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 아시아 절반의 신앙(觀音, 半個亞洲的信仰》이라는 책이 있다. 중국계 미국인 학자 정승일(鄭僧一)의 저서인데, 그 제목처럼 아시아에서의 관음신앙은 단순히 불교도만의 것이 아니라 도교나 유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넓게 퍼져있다.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거나 다라니를 외우는 이유는 끝없이 이 망상에서 저 망상으로 옮겨 다니며 번뇌와 미망에 갇혀있는 상태를 벗어나기 위함이다. 의식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키는 힘을 기르고, 끝내 그 하나의 의지처까지 놓아버리면 마침내 자유의 문이 열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선사들조차 관음신앙을 크게 장려한 경우가 많았으니 간화선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남송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는 유명한 「예관음문(禮觀音文)」을 남겼다.
(중략) 이제 저는 보살님께 구슬피 애원하나니 저에게 가피를 내리소서. 엎드려 생각건대 저 아무개는 숙생의 행운으로 불교를 만났으나 (중략) 오직 복이 얕고 명이 짧아 비록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고는 해도 나고 죽음을 헛되이 할까 두렵습니다.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읍혈하며 절을 올려 정성을 다해 밤낮으로 관음보살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명호를 수지하며 보살상에 예배드리옵니다. 보살께서는 천이(天耳)로써 들으시고 자비의 마음으로 고통의 바다에서 저를 구하소서. 저를 불쌍히 여기어 가피를 내리소서. 큰 신광(神光)을 놓아 저의 몸과 마음을 비추소서. (중략)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해주시고 마장을 녹여주소서. 낮이나 밤이나, 앉거나 눕거나 보살께서 큰 신광을 발하심에 저의 지혜의 본성이 열리게 하소서. (중략) 선(禪)을 참구하고 진리를 배움에 마장이 끼지 않게 하시며 무생인(無生忍)을 깨달아 세세생생 보살도를 실천하게 하소서. (중략)
대혜종고는 제자들이 참선을 게을리 하고 언어문자에만 빠져 이론적, 학문적으로만 불교를 탐구하는 것을 경계하여 스승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이 지은 『벽암록(碧巖錄)』까지 불태웠을 정도로 정통 수행자 중의 수행자였다. 「예관음문」은 그런 그가 인간적이고 다소 감상적인 어구를 동원해서까지 지은 기도문으로 이를 통해 사람들이 매일 아침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그의 「예관음문」은 오늘날까지 중국에서 관세음보살상에 기도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도문이다.
불교의 다른 경전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화엄경』은 세계를 차별 없이 평등한 중중무진한 세계로 본다. 따라서 외도 즉 정도를 걷지 않는 사람들조차 하나로 아우르는 모습을 거듭해서 보여준다. 중생을 교화하는 과정에서 관세음보살의 역할이 상당히 돋보이는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때로는 정통 불교가 아닌 민간신앙의 신이 되어 제물을 받는 역할도 기꺼이 응했던 것 이다. 덕분에 중국에서는 지금까지도 ‘남자는 관음보살을 여자는 미륵불을 패용(男戴觀音女戴佛)’하는 습속이 퍼져있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하고 거친 성향이 있으니 관세음보살의 부드러움을 배우고, 여성은 품성이 따뜻하지만 편협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많으니 넓은 포용력을 갖추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습속이 전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대륙과 달리 대만에서는 여성이 관세음보살을, 남성이 미륵불을 패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아무튼 중국인의 이러한 습속은 양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나온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비판적 관점에서 나아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지키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덕분에 20세기 초반까지 대부분의 중국인 가정에는 조상의 위패, 재신과 더불어 관세음보살상을 빠지지 않고 봉안했다고 한다. 또한 이즈음 북경의 사원에 대해 조사한 각종 기록들을 살펴보면 관우묘에 이어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종교 공간이 두 번째로 많았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담겨있다.
현대 중국의 저명한 문인이자 중국의 마지막 선비로 일컬어지는 왕증기(汪曾祺, 1920~1997)는 자신의 산문수필집 『성남객화(城南客話)』의 「대련저저(大蓮姐姐)」에서 유년기 보모였던 ‘연꽃(大蓮) 누나’에 대한 추억을 회상한다. 연꽃 누나는 본래 왕증기의 어머니가 시집오기 전 친정집에서 허드레 일을 하던 하인으로, 어렸을 때 몸이 약하고 까탈스럽던 저자를 정성껏 돌봐주었다고 한다.
너그럽게 자신을 보살펴주던 연꽃 누나는 저자가 학교에 들어간 뒤 자신의 집을 나와 물가 ‘백의암(白衣庵)’이라는 암자에 살았다. 여기서 ‘백의’는 ‘백의관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당시 백의암에 여러 명의 도파자(道婆子), 즉 반승반속의 삶을 살며 암자의 일을 돕는 여성들이 살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종교 활동이다. 저자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그 여자들은 매번 어떤 묘우(廟宇)에서 행사가 있으면 무작정 가서 ‘눌러앉아 독송’하는데 한번 앉으면 하루 종일 그렇게 한다. 어떤 신을 모시는 묘우이건 개의하지 않고 묘우라고 하면 무조건 가서 눌러 앉는다. 동악묘(東嶽廟)나 성황묘(城隍廟)는 본래 다 도교 사원이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하면 곧 ‘나무아미타불’을 읊조렸다. 수업을 파하고 집으로 향할 때면 지나는 길에 백의암이 있었다. ‘연꽃 누나’는 내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종종 나를 백의암으로 불러 놀게 하였다. 하지만 백의암 안에는 놀만한 것이 정말 없었다. 이곳은 작은 암자였는데 전각 안에는 백의관음상이 있었고 관음전 동서로 각각 조그마한 집이 한 채씩 있었다. ‘연꽃 누나’는 동쪽에 살았고 서쪽에는 역시 ‘연꽃 누나’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기른 채 수행하는’ 여승들이 살고 있었다. 훗날 그녀는 또 동선사(同善社), 이교근계어주회(理教勸戒菸酒會) 사람들과 함께하기도 했다. 우리가 살던 곳에 일관도(一貫道)가 들어오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있었다면 그녀는 필시 일관도에도 가입했을 것이다. 그녀는 무엇이나 다 믿었다.
우리는 그녀가 그리는 관음보살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관음보살이 불교는 물론 도교와 유교의 인물조차 가리지 않고 포용하며 결국에는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으리라 확신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 문화권의 관음전을 방문하면 교배(筊杯)를 던지고 점대를 뽑아 점사를 읽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는 『주역』이나 각종 도가류의 점치는 법을 모방하여 중국화 된 관음신앙 형태의 한 예이다. 요즘은 인터넷으로도 할 수 있도록 온라인 서비스를 마련해 둔 곳도 종종 있다. 호기심에 이끌려 점사를 뽑아보니 겉으로는 길흉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기 내면의 탐진치(貪瞋痴)를 관찰하고 중도를 향하라는 조언이 숨어 있다.
<참고문헌>
汪曾祺(2018). 《城南客話》, 九州出版社.
習五一(2006). 近代北京寺廟的類型結構解析. 世界宗教研究 2006년 1기.
李利安(2003). 古代印度觀音信仰的演變及其向中國的傳播, 西北大學 박사논문.
何昭旭(2013). 民國時期的觀音信仰硏究. 山東師範大學 석사논문.
https://www.zgjm.org/chouqian/guany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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