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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문화의 이모저모 4] 흉조 중의 흉조인 천문현상, 형혹수심

 

[사진1] 한나라 성제의 연릉

 

 

형혹이 심수에서 머물다

  ‘형혹수심(熒惑守心)’이라는 천문현상이 있다. 형혹(화성)이 이동하다가 심수(心宿, 전갈자리)에서 머무는 것으로, 고대로부터 흉조 중의 흉조로 여겨졌다. 화성과 전갈자리 모두 붉은 빛이니 공포심을 더욱 자아냈을 것이다. 게다가 화성은 동서를 막론하고 전쟁과 죽음을 상징했다. 또한 심수를 구성하는 심전성(心前星), 심중성(心中星), 심후성(心後星)은 중국에서 태자·천자·서자를 상징했다. 때문에 형혹이 심수에 머무는 것은 천자에게 변고가 생길 징조였다. 천자가 그 자리를 잃거나 죽음을 맞게 될 아주 불길한 징조.

  수화(綬和) 2년(기원전 7) 봄, 형혹이 심수에서 머물렀다. 이 불길한 징조에 한(漢)나라 성제(成帝)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즉시 승상 적방진(翟方進)을 불러들였다. 승상이 제 역할을 못했기에 천상에 이변이 생긴 것이라며 호되게 질책했다. 성제는 승상을 희생양으로 삼고자 작정했다. 적방진은 자신에게 닥칠 불행을 예감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성제는 적방진에게 나라를 걱정해주길 바란다는 조서와 함께 술과 소고기를 보내왔다. 죽음을 내린다는 의미였다. 적방진은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성제는 그가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다고 공포한 뒤 몸소 조문하러 갔다. 승상에게 재앙을 전가했으니 자신은 무탈하리라 안도하면서.

 

 

진시황 때의 형혹수심

  성제 때의 사건이 있기 200년 전 즈음에도 똑같은 천문현상이 일어났다. 진시황 때(기원전 211)였다. 형혹이 심수에 머무른 데 이어서 운성(隕星)이 동군(東郡)에 떨어졌다. 누군가 이 운성에 “시황제가 죽어서 땅이 나뉜다”라는 글귀를 새겼다. 진시황은 어사를 보내 누구의 소행인지 알아보게 했다. 다들 부인하자 진시황은 운성이 떨어진 곳 인근에 거주하는 백성을 죄다 죽였다. 불길한 징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진시황의 사자에게 벽옥(璧玉)을 건네며 진시황에게 전해주라고 하면서 “올해 조룡(祖龍)이 죽는다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용은 황제를 상징한다. 조룡은 용의 시조이니 최초로 황제를 자처한 진시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자의 말을 전해들은 진시황은 “산귀신은 일 년의 일밖에 모른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애썼다. 이미 가을이니 한 해는 곧 지나갈 터였다. 진시황은 “조룡은 인간의 시조”라며 조룡이 자신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도 벽옥의 출처를 알아보게 했다. 그 벽옥은 놀랍게도 그가 8년 전 천하를 순행할 때 강에 빠뜨렸던 것이었다. 불길함을 느낀 진시황은 점을 쳤다. 이동하는 게 길하다는 점괘가 나오자 진시황은 무려 3만 호(戶)를 북하(北河)와 유중(楡中)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동하는 게 길하다는 점괘 때문이었을까. 진시황은 순행에 나섰다. 가을에 시작된 이 순행은 이듬해 여름까지 이어졌다. 그의 마지막 순행이었다. 진시황은 이 순행길에 세상을 떠났다.

  진시황은 일찍이 방사 노생(盧生)을 시켜서 신선을 찾게 했는데, 그가 돌아와서 올린 도참서에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진시황은 몽염(蒙恬) 장군에게 30만 대군을 이끌고서 흉노를 치고 장성을 쌓게 했다. 북방 유목민족이야말로 진시황이 생각했던 가장 큰 위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진나라를 붕괴시킨 주범은 진시황이 그토록 아낀 호해(胡亥)였다. 진시황의 안장을 끝낸 호해가 제위에 오르자마자 한 일은 바로 형제자매를 죄다 죽음으로 내몬 것이었다. 이후 그는 온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자 순행에 나섰고 아방궁 공사를 재개했으며 전보다 더 가혹하게 법을 집행했다.

  호해가 제위에 오른 뒤 진승(陳勝)의 반란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다. 연·조·제·초·한·위의 육국이 모두 부활했고, 호해는 자살했다. 함양에 들어온 항우(項羽)는 진나라의 마지막 왕 자영(子嬰)을 비롯해 진나라 왕족을 죄다 죽이고 함양의 백성을 살육하고 궁전을 불태웠다. 항우는 진나라의 발원지인 관중(關中) 일대를 옹(雍), 새(塞), 적(翟)으로 나누고 각 땅에 왕을 봉했다. 기원전 211년 형혹이 심수에 머문 해에 떨어졌던 운성에 새겨진 글귀, “시황제가 죽어서 땅이 나뉜다”라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형혹이 심수를 침범할지라도

  한나라 성제는 형혹이 심수에 머무르자 승상을 죽임으로써 화를 피하고자 했으나 승상이 죽은 다음 달에 자신도 죽고 말았다. 성제는 황제로서 최악이었다. 그는 국정을 외척에게 맡겨놓고 술과 여자에 빠져 지냈다. 게다가 장안(長安) 서북쪽에 이미 연릉(延陵)을 조성했음에도 연릉의 풍수가 좋지 않다면서 장안 동쪽에 창릉(昌陵)을 만들게 했다. 창릉을 짓느라 백성은 피폐해졌다. 거리에는 굶어죽은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였고 재이가 잇달아 발생했다. 성제는 결국 창릉 공사를 중단하는데,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창릉의 흙이 자신의 영혼을 지켜줄 수 없다는 말 때문이었다. 성제의 죽음이 어찌 형혹이 심수를 침범했기 때문이라 하겠는가. 그는 하늘의 재이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고 올바른 대처도 하지 못했다.

  똑같은 ‘형혹수심’ 현상에 전혀 다른 대처를 했던 이가 있다. 춘추시대 송(宋)나라의 경공(景公)이다. 별자리를 관측하는 관리 자위(子韋)가 경공한테 말하길, 재앙을 재상에게 전가하면 된다고 하자 경공은 “재상은 나의 팔과 다리”라며 거절한다. 백성에게 전가하면 된다고 하자 “군주는 백성에게 의지한다”라며 거절한다. 한 해의 수확에 전가하면 된다고 하자 “흉년이 들면 백성들이 고통에 빠질 텐데 내가 누구를 위한 군주인가”라며 거절한다. 마침내 자위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높긴 하지만 낮은 곳의 소리를 잘 들으니, 군주께서 지금 군주답게 하신 세 가지 말씀에 형혹이 반드시 움직일 것입니다.” 결국 형혹이 심수에서 살짝 비켜났다. 이 일이 있고서 경공은 25년이 넘도록 왕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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