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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문화의 이모저모 14] 화번공주가 된 문성공주와 영국공주

 

[사진1] 문성공주 상 (출처: 광인사 홈페이지)

 

 

녹색 타라의 화신이 된 문성공주

  티베트 조캉사원(大昭寺)에는 석가모니 12세 등신상이 모셔져 있다. 641년에 당나라 문성(文成)공주가 토번(吐蕃)의 왕 손챈감포에게 시집가면서 가져갔던 불상이다. 이 등신상은 본래 장안(長安)의 황가 사원인 개원사(開元寺)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손챈감포가 황금으로 만들어진 녹도모(綠度母) 상을 혼인 예물로 바치자 당 태종이 그에 대한 화답으로 석가모니 12세 등신상을 혼수로 보낸 것이다. 이때 태종은 등신상의 연화보좌만큼은 개원사에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태종이 비어 있는 연화보좌를 보며 어떤 불상을 모셔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에 녹도모 보살이 현신하여 “내가 이곳의 중생을 제도할 테니 다른 불상을 모실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도모(度母)는 티베트어로 ‘돌마’라고 하는, 고통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어머니 ‘타라’다. 녹도모는 바로 ‘녹색 타라’다.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관음보살, 이 관음보살이 고해에 빠진 중생을 보며 오른쪽 눈으로 흘린 눈물이 녹색 타라가 되고 왼쪽 눈으로 흘린 눈물이 흰색 타라가 되었다고 한다. 녹색 타라와 흰색 타라는 관음보살을 도와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이다. 티베트에서는 문성공주를 녹색 타라의 화신으로 여기고, 브리쿠티(손챈감포에게 시집간 네팔 공주)를 백색 타라의 화신으로 여긴다.

  개원사의 연화보좌는 지금 시안(西安)의 광인사(廣仁寺)에 있는데, 조캉사원에 있는 석가모니 12세 등신상과 같은 형태의 불상을 그 위에 모셔 놓았다. 광인사는 산시성(陝西省) 유일의 티베트 불교 겔룩파 사원이다. 1705년 청나라 강희제의 명으로 광인사가 세워지면서 개원사의 녹도모상 역시 광인사로 옮겨오게 된다. 광인사의 대웅보전 중앙에 바로 녹도모 상이 모셔져 있다. 물론 광인사에서 문성공주의 상도 찾아볼 수 있다.

 

 

순장당할 뻔한 영국공주

  문성공주는 중국의 역대 왕조가 정략적으로 이민족에게 보낸 수많은 화번(和蕃)공주 가운데 한 명이었다. 문성공주가 화번공주가 되어 토번으로 시집간 지 백여 년 뒤, 회흘(回紇, 위구르의 전신)의 비가궐가한(毗伽闕可汗)에게 시집간 여인이 있다. 숙종(肅宗)의 친딸인 영국(寧國)공주다. 영국공주는 이번이 세 번째 혼인이었다. 처음엔 정손(鄭巽)에게 시집갔는데 사별했다. 그리고 설강형(薛康衡)에게 재가했는데 또 사별하고 만다. 남편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뜨지만 않았더라도 이역만리 먼 곳으로 다시 시집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758년 7월 17일 영국공주가 떠나던 날, 아버지도 딸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나라의 일이 중요하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영국공주가 울면서 떠나며 남긴 말이다. 영국공주가 오자 회흘의 추장들은 ‘진짜’ 공주가 왔다고 기뻐하며 당나라에서 보내온 혼수품을 나눠 가졌다. 회흘에서는 영국공주를 빌미로 한몫 챙기기에 바빴던 듯하다.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에 따르면, 회흘에서는 그해 8월·9월·12월에 당나라로 사람을 보냈고 그때마다 숙종은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후한 물품을 하사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긴다. 영국공주가 시집간 이듬해 4월에 비가궐가한이 사망한 것이다. 나이도 많고 쇠약하긴 했어도 너무 급작스런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회흘의 가혹한 풍속이 영국공주를 압박했다. 바로 ‘순장’이었다. 자신을 순장시키려는 이들에게 영국공주는 이렇게 따졌다.

 

“우리 중국의 법은 남편이 죽으면 상복을 입고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면서 삼년상을 치르면 된다. 지금 회흘이 아내를 맞았으니 반드시 중국의 예법을 따라야 한다. 만약 지금 이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한다면 구태여 만리에서 결혼하러 왔겠느냐?”

 

  다행히 순장은 면한 영국공주, 하지만 회흘의 법에 따라 자신의 얼굴을 칼로 그으면서 크게 울어야 했다. 759년 8월, 영국공주는 당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숙종은 문무백관에게 대명궁 정문 밖에서 그녀를 맞이하게 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영국공주에게 아버지로서의 최선을 다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국공주가 돌아온 뒤에도 회흘에 대한 당나라의 물품 세례는 그치지 않았다. 회흘에서는 760년 9월에 두 차례, 그리고 11월에도 사신을 보내와 숙종을 알현하고 물품을 하사받았다. 영국공주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당나라로 돌아왔다(『구당서』)고 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나라 때 흉노로 잡혀갔던 채염(蔡琰)을 데려오기 위해서 조조(曹操)가 흉노에 막대한 금품을 제공했듯이 숙종도 영국공주를 데려오기 위해 그러했으리라.

 

 

나라를 평안히 하라!

  “나라의 일이 중요하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영국공주가 이렇게 말하며 시집가야 했던 ‘중요한 나라의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물론 회흘과의 화친이다. 이는 안사(安史)의 난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황제 현종(玄宗)은 도피하면서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준다. 최악의 상황에서 황제가 된 숙종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회흘에 원병을 요청했다. 회흘은 이를 빌미로 기세등등하게 많은 것을 당나라에 요구했다. 영국공주를 회흘에 화번공주로 보내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안사의 난이 종식된 이후에도 회흘은 지속적으로 당나라에 혼인을 통한 화친을 요구했고 당나라는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당나라는 매년 수만 필의 비단을 회흘에 주어야 했고, 견마(絹馬)무역에서 부당한 거래를 강요받았다.

  당나라로 돌아온 이후 영국공주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역사가의 관심사는 “나라의 일이 중요하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기꺼이 고국을 떠났던 영국공주이지, 고국으로 돌아와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던 영국공주가 아니었기에. 영국(寧國), 나라를 평안히 하라는 무거운 짐은 억지로 그녀에게 지워졌던 것이다. 세 번의 혼인, 그것도 한 번은 이민족과의 혼인이었고, 게다가 얼굴은 온통 칼자국인 그녀의 귀국 후의 삶이 어떠했으랴. 황제의 딸이니 호의호식이야 했겠지만 행복하기는 어려웠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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