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육림의 주인공 주왕과 달기
“옛말에 ‘암탉은 새벽을 알리지 않는 것이니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라고 했소. 지금 상(商)나라 주왕(紂王)은 오직 여자의 말만 듣고서 나라를 어지럽히고 백성에게 포학하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소. 나는 그대들과 함께 하늘의 징벌을 집행할 것이오.”
기원전 1000년 무렵 어느 날 동틀 녘,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상나라 교외의 목야(牧野)에 집결한 제후들과 병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무왕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주왕은 70만 병력을 보내 무왕에 맞서게 했다. 하지만 이 많은 병사들은 도리어 상나라를 공격하며 무왕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버림 받은 폭군 주왕을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그는 녹대(鹿臺)로 올라가 불속에 몸을 던졌다. 상나라 도성으로 들어온 무왕은 주왕이 불타 죽은 곳으로 갔다. 무왕은 주왕의 시신을 향해 화살을 세 발 쏘았다. 그리고 검으로 주왕의 시신을 찌른 뒤 도끼로 그 머리를 베어서 흰 깃발에 매달았다. 무왕은 주왕이 총애하던 여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여자는 이미 목매달아 자살한 뒤다. 무왕은 여자의 시신에도 화살을 세 발 쏘고 검으로 찌른 뒤 도끼로 목을 베어서 작은 흰 깃발에 매달았다. 깃발에 매달린 목의 주인공은 바로 중국 역사에서 망국의 대명사로 통하는 달기(妲己)다.
주왕과 달기, 이들은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술을 가득 채운 연못, 고기를 주렁주렁 매단 나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쫓고 쫒기는 남녀의 무리······. 주왕과 달기는 방탕한 주연을 즐기며 환락을 추구했다. 그들은 잔인함도 즐겼다. 기름이 칠해진 뜨거운 구리기둥 위를 지나가게 하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을 자행하며 죄인의 고통스런 비명 소리에 쾌감을 느꼈다. 주왕의 음란함과 포악함은 날로 심해졌고, 충신들의 간언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충신은 상나라를 떠났다. 죽음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간언한 비간(比干)은 심장이 꺼내져 죽임을 당했다. 백성의 원망은 높아져가고 제후들도 주왕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편 덕을 베풀고 선정을 행하던 서백창(西伯昌, 주나라 문왕)이 제후들의 지지를 얻으며 강성해졌다. 결국 그의 아들 무왕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상나라를 정벌하게 된다.
문왕 때 이르러 주족(周族)은 오늘날 시안(西安)의 서남쪽 풍하(灃河) 유역에 자리를 잡고 힘을 키웠다. 무왕이 즉위한 뒤 풍하의 동쪽 기슭에 수도 호경(鎬京)을 건설했다. 이후 유왕(幽王)에 이르러 견융(犬戎)의 공격으로 서주는 끝이 나고 낙읍洛邑(낙양)에서의 동주 시대가 전개된다.
거짓 봉화로 제후들을 희롱한 유왕과 포사
유왕은 어쩌다가 서주의 마지막 왕이 되었을까? 역사서에 전해지는 유왕의 이야기는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과 꽤 유사하다. 주왕이 달기에게 푹 빠져 지냈듯 유왕 역시 포사(褒姒)에게 완전히 빠져 지냈다. 왕후와 태자를 폐위한 유왕은 포사를 왕후로 삼고 포사가 낳은 아들을 태자로 삼기까지 했다. 유왕은 포사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었지만 도무지 포사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적군이 쳐들어왔음을 알리는 봉화가 피어올랐다. 제후들은 급히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그런데 정작 적군의 침략은 없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을 지켜본 포사는 비로소 활짝 웃었다. 이 모습을 본 유왕은 너무 기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고 만다. 포사를 웃게 하고자 일부러 봉화를 올리도록 한 것이다. 유왕이 거짓 봉화로 제후들을 희롱한 이 일을 두고 ‘봉화희제후(烽火戲諸侯)’라 한다. 유왕이 포사의 웃음과 바꾼 것은 제후들의 신뢰였다.
거짓 봉화가 반복되던 어느 날, 폐위된 왕후의 아버지 신후(申侯)가 견융과 함께 서주를 공격했다. 이번에도 봉화가 피어올랐다. 진짜로 적군이 쳐들어왔지만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는 제후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유왕은 여산(驪山)에서 적에게 죽임을 당하고 포사는 사로잡히고 만다. 제후들은 원래의 태자를 왕으로 옹립했다. 왕위에 오른 평왕(平王)은 동쪽의 낙읍으로 천도한다. 주왕실이 쇠약해지고 제후국이 패권을 다투는 춘추전국(春秋戰國)의 동주 시대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문제는 역사에 작동하는 프레임이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과 서주의 마지막 왕 유왕, 그들은 정말 여자 때문에 나라까지 끝장낸 것일까? 놀랍게도 상나라 이전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 역시 말희(妺喜)라는 여인에게 빠져 지냈다. 걸왕은 주왕과 아주 비슷했다. 무력으로 백성을 해쳤으며 주색에 탐닉했다. 반면 상나라를 세우게 되는 탕왕(湯王)은 덕을 베풀었기에 백성과 제후들이 그를 따랐다. 결국 탕왕은 제후들을 이끌고 하나라를 멸망시킨다. 이때 탕왕이 내세운 명분도 “하늘을 대신해 하나라를 징벌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라의 마지막과 상나라의 마지막은 마치 같은 이야기의 두 버전인 듯하다.
게다가 하·상·서주의 역사에서 마지막 왕과 그 곁에 있던 여인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 말희·달기·포사 모두 바쳐진 여인이었고, 걸왕·주왕·유왕은 여자에게 빠져 황음무도하고 포악무도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다가 결국 망국에 이르렀다. 역사서에서는 하·상·서주가 멸망한 책임을 여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애꿎은 여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일 뿐이다. 망국의 왕이지만 ‘남성’이고 ‘왕’이기에, 망국에 대한 변명의 빌미를 여성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무왕의 경종은 사실 그 당시 프레임의 반영이다. 무왕은 이 프레임을 새 왕조 건설의 동력으로 동원했던 것이다.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프레임은 전통 시대 모든 분야에서 철저히 작동되었다. 말희·달기·포사는 그러한 프레임의 희생양이 아닐까. 게다가 마지막 왕의 여인이었으니, 현실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물론 역사 속에서도 억울한 오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말희·달기·포사가 만약 새 왕조를 세운 왕의 여인이었다면?
결국 우리가 보게 되는 역사란 승자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서술할 권력을 지닌 자의 손에서 이루어진 역사 기록, 당연히 권력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겠는가. 걸왕과 주왕은 정말 그토록 황음무도했을까?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마지막 왕이 포악하게 묘사될수록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이 강화되는 건 자연스런 이치다. 이전 왕조의 마지막 왕을 최대한 악덕하게 묘사하는 반면 새 왕조의 왕은 선하고 덕 있는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천명天命이 새로운 왕조로 옮아갔음을 대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전통 시기의 역사 서술을 지배하던 전형적인 ‘프레임’이다. 앞서 살펴본 이야기에는 두 가지 프레임이 존재한다. 남성 중심 사회의 프레임, 그리고 승자가 정의라는 프레임이다. 남성과 승자가 역사의 주체가 되어 만든 이 프레임에서 여성과 패자는 역사의 타자이자 희생양이 된다. 말희·달기·포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역사로 남겼다면? 걸왕·주왕·유왕이 자신의 이야기를 역사로 남겼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의 역사와는 완전히 다르지 않겠는가. 역사 서술에 권력자의 프레임이 작동하는 게 어찌 과거만의 일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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