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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의 관세음보살 이야기 4] 『제중감로(濟衆甘露)』에 나타난 명·청대 민간신앙 의례의 흔적

 

  19세기 말-20세기 초, 그 격동의 시기에도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들은 관세음보살 신앙에 의지하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승려들은 조선 말기로 갈수록 사회적으로 천대 받았기 때문에 전처럼 대사회적 역량을 활발히 펼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승려가 아닌 세속의 재가불자 가운데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공동체, 즉 결사(結社)를 이끄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세속인의 신분으로 직접 법문을 하고 불교 의례를 주관하고 불교 서적을 출판하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했다. 당시 이러한 단체로는 경기도 파주 보광사(普光寺)의 정원사(淨源社) 결사(結社)와 삼각산(三角山) 감로암과 삼성암을 중심으로 한 묘련사(妙蓮社), 감로사(甘露社) 결사 공동체 등이 있었다. 이들은 경제활동을 하는 사회인으로서 주로 중인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양반들과 달리 유교 이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을 뿐만 아니라,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었으며, 사회 동향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준비된 승려가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중인 출신들이 종교지도자로 활동하길 요청하는 시대적 요구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신자의 단계에서 나아가 자연스럽게 종교지도자의 역할까지 맡게 된 것이었다.

  『관세음보살묘응시현제중감로(觀世音菩薩妙應示現濟衆甘露)』(이하 『제중감로』)는 관세음보살을 믿는 묘련사 결사 회원들이 법회에서 한 법문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그들은 1872년 겨울부터 1875년 여름까지 4년간, 서울 근교 7곳의 장소에서 11번의 법회를 열었는데, 법회에서 법문을 한 보월 거사 정관의 법문 내용을 기록하여 책으로 엮었다. 제목을 보면 이 법회가 관세음보살 신앙을 위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대략 관세음보살이 신묘한 응답을 통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감로의 말씀을 드러내 주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보월 거사가 한 법문은 보월 거사의 법문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이 보월 거사의 입을 빌어 한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동안 중국과 한국에서 개인이 정성껏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여 영험을 얻었다는 영험담은 많았으나, 『제중감로』처럼 어떤 특정의 법사가 설한 법문을 관세음보살이 법사에게 강령(降靈)하여 내린 법문으로 보고 불경으로 간주하여 간행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이러한 형태의 관세음보살신앙과 관세음보살 불경이 출현하게 된 것일까?

  조선 시대에 들어와 숭유억불 정책이 추진되면서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와의 교류가 단절되었다. 이에 조선 시대의 불교는 고려의 불교전통을 중심으로 내부 동력에만 의지하여 근근히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를 거치면서 관우신앙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민간신앙이 한국에 전해지게 되었고, 이에 따른 중국 민간신앙의 의례도 자연스럽게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들 의례 가운데 두드러진 것 중 하나가 바로 난단(鸞壇) 도교 의례이다.

  난단(鸞壇)의 ‘난(鸞)’은 난새, 즉 신령이 하늘에서 강림할 때 타고 내려오는 새라는 뜻에서 유래하는데, 결국 신령이 내려와 계시를 내리는 신성한 도구를 뜻한다. ‘鸞’은 ‘T’자 즉 하늘을 나는 새 모양의 막대기 아랫부분에 붓의 역할을 하는 뾰족한 가지를 박아 만들었다. 이 의례는 매우 신비스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의례를 주도하는 사람은 신령과 교통하는 사람이다. 사각형의 큰 쟁반에 가는 모래를 담아 평평하게 펴 놓고, 의례 주도자가 접신의 상태에 이르면 접신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신령의 의지에 따라 신령이 지시하는 대로 모래 위에 ‘난(鸞)’을 들어 글자를 썼다. 이처럼 접신한 상태에서 글자를 쓰는 것을 ‘가란(駕鸞)’, 즉 ‘난새를 부리다’ 혹은 ‘난새를 몰다’라고 일컬었다. 이렇게 가란(駕鸞)를 하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수가 재빨리 종이에 그 글자들을 베껴 적는다. 그리고 이들 옆에 있는 또 다른 조력자가 작은 써레를 이용해 모래를 다시 평평하게 손질하고, 접신한 사람이 이어서 글자를 적는 방식이다. 이것을 ‘부계(扶乩, 점을 침)’라고 일컬었다.

 

[사진1] 1948년 북경의 모 신앙단체의 부계(扶乩) 장면, W.A.Grootaers. 「1948年於北京擧行的一次秘密宗敎扶乩」 『民間宗敎第二輯』 東南亞華人宗敎專集 (1996)

 

  이러한 방식은 명나라와 청나라 때는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는 20세기 중기까지 중국 여러 민간신앙에서 공통적으로 이용되던 보편적인 방법이다. 중국의 민간신앙에서 관세음보살은 매우 중요한 신 중 하나이다. 20세기 초 중국 명·청대의 대표적 민간신앙 단체들은 불교의 보살 특히 관세음보살을 중요한 신 중 하나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공자와 노자와 같은 불교 유입 전의 사상가들도 신으로 모셨고, 서양 종교의 신도 이들 신앙에서 숭배하는 신 중 하나로 간주하고 신상을 만들어 함께 모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오늘날 홍콩 등 해외 화교들의 민간신앙 공간에서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제중감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가운데에는 한양의 관왕묘에서 일하던 사람도 있었는데, 그는 고종의 명을 받아 중국 현지에 가서 직접 민간신앙 의례를 참관하기도 했다. 즉 이들은 관음신앙을 믿었던 불교도인 동시에 한양의 도교 난단(鸞壇)인 무상단(無相壇) 구성원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제중감로』의 서문을 보면, 4년간 7곳에서 11회에 걸쳐 법회를 열고, 3년 뒤인 1877년 교정하여 이 경전을 간행하려 할 때 부우제군(孚佑帝君) 순양자가 무상단에 내려와 이 경전의 서문을 썼다고 언급하고 있다.

 

[사진2] 부우제군 순양자가 무상단 난단에서 서문을 내렸다는 『제중감로』의 기록, 국립중앙도서관

 

  부우제군은 바로 도사 순양자(純陽子) 여동빈(呂洞賓, 796~?), 즉 여조(呂祖)를 말한다. 명나라 중엽 이래 도사 여조겸은 도교의 중요한 신으로 부상했다. 이후 많은 도교 경전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도교 경전들은 비란강시(飛鸞降示), 즉 난새가 날아 강령하여 뜻을 드러낸 것을 받아 적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비란강시는 바로 위에서 말한 모래 위에 적힌 글자들을 경건히 받아 적었다는 뜻이다. 이 같은 점들을 고려하면, 『제중감로』는 그 제목과 서문에서 중국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젠 중국에서도 이러한 의례가 점차 자취를 감추어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한국에서도 조선 말기에 잠시 유행하다 그쳤지만, 종교 의례라는 것은 이웃 지역이나 이웃 종교의 영향에 의해 부단히 변화한다는 것을 새삼 일깨우는 사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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