열일곱 꽃다운 나이로 세상과 작별했다. 그 사연을 알아보자.

  682년, 이중윤은 아버지 이현(李顯, 훗날의 중종)이 황태자로 있을 때 태어났다. 고종은 손자의 탄생이 얼마나 기뻤던지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까지 영순(永淳)으로 바꿨다. 그리고 이 손자를 황태손으로 정했다. 이듬해 고종이 병사하고 중종이 즉위하지만 두 달도 못돼 폐위되고 만다. 이중윤 역시 폐서인이 되어 부모와 함께 장안에서 쫓겨났다. 이후 시간은 흘러 어느덧 699년, 황제로 있던 측천무후가 중종을 불러들여 황태자로 세운다. 순리대로라면 언젠가 황위는 이중윤에게 돌아올 터였다.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너무 가혹했다. 701년 열아홉의 그는 측천무후의 명에 의해 맞아 죽었다.

  이중윤뿐 아니라 여동생 이선혜와 그녀의 남편 무연기(武延基) 역시 측천무후의 명으로 죽게 된다. 이중윤은 훗날 황제가 될 손자였고, 이선혜는 임신까지 하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이 둘에 대한 중종의 사랑도 각별했다. 무연기는 또 어떤가. 그는 바로 무승사(武承嗣)의 맏아들이다. 무승사는 측천무후가 만년에 황위까지 물려줄 생각을 했을 정도로 아끼던 조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측천무후는 이들을 죽게 했을까?

  이중윤이 여동생이랑 매제와 은밀히 논의한 대상이 화근이었다. 이들이 나눈 이야기는 장역지(張易之) 형제가 어찌 제멋대로 궁중을 드나드느냐는 것이었다. 장역지 형제, 즉 장역지와 장창종(張昌宗)은 측천무후의 남총(男寵)이었다. 남총이란 권력자의 총애를 받는 젊고 잘생긴 남자다. 측천무후는 이들과 정신적·육체적으로 가까운 관계였다. 장역지 형제가 국정을 농단하던 상황에서, 세 사람이 이를 논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코 바깥으로 알려져서는 안 될 논의였다. 불행히도 이 소식은 측천무후에게 알려졌고 결국 이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영태공주와 의덕태자의 무덤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인 건릉(乾陵) 남동쪽에 이중윤과 이선혜의 무덤이 있다. 건릉의 17개 배장묘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황제인 할머니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의 무덤이 어떻게 이토록 위풍당당할 수 있을까?

  이중윤과 이선혜가 죽은 지 사 년이 지난 705년, 재상 장간지(張柬之)가 좌우우림병(左右羽林兵)을 이끌고 황궁으로 들어가 장역지 형제를 죽인다. 측천무후는 황위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중종이 복위한 이해 겨울 측천무후는 82세로 세상을 떠난다. 복위한 중종은 아들 이중윤을 황태자로 추증하고 ‘의덕(懿德)’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딸 이선혜를 영태(永泰)공주로 추증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건릉에 배장했다. 이렇게 개장(改葬)하면서 두 사람의 묘는 제왕의 능에 준하여 조성되었다. 이를 ‘호묘위능(號墓爲陵)’이라고 하는데, 이씨 왕조의 복벽(復辟)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둘 중 세상에 먼저 알려진 건 영태공주의 묘이다. 1960년에 ‘건릉 발굴 위원회’가 성립되었지만 결국 건릉의 발굴이 훗날을 기약하게 되면서, 대신 배장묘 가운데 하나를 발굴하기로 한다. 이때 선택된 것이 측천무후의 둘째아들 장회(章懷)태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였다. 그런데 지하궁전에서 <대당 고영태공주 지명(大唐故永泰公主志銘)>이라는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묘주가 영태공주임이 밝혀졌다. 또한 영태공주의 사인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나오게 된다. 의덕태자를 비롯한 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기존에 여러 견해가 있었다. 『구당서(舊唐書)』만 하더라도 측천무후가 자살하도록 명했다, 장형(杖刑)에 처하여 죽게 했다, 교수형에 처하여 죽게 했다는 등 각 편에 따라 다른 내용을 전한다. 아무튼 측천무후가 죽게 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영태공주 묘지명에는 직접적인 사인이 밝혀져 있지 않고, 대신 “주태훼월(珠胎毁月)”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태’란 임신했음을 의미하고 ‘훼월’이란 달을 채우지 못하고 유산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영태공주가 난산으로 죽었을 것이라는 설이 등장하게 된다. 게다가 유골 조각을 이용해 골반뼈를 복원한 결과 영태공주의 골반이 매우 작았음이 밝혀지자 난산설에 무게가 실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측천무후가 혐의를 벗을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영태공주가 죽은 건 대족 원년 9월 초나흘, 바로 전날에 그녀의 남편과 오빠가 죽었다. 열일곱의 어린 임산부가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래서 조산을 하게 되고 난산으로 죽었을 것이다. 난산이 아니더라도 영태공주는 죽을 운명이었다. 그녀가 남편과 오빠와 함께 처형당하지 않은 것은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다. 당나라 법률에 따르면 임신한 여성은 죽을죄를 지었더라도 곧바로 형을 집행할 수 없었으며, 출산하고 백 일이 지나야 형 집행이 가능했다. 즉 영태공주가 순산했다 하더라도 백 일 뒤에는 처형되었을 거라는 의미다. 남편이 죽은 바로 다음날 그 뒤를 따르게 된 그녀는 몇 년 뒤 건릉 남동쪽에 남편과 합장되었다.

  영태공주 묘에서 동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지점에 의덕태자의 묘가 있다. 의덕태자 묘 역시 합장묘다. 그런데 의덕태자는 결혼한 적이 없다. 『구당서』에 따르면, 중종이 복위한 뒤 그를 건릉에 배장하면서 국자감승(國子監丞) 배수(裵粹)의 죽은 딸과 합장했다고 한다. 의덕태자와 배수의 딸은, 미혼으로 죽은 남녀를 혼인시키는 명혼(冥婚)을 통해 부부가 된 것이다. 1971년에 의덕태자 묘가 발굴되었을 때 묘실의 석관 안에서 정말로 남녀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었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각별했던” 아들을 측천무후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던 중종은 이렇게라도 그 한을 풀어주려 애썼던 듯하다. 무덤 벽의 <의장도(儀仗圖)>와 <궐루도(闕樓圖)> 역시 의덕태자가 살아서 향유했어야 할 것들을 상징한다. 화려한 수레, 질서정연한 호위대, 수많은 문무백관으로 구성된 이 의장행렬을 의덕태자는 생전에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하나의 몸채와 두 개의 곁채로 구성된 ‘삼출궐(三出厥)’ 형식의, 황제만이 소유할 수 있는 ‘궐(厥)’을 향유하기도 전에 의덕태자는 할머니 측천무후의 명으로 맞아 죽었다!

 

 

측천무후의 비에 글자가 없는 이유는?

  중종은 아들과 딸뿐 아니라 형 장회태자 역시 건릉에 배장했다. 준수한 용모와 바른 행동거지와 뛰어난 학식으로 아버지 고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장회태자는 일찍이 태자로 세워졌지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어머니 측천무후가 장회태자를 모반죄로 몰아 폐서인시키고 머나먼 파주(巴州)로 유배 보낸 것도 모자라 몇 년이 지난 684년에 결국 자진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중종은 생때같은 자식을 측천무후 때문에 잃었던 만큼 형에 대한 동병상련의 정도 깊었을 것이다. 그는 형의 묘도 자신의 아들딸에 못지않은 규모로 개장했다.

  의덕태자·영태공주·장회태자, 눈부신 청춘에 비명횡사한 이들에게 측천무후는 어떤 존재일까? 측천무후에게 죽임을 당한 피붙이가 어디 이들뿐인가. 일찍이 측천무후는 갓난아기였던 자신의 딸을 목 졸라 죽이고 황후에게 덮어씌워 그 자리를 꿰찼다. 능력 있던 첫째·둘째 아들은 어머니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꼭두각시 셋째·넷째 아들은 어머니 입맛에 따라 황제가 되기도 하고 폐위되기도 했다.

  건릉에 우뚝 세워진 측천무후의 비에는 글자가 없다. 그래서 비명이 ‘무자비(無字碑)’다. 측천무후의 유언에 따라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았다고 한다. 항간의 이야기처럼 비문에 다 적기에는 너무 많은 공적을 세워서일까, 아니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저지른 잔인한 일들을 차마 적을 수 없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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