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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문화의 이모저모 16] 당나라 고위층의 여름나기

 

[사진1] 함량전(출처: 다큐멘터리 <대명궁>)

 

 

워터스크린에 선풍기 바람까지

  당 고종 용삭(龍朔) 2년(662) 음력 유월 초하룻날, 측천무후의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이날은 24절기 중 하지였다. 훗날 예종이 되는 이단(李旦)이 태어난 장소는 대명궁(大明宫)의 함량전(含凉殿)이다. 함량전은 말 그대로 ‘서늘함을 품은 궁전’이다. 대명궁에서 가장 적합한 피서처가 바로 함령전이었다. 북쪽에 태액지(太液池)라는 호수를 중심으로 황실 원림이 조성되어 있던 터였다.

  함령전보다 한층 뛰어난 피서처가 『당어림(唐語林)』에 전하는데, 현종 때의 ‘양전(凉殿)’이다. 어느 무더운 날, 습유 진지절(陳知節)이 현종을 알현하러 양전에 들렀다. 양전에는 사방에서 물줄기가 커튼처럼 흘러내리는데, 그 물방울이 풍구가 만들어 내는 바람에 날려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워터스크린에 선풍기 바람이 일고 있는 격이니 일종의 에어컨이다. 현종은 진지절에게 ‘빙설마절음(氷屑麻節飮)’이라는 특별한 음료까지 하사했다. 얼음가루에 마가 들어간 것이니, 마빙수라고나 할까.

  양전에 적용된 기술은 동로마 제국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구당서(舊唐書)』 「서융열전(西戎列傳)」에서 불름국(拂菻國)이라고 칭한 동로마 제국의 냉방 장치는 양전과 너무 비슷하다.

 

무더운 계절이 되면 (불름국) 사람들은 강한 열을 싫어해서 물을 끌어와 잠류(潛流)하게 해 그 물이 위로 지붕까지 두루 미치도록 한다. 시스템이 정교해서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한다. 보는 사람들은 그저 지붕 위에서 샘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처마 사방에서 물방울이 날리는데, 폭포처럼 물이 쏟아지면서 충돌해 생긴 기운이 서늘한 바람을 만드니 그 교묘함이 이와 같다.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문화교류의 흔적을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한여름에 비단 솜저고리

  현종 때 고관대작의 여름날 사치는 유명하다. 양귀비의 4촌(혹은 6촌) 오빠 양국충(楊國忠)의 자제는 복날이 되면 장인(匠人)을 시켜 얼음을 산 모양으로 깎아 연회석에 두었다. 손님들은 술에 취했음에도 한기를 느꼈다고 한다.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 따르면 비단 솜저고리를 미리 챙겨온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양국충 집안에서는 여름날이면 으레 있었던 일인 듯하다. 또 어사중승 왕홍(王鉷)의 저택에는 ‘자우정자(自雨亭子)’가 있었는데, 『당어림』에 따르면 정자의 처마에서 물이 사방으로 흘러내려 여름에 그 안에 있으면 가을날처럼 서늘했다고 한다. 현종의 양전이 대형 에어컨이라면 왕홍의 자우정자는 소형 에어컨이라 할까.

  무종 때의 재상 이덕유(李德裕)에게도 신기한 피서용품이 있었다. 이덕유는 조정 관리들을 연회에 자주 초대했는데, 더워서 부채질을 해대는 푹푹 찌는 무더운 여름 한낮에 그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가 술을 마시다 보면 어느새 더위가 싹 가시고 가을날처럼 서늘함마저 느껴졌다고 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누군가 묻자 이덕유는 ‘백룡피(白龍皮)’ 덕분이라고 말해준다. 황금대야에 물을 가득 채워 백룡피를 담갔다가 꺼내서 자리에 깔아놓았다는 것이다. 일종의 쿨매트였던 셈인데, 『극담록(劇談錄)』에 따르면 이덕유가 ‘신라승’한테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바닷가에 살던 어떤 이가 취득한 건데, 그것이 보물임을 알아챈 신라승이 기이한 물건을 좋아하는 이덕유에게 주기 위해서 사들인 것이다. 백룡피는 아마도 어류의 가죽이었을 것이다.

  의종의 딸 동창(同昌)공주의 징수백(澄水帛) 역시 일반인은 꿈꿀 수 없는 피서 도구였다. 딸에 대한 의종의 부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궁중의 보물이란 보물을 죄다 혼수품으로 보내고 엄청난 지참금까지 주었다고 한다. 『두양잡편(杜陽雜編)』에는 의종이 마련해준 온갖 진귀한 혼수품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징수백’이다. 무더위가 닥치면 동창공주는 징수백을 꺼내오게 해서 물에 적신 뒤에 남쪽 창문에다 걸어두었다. 그 효과가 얼마나 탁월했던지 솜옷을 입고 싶을 정도였다고 한다. 징수백은 길이가 팔구 척 정도로, 거의 투명할 정도로 얇은 비단이다. 여기에 용연(龍涎)을 특수처리해서 무더운 열기를 없앨 수 있었다고 한다. 향유고래의 장에서 생성되는 용연향에 그런 냉방 기능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징수백을 창문에 걸어 두면 바람에 은은한 향이 흘러나오고 얇은 비단을 적신 물이 증발하면서 주변이 시원해졌을 것이다.

 

 

피서의 정치학

  이상에서 살펴본 피서 도구는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부와 권세를 지닌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뜨거운 햇살은 모든 곳을 공평하게 내리쬐지만 인간이 그 햇살을 피하는 데 있어서 공평함이란 요소는 사라진다. 게다가 여름날 황제와 고관대작이 누린 호사는 죄다 백성들의 고혈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그들은 공모자다. 현종과 당시 어사중승 왕홍이 대표적인 예다. 현종은 갈수록 사치를 더해가면서도 황실 창고가 축나는 건 결코 원치 않았다. 이런 마음을 알고 있던 왕홍은 현종이 마음껏 사치를 누리도록 아주 교묘하게 백성의 고혈을 짜냈다. 재정담당 관료였던 그는 죽은 이의 세금까지 거둬들였다. 변방을 지키다 사망한 병사들의 현황이 고의로 누락되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변방 장수들이 전사자 수를 되도록이면 감추고자 했기 때문에 죽어서도 호적에 그대로 남은 채 세금 납부 대상자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들은 도망자로 간주되어 가족이 그 세금을 물어야 했다. 심지어 30년치를 징수당한 경우도 있었지만 백성들은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이렇게 거둬들인 돈이 현종과 왕홍의 배를 불렸다. 왕홍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결국 동생의 모반죄에 연루되어 죽음을 명받는다. 이때 그의 재산도 몰수되는데, 얼마나 축재를 했던지 며칠이 지나도록 재산 현황을 다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왕홍의 저택에 있던 ‘자우정자’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백성의 핏방울 땀방울 눈물방울과 맞바꾼 것이었다.

  딸에게 지극한 부정을 보였던 의종은 또 어떤가. 동창공주는 시집간 지 불과 두 해가 지났을 때 병사하고 마는데, 의종은 온갖 보물을 묻어주고 유모까지 같이 묻었다. 억울한 죽음은 또 있었다. 동창공주의 병을 고치지 못한 죄로 스무 명이 넘는 의원이 죽임을 당했다. 그들의 가족 300여 명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신당서(新唐書)』의 평가처럼 의종은 ‘우매(昏庸)’했다. 조정의 날인조차 거치지 않은 매관매직이 성행했다고 전한다. 동창공주의 혼례와 장례를 치를 때 들인 막대한 비용의 출처가 그런 검은돈이었으리라. 딸이 죽은 지 삼 년 뒤 의종도 병사했다. 그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아들 희종 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 끔찍이 아꼈던 동창공주의 무덤이 도굴되고 유골마저 온전히 남지 못했던 것이다. 그 많은 부장품이 오히려 딸의 안식을 방해한 셈이다. 명나라 구준(丘濬)은 의종의 그릇된 부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의종은 딸 하나 때문에 스무 명이 넘는 의원을 죽이고 그 친족 300여 명을 잡아 가뒀다. 자기 딸의 죽음을 가슴 아파할 줄만 알았지, 다른 사람의 죽음은 그렇지 않단 말인가? 그 스무 명에게도 부모와 자식이 있다. 내가 내 딸을 사랑하듯 저들의 부모 자식 역시 자신의 부모와 자식을 사랑한다. 사람에게 귀천이 있더라도 애통한 정은 매한가지다.”(『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사람이라면 애통한 정도 매한가지고, 더위를 느끼는 것도 매한가지일 터. 너와 내가 느끼는 온도차를 줄여나갈 때 우리는 우매함에서 깨어 있음으로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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