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시대 “식인” 언설과 루쉰의 「광인일기」(6)
(明治時代“食人”言說與魯迅的「狂人日記」, 2011)
리둥무(李冬木)
7. 루쉰과 『국민성십론』
하가 야이치는 저명한 학자로 1892년 7월 12일부터 1941년 1월 10일까지 『아사히 신문』에서 관련 보도와 소개 및 광고 등은 모두 337 차례 등장한다. 『요미우리 신문』에서는 1898년 12월 3일부터 1937년 4월 22일까지 연관 횟수 역시 186차례에 달한다. “문학박사 하가 야이치의 신작 『국민성십론』”은 “청년 필독서이자 국민 필독서”로 당시 명실상부한 베스트셀러라 부를 법하며 1907년 말 초판부터 1911년에 이르기까지 겨우 4년이라는 시간 동안 8차례 재판이 나왔다. 신문 광고는 더욱 빈번하게 출현했고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심지어 이 책의 출판과 관련된 “흥미진진한 일화”도 있어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겉치레가 없는 하가 야이치 선생이 양복 한 벌 맞추려고 하는데 돈이 모자라자 양복점 주인이 『국민성십론』 원고료를 저당으로 잡아줬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성십론』이 주씨 형제의 주의를 끌었던 것은 지극히 정상이라 하겠다. 『저우쭤런 일기』(周作人日記)에 따르면 『국민성십론』은 1912년 10월 5일에 구입했다. 필자가 다른 논문에서 이미 다룬 적이 있듯이 1923년 주씨 형제의 사이가 틀어지기 전까지, 주씨 형제가 읽고 사고 소장한 서적들은 그들이 서로 알게 모르게 “눈여겨 본 서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형제가 책 한 권을 공용하거나 서로 돌려보는 일도 지극히 정상이다. 『국민성십론』이 주씨 형제에게 남긴 영향은 매우 크다. 루쉰이 말했듯이, “소설을 읽고 민족성을 안다는 것은 매우 좋은 주제이다.” 만약 여기서 “소설”을 “일반 문학”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국민성십론』이 제공하는 것은 곧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범적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책에서 하가 야이치는 “국문학” 학자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문헌학” 학자로서의 공력도 발휘하여 논증으로 사용된 사례만도 수백 개에 달하여 일본 신화전설, 와카(和歌), 하이쿠(排句), 교겐(狂言), 모노가타리(物語)를 비롯하여 일본 언어까지 아울렀다. 사기, 불경, 선어(禪語), 필기 등으로 보완하여 이로써 전개한 것이 바로 “문화사적 관점에서 전개한 미증유의 건실한 국민성론”이었다. 이 점이 바로 주씨 형제에게 공통으로 끼친 영향이라 하겠다.
특히 저우쭤런에게 있어 사실상 이 책은 일본문학사, 문화사, 민속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입문서라 할 수 있어, 이후 그가 일본문학연구와 논술, 번역을 작업하는 데 있어서도 이 책이 “방향을 잡아 준” 흔적이 많이 보인다. 저우쭤런이 여러 문장 속에서 하가 야이치를 인용하거나 언급하여, 예를 들어 「일본의 시가」(日本的詩歌), 「유일본잡감」(遊日本雜感), 「일본관규」(日本管窺), 「원원창화집」(元元唱和集), 「일본광언선⋅후기」(日本狂言選⋅後記) 등이 그렇다. 그리고 하가 유이치의 저작을 계속해서 사들여 1912년 『국민성십론』 이후에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신식사전』(新式辭典, 1922년 구입), 『국문학사십강』(國文學史十講, 1923), 『일본취미십종』(日本趣味十種, 1925), 『요곡오십번』(謠曲五十番, 1926), 『광언오십번』(狂言五十番, 1926), 『월설화』(月雪花, 1933)가 있다. 정리하자면 “문학”와 “국민성”이라는 대전제 아래 저우쭤런이 일본문학과 문화 연구 방면에서 주로 영향을 받았고, 비교하자면 루쉰은 주로 “국민성” 방면에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루쉰은 하가 유이치의 일본 국민성의 해석과 중국 국민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특히 중국 역사상 “식인” 사실에 대해 그가 주의를 기울인 바로부터 주로 영향을 받았다.
루쉰의 텍스트에 “하가 유이치”에 관한 기록이 없어 이 점에 있어서는 저우쭤런의 “세부 목록”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언급하지 않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읽지 않았고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루쉰의 서목” 가운데 그가 잠깐 언급했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도 아주 깊은 영향을 받은 예는 적지 않다. 하가 유이치의 『국민성십론』도 이에 해당하여 문제가 “식인” 사실의 고지에 관해 집중되어 있을 따름이다.
「광인일기」 발표 후 루쉰은 1918년 8월 20일 쉬서우상(許壽裳, 1883-1948)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연히 『통감』을 읽고 중국인이 일찍이 식인 민족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 작품을 적게 되었네. 이와 같은 발견은 관련이 아주 깊지만 아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오.” 말하자면 비록 역사서에선 “식인” 사실이 많이 기재되어 있지만 「광인일기」 발표 당시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중국인이 예전에 식인 민족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는 것이다. 루쉰은 “아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은” 가운데 “아는 사람”이었고, 쉬서우상에게 말하길 자기는 “우연히 『통감』을 읽고” 나서 “깨달았다” 한다. 이 말에 따르자면 『자치통감』이 “식인” 사실에 대해 알려주어 「광인일기」에서 “식인” 이미지가 생겨난 직접적 계기가 되어 작품의 주제가 생성되는 데 관건이 되는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루쉰이 읽은 것이 어떤 종류의 『자치통감』 판본인지는 후속 연구를 기다린다. 현재 확인하기로는 루쉰의 동시대 혹은 조금 이른 시기에 중국과 일본에서 발간된 몇 가지 서로 다른 판본의 『자치통감』이 있었다. 그런데 루쉰의 장서 목록에는 『자치통감』이 보이지 않는다. 『루쉰전집』에서 언급한 “『자치통감』”은 모두 서명일 따름으로 그 가운데 구체적으로 “식인”의 기록을 언급한 적은 없다. 그래서 루쉰의 텍스트에만 의존한다면 도대체 “우연히 읽은” 것이 어떤 “식인” 사례를 말하며 그가 “깨닫게” 만든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루쉰의 일기 중에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를 빌려 읽고(1914년 8월 29일, 9월 12일) 구입했다(1926년 11월 10일)는 기록이 있고, 루쉰 역시 30권짜리를 소장한 것이 확인되지만,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과 『고적서발집』(古籍序跋集)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그 가운데 재료로 쓰였을 따름이지 “식인” 사실과는 본래 아무 관련이 없다.
이런 까닭에 루쉰이 정말로 『자치통감』 원문을 직접 “우연히 읽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다음과 같은 추정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니, 바로 루쉰이 당시 “우연히 읽은” 것이 『국민성십론』에서 언급한 네 가지 사례이지 『자치통감』은 아니라는 것으로, 그게 아니라면 『국민성십론』에 담긴 “『자치통감』”으로부터 더 나아가 『자치통감』 원본을 읽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그가 실제로 『자치통감』을 읽었다는 증거는 루쉰의 저작 가운데 찾을 수 없다.
그 외에 하가 유이치가 인용한 여덟 가지 사례의 다른 문헌인 도종의의 『철경록』은 루쉰의 글에서 두 번 언급되었지만 모두 문학 사료로 쓰였을 뿐이지 “식인” 사료로 인용된 것이 아니었다. “일본 호리구치(堀口) 대학의 『필립 단편집』(腓立普短篇集)에” 번역된 찰스 루이스 필립(Charles-Louis Philippe, 1874-1909)의 『식인종 이야기』(食人人種的話)와 “신마소설”(神魔小說) 문학 작품 자료를 위한 “식인”의 사례 외에 루쉰이 글에서 든 “식인”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는 『초파자』(抄靶子) 안에서 언급한 다음의 “양각양”이 유일하다. “황소가 난을 일으켜 사람을 양식으로 하였지만 그가 식인을 했다는 것은 틀린 말로 그가 먹은 물건이 바로 ”양각양“이라 불렸다는 것이다.” 1981년판 『루쉰전집』의 주석은 이에 대해 교정을 보아 이는 황소의 사례가 아니라며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루쉰이 인용한 이 말은 남송 장계유(莊季裕, 1079-?)의 『계륵편』(雞肋編)에서 나왔다.” 이 교정과 지목한 원문 출처는 모두 정확하지만 보충할 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원말명초에 도종의가 『철경록』에서 『계륵편』의 이와 같은 사례를 베껴 적었고 그래서 하가 유이치도 『철경록』을 읽을 때 발견하고 인용했으니 바로 앞에서 본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송나라 금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도적, 관병, 주민이 서로 잡아먹었으니, 당시 은어 가운데 노쇠한 남자는 ‘요파화’, 부녀자와 아이는 ‘불미갱’, 어린아이는 ‘화골란’이라 칭하여, 보통은 ‘양각양’이라 불렀으니, 사람을 심히 놀라게 하는 지경이라 하겠다.”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루쉰이 “양각양”에 대해 가진 희미한 기억은 『계륵편』이나 『철경록』으로부터 직접 인용했다고는 볼 수 없고 하가 야이치의 저작으로부터 비롯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李冬木 著, 『魯迅精神史探源: 個人⋅狂人⋅國民性』, 臺北: 秀威資訊科技, 2019, 166-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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