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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문화의 이모저모 22] 시안사변의 전말

 

[사진1] 화청지의 오간청

 

 

19361212일 새벽에 울린 총성

  우리의 삶도 역사도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되돌리고픈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1936년 12월 12일, 장제스(蔣介石)에게는 이날이야말로 바로 그런 순간일 것이다. 이날 새벽, 시안(西安)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화청지(華淸池)에서 총성이 울렸다. 화청지 오간청(五間廳)에 묵고 있던 장제스는 얼른 뒤쪽 산으로 도망쳤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그는 동북군 일부가 아닌 전체의 반란임을 깨달았다. 숨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급히 산을 내려오던 그는 그만 바위틈에 빠지고 만다.

  이때 시안 성내를 지키고 있던 장쉐량(張學良)은, 여산(驪山) 일대를 샅샅이 수색해 장제스를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마침내 오간청에서 500미터 쯤 떨어진 바위에서 장제스를 찾아냈을 때 그의 몰골은 딱하기 짝이 없었다. 잠옷 차림에 얼굴은 추위와 공포로 창백하고 손은 가시에 찔려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맨발에 발까지 다친 그는 장쉐량의 부하에게 업힌 채 산을 내려갔다. 산 아래에는 그를 시안 성내로 데려가기 위한 호송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장제스가 숨어 있다가 잡힌 바위 근처에 이날의 일을 기념하기 위한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자의 이름은 병간정(兵諫亭). 무력으로 간언한다는 의미의 ‘병간’이란, 윗사람에게 무력을 행사해 반드시 요구사항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위해 병간을 일으킨 것일까?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의 파기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내부의 공산당부터 먼저 평정한 뒤에 외적 일본을 물리친다는 방침을 고수하면서 공산당 토벌에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당시 시안은 국민당의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과 서북군 총사령관 양후청(楊虎城)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장쉐량은 이미 공산당의 류딩(劉鼎)과 항일 노선에 합의한 터였다. 일찍이 1936년 3월에 류딩은 공산당을 대표해 시안에서 장쉐량을 만났다. 류딩은 현상황을 분석하며 항일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장쉐량을 설득했다. 그리고 4월 9일, 옌안(延安)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장쉐량이 밤새워 논의한 끝에 홍군(紅軍)과 동북군은 정전에 합의하고 함께 일본에 맞서기로 약속한다. 이 회담 이후 공산당은 류딩을 주(駐)동북군 대표로 시안에 파견했다.

  당시 섬북(陝北)에 있던 홍군에게는 의약품·의료기계·통신기자재 등이 절실히 필요했고, 류딩은 저우언라이의 지령을 받아 이 물자들을 공금해줄 비밀 아지트를 운영했다. 시안 칠현장(七賢莊)에 있는 한 치과가 그 아지트였다. ‘독일 치의학 박사 펑하이보(馮海伯) 치과’라는 간판을 내건 이곳의 병원장은 베를린대학 출신의 치의학 박사 윈치 히버트였다. 유대계 독일인이자 독일 공산당원인 그는 일찍이 반파시스트운동에 참가했다가 독일 파시스트정부에 의해 추방당했고, 1936년에 『중국의 소리(The Voice of China)』 편집자인 매니 그래니치의 권유로 중국에 왔다. 그리고 얼마 뒤, 미국 출신의 여성 혁명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소개로 류딩을 알게 되고 류딩의 제안으로 시안에 치과를 열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류딩은 공산당의 방송통신 업무도 책임지고 있었다. 치과 지하의 아지트에서 낮에는 중국공산당의 ‘홍중사(紅中社, 홍색중화통신(紅色中華通訊社)의 간칭으로, 신화(新華)통신사의 전신이다)’에서 보내오는 소식을 수신하고 심야가 되면 이를 외부로 내보냈다. 또한 히버트는 장쉐량의 치과주치의였고 국민당 동북군과 서북군의 장병들도 이곳에 와서 진료를 받았다. 히버트의 치과는 공산당과 국민당 동북군·서북군의 은밀한 동거 장소였던 셈이다.

 

 

기사회생한 공산당

  장제스는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러 시안에 왔고, ‘시안사변’이 일어난 것이다. 1936년 12월 12일 오전, 장쉐량과 양후청이 주축이 되어 발표한 「대(對)시국선언」에서는 다음 8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난징(南京)정부를 개편해 모든 정파를 받아들여 함께 구국을 책임지도록 하라, 일체의 내전을 중지하라, 상하이에 체포되어 있는 애국 지도자들을 즉시 석방하라, 전국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라, 민중의 애국운동을 전면 허락하라, 인민의 집회·결사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라, 쑨원(孫文)의 유지를 확실히 이행하라, 구국 회의를 즉시 소집하라.

  시안사변을 둘러싼 입장은 진영마다 제각각이었다. 일본에서는 장쉐량이 소련의 지지를 받아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려 한다고 분석했다. 한편 소련에서는 장쉐량이 난징정부를 위험에 빠뜨려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를 돕게 된 꼴이라고 분석했다. 「대시국선언」의 요구사항을 맞닥뜨린 국민당 난징정부에서는 장쉐량을 ‘토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중국 내 대다수 언론매체 역시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었던 만큼 장쉐량을 질책하는 분위기였다.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에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난징정부는 서북의 모든 통신과 교통을 차단했고, 서북의 신문과 선전물이 죄다 소각되었다. 시안에서는 정부군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고 하루 종일 방송했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해명하면서 서로 이성적으로 처신할 것을 호소하고 평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난징의 강력한 방송국의 교란 탓에 그들의 모든 말이 묻히고 말았다. 중국에서 모든 공공언론에 대한 독재정권의 가공할 위력이 여태껏 이토록 강력히 표현된 적이 없다.”

 

  시안에서는 장쉐량을 지지하는 가두행전이 벌어지고, 「대시국선언」의 요구사항이 성벽에 나붙고 내전 중지와 항일을 촉구하는 선전 포스터가 걸렸지만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러한 지지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정작 장쉐량이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건 공산당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시안사변이 오롯이 항일의 입장에 서 있는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류샤오치(劉少奇)는 난징정부 내의 항일파와 중간파를 항일 전선으로 끌어내기 위해, 난징정부와 대립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상황은 난징정부가 곧장 시안을 공격할 기세였다. 신속한 사태 수습을 위해 저우언라이가 시안으로 가게 되었다.

  12월 15일 아침 바오안(保安, 지금의 즈단(志丹))에서 출발한 저우언라이가 시안에 도착한 건 17일 황혼 무렵이다. 한시가 급한 일인 만큼 최대한 서둘렀음에도 그랬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저우언라이는 말을 타고 갔던 것이다. 그나마 17일 오후에 비행기를 탈 수 있었기에 그날 저녁 무렵 시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비행기는 장쉐량이 보낸 전용기다. 그렇다. 말과 전용기, 이는 당시 공산당과 국민당의 물적 역량의 차이를 상징하는 것이다. 장제스 한 명을 처리한다고 해서 공산당이 국민당을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만약 시간을 더 지체하거나 장제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국민당의 공산당 공격이 더욱 고삐를 죄게 될 것이고, 내전이 격화되면 일본만 이득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 공산당의 우려였다. 공산당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 사태를 조속히 평화롭게 끝내야 했다. 저우언라이가 시안에 온 며칠 뒤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도 비행기를 타고 시안으로 왔다. 그리고 12월 25일, 장제스는 비행기를 타고 시안을 떠나 이튿날 무사히 난징에 도착한다. 내전 중지를 구두로만 약속했을 뿐 그 어떤 합의문에도 서명하지 않은 채. 아무튼 시안사변을 계기로 공산당은 기사회생하게 된다.

 

 

민족의 영웅인가, 역사의 죄인인가

  시안사변 직전까지 공산당의 비밀 아지트였던 히버트의 치과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팔로군 시안 판사처(八路軍西安辦事處) 기념관’이 있다. 시안사변 이후 비밀 아지트는 공식적으로 ‘홍군 연락처’가 되었다. 그리고 1937년에 7·7사변이 발발한 뒤 홍군이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편제되면서 ‘팔로군 시안 판사처’가 되어, 제2차 국공합작 기간(1937-1945) 동안 항일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면서 국공합작은 종말을 고하고, 본격적으로 국공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궁금하다. 국민당이 중국을 차지했다면 세계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한반도는 지금 하나일까 아니면 여전히 분단 상태일까. 덧붙이자면, 시안사변의 주인공 장쉐량은 무려 53년하고도 6개월 동안 연금 생활을 했다. 공산당에게 그는 “민족의 영웅, 천고의 공신”(저우언라이)이겠지만 국민당은 그를 ‘역사의 죄인’으로 평가한다. 아무튼 국민당은 그 죗값을 참으로 톡톡히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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