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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문화의 이모저모 19] 건릉의 석인상에 대한 단상

 

[사진1] 건릉의 61개 석인상

 

 

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능

  당 고종과 측천무후를 합장한 건릉(乾陵)은 당나라 황제의 18개 능 가운데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 태종 때부터 산을 능으로 삼는 방식을 택했는데, 건릉은 양산(梁山)의 일부다. 당나라 말 황소(黃巢)가 건릉을 도굴하려고 40만 명을 동원했지만 묘도(墓道)의 입구조차 찾지 못했다고 한다. 중화민국 초에는 국민당의 쑨롄중(孫連仲) 장군이 건릉 보호를 구실로 양산에 주둔하면서 군사훈련으로 위장하여 폭약까지 사용해 도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어디 황소와 쑨롄중뿐이랴. 셀 수 없을 만큼의 도굴 시도가 있었다.

  묘도의 입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우연이었다. 1958년 겨울, 시란(西蘭) 고속도로 공사에 석재가 많이 필요했는데 농민 몇 명이 양산의 주봉 동남쪽에서 석재 채취를 위해 폭파 작업을 하게 된다. 이때 그들은 이곳이 묘도의 입구임을 직감했다. 돌에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고 철까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에 의하면 건릉의 묘도 입구를 돌로 막고 철을 녹여 부어서 돌과 철이 한 덩어리가 되게 만들었다고 한다. 만약 이곳이 정말 건릉 묘도의 입구라면 그야말로 ‘대사건’이었다. 그들은 즉시 현지 정부에 보고했고, 산시성(陝西省) 문물관리위원에서 조사에 나섰다. 마침내 1960년에 ‘건릉 발굴 위원회’가 성립되었고 묘도의 위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건릉 발굴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 당시 국무원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이 일은 후대가 완성하도록 남겨 두자”는 지침을 내렸기 때문이다. 섣부른 발굴에 의해 만회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우려가 크니, 그냥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보존일 것이다. 최근 들어서 건릉 발굴의 가능성과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긴 하지만 정작 언제 발굴을 진행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건릉이 역대 황제의 능 가운데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그 발굴은 세기의 사건이 될 것이다.

  온전히 보존된 지하궁전과 달리, 지면에 있던 것들은 이미 세월 속에서 사라지고 훼손되었다. 건릉은 본래 수도 장안성(長安城)의 구조를 그대로 본떠 만들어졌다고 한다. 능의 내성은 정방형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고 성안에는 헌전(獻殿)·편방(偏房)·회랑(回廊)·궐루(闕樓)·사당이 있었다. 『당회요(唐會要)』의 기록에 의하면 덕종 정원(貞元) 14년(798)에 건릉을 보수할 때 건물이 378칸에 달했다고 한다. 이것들의 자취는 일찌감치 사라졌지만 남쪽 주작문(朱雀門) 밖의 중심선을 따라 배치된 대형 석각들은 여전히 건릉을 지키고 있다. 이 석각들 가운데 61개의 석인상이 있다.

 

 

건릉의 61개 석인상

  건릉의 61개 석인상은 61번왕상(蕃王像), 61번신상(蕃臣像)이라고 칭한다. 이 명칭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번왕은 중앙 왕조와 조공·책봉 관계에 있는 제후왕이나 외국의 왕을 가리킨다. 번신은 번국(蕃國)의 신하라는 의미로, 번국은 오랑캐의 나라 변방의 나라를 의미한다. 즉 번왕과 번신에는 변방 오랑캐 나라의 왕, 또는 당나라 변방의 오랑캐 신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번(蕃)’은 오랑캐뿐 아니라 울타리를 뜻하기도 하는데, 울타리를 의미하는 이 용어에는 중화(中華)의 세계와 그 바깥을 구분 짓는 중심(문명)과 주변(야만)의 가치관이 작동한다. 중심에서 권력이 나오고 울타리 너머의 세계는 그 권력에 복종하는 질서의 현시(顯示), 이것이 바로 건릉에 61번신상이 세워진 이유다.

  애초에 각 석인상의 등 부분에는 출신 나라와 관직명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글자가 옅어진 탓에 지금 알아볼 수 있는 건 여섯 명뿐이다. 그나마 다행히 『장안지도(長安志圖)』를 통해 36명의 관직명과 이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61개의 석인상 중에서 둘을 제외하곤 죄다 머리가 없다. 왜일까? 알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일에는 늘 추측과 소문이 무성하게 마련이다. 석인상이 밤마다 요괴로 변해서 민가의 양식을 망쳐 놓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부숴버렸다는 이야기부터 명나라 때(1555년 1월 23일) 이 일대에 일어났던 진도 8이상의 대지진에 관한 이야기까지, 이야기는 난무하지만 의문을 속 시원히 해결해주진 못한다.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인지 기복신앙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경제적 이익을 노린 것인지, 알 순 없지만 석인상의 머리가 잘린 건 분명 인위적 이유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머리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자연적으로 잘릴 순 있어도 발이 달려 다른 곳으로 갈 순 없지 않은가.

 

 

활을 쥔 석인상은 누구?

  61개 석인상 중 동쪽 제일 뒷줄에 홀로 있는 석인상은 여러 면에서 차림새가 독특하다. 다른 석인상과 달리 옷의 소매가 매우 넓고, 세 겹의 옷이 층층으로 드리워져 있다. 왼손에는 활까지 쥐고 있다. 영락없는 한반도 양식이다. 과연 누구일까?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夫餘隆), 고구려왕 고장(高藏, 보장왕), 신라왕 김법민(金法敏, 문무왕), 고구려 대막리지(大莫离支) 연남생(淵男生)이 후보군이다. 누가 주인공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지만 더 이상 추측하긴 어렵다. 고종을 돋보이게 하는 데 누가 가장 적합했을지 생각해보면 해답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건릉보다 먼저 조성된 태종의 소릉(昭陵)에도 주변 나라의 우두머리를 14개 석인상으로 세워두었다. 『장안지도』에 그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 낙랑군왕(樂浪郡王) 김진덕(金眞德)”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2003년에 발굴된, 소릉의 14개 석인상은 거의 다 훼손된 상태였다. 진덕(眞德)여왕으로 추정되는 석인상 역시 하반신만 남은 상태다. 진덕여왕 입장에서는 소릉 앞의 석인상으로 서 있는 게 기꺼웠을까? 14개 석인상 명단에는 티베트를 통일한 토번(吐蕃)의 손챈감포도 있다. 또 토욕혼(吐谷渾)의 마지막 왕 모용낙갈발(慕容諾曷缽)도 이 명단에 들어 있다. 당나라 황제 능 앞의 석인상으로 채택되는 건 본인의 의지와는 정말 무관하다. 원칙은 오직 하나, 당나라와 그 황제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할 것!

  건릉의 61개 석인상은 배열에 있어서 동서의 균형이 맞지 않다. 동쪽에 29개, 서쪽에 32개다. 동쪽에 세 개가 모자란다. 누군가는 주장한다. 그 세 개가 바로 고구려·백제·신라의 우두머리인데, 유실된 것이라고. 물론 중국 측 주장이다. 정말 사라진 세 개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왜 고구려·백제·신라의 석인상이어야 하는지? 제국의 수집욕과 과시욕을 감안하면 대답은 오히려 간단하다. 그래야 구색이 맞추어지니까. 61번신상 가운데 서쪽과 북쪽의 번신상은 넘치는데 동북쪽 번신상은 없으니까. 천하를 장악하고 군림하는 제국의 위상에 동북쪽 번신상이 필요하니까. 활을 쥔 석인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이러한 맥락에서 61번신상의 구성원으로 세워졌으리라.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존재조차 불확실한 세 개의 석인상 후보 역시 넓은 소매 옷에 활을 쥔 한반도의 석인상이라고 예정되는 것이리라.

  건릉에 가면 당나라에 의해 호명된 61번신상의 세트가 아닌, 석인상 하나하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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