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하려면 여섯 가지 난제를 풀라!
640년, 가르통첸(중국 사서에서는 ‘녹동찬 綠東贊’으로 표기)이 토번(吐蕃)의 왕 손챈감포(중국 사서에서는 ‘기종농찬 棄宗弄讚’으로 표기)의 명을 받아 구혼 사절단을 이끌고 당나라에 왔다. 당나라에 구혼하러 온 사신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태종은 각국의 구혼 사신들에게 여섯 가지 어려운 문제를 풀게 한다. 승리하는 자가 공주를 자기 나라로 데려갈 수 있다. 다음이 바로 그 문제들이다.
첫째, 안에 구멍이 꼬불꼬불하게 뚫린 구슬을 부드러운 비단실로 꿸 것.
둘째, 어미말 백 필과 망아지 백 필의 모자 관계를 판별할 것. 또한 어미닭 백 마리와 병아리 백 마리의 모자 관계를 판별할 것.
셋째, 하루 안에 백 명이서 백 단지의 술을 마시고 백 마리의 양을 먹고 양가죽을 죄다 무두질할 것.
넷째, 통나무 형태의 소나무의 위쪽과 아래쪽을 판별할 것.
다섯째, 한밤중에 황궁에서 숙소까지 길을 잃지 않고 돌아갈 것.
여섯째, 300명(또는 500명, 또는 2500명)의 여인들 중에서 누가 공주인지 분간할 것.
가르통첸은 어떻게 이 난제들을 풀었을까? 첫 번째 문제, 개미의 허리에 비단실을 묶어 구슬 구멍 앞에 놓고 반대쪽 구멍에 꿀을 발라 놓자 개미가 구멍 속으로 지나가면서 비단실도 구멍을 통과했다. 두 번째 문제, 어미말과 망아지를 격리한 채 망아지에게 하루 종일 물은 주지 않고 사료만 주다가 다음 날 어미말과 섞어두자 각기 자기 어미의 젖을 물었다. 다음으로 모이를 바닥에 뿌리자 어미닭이 새끼 병아리를 불러들였다. 어미닭이 불러도 오지 않는 병아리가 있어서 새매의 소리를 흉내 내자 죄다 자기 어미의 날개 밑으로 숨어들었다. 세 번째 문제, 고기를 다 먹기 전에 술에 취하지 않는 게 관건이다. 고기를 아주 잘게 썰어서 술 한 모금에 고기 한 조각씩 먹게 하자 술도 고기도 다 먹고 무두질까지 끝낼 수 있었다. 네 번째 문제, 나무를 강물에 집어넣자 무거운 아래쪽이 가라앉고 가벼운 위쪽은 수면 위로 떴다. 다섯 번째 문제, 애초에 가르통첸은 장안에 오자마자 길을 잃지 않도록 주요 지점마다 표시를 해두었기에 쉽사리 황궁에서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여섯 번째 문제, 가르통첸은 일찍이 공주를 모셨던 이를 통해서 공주의 생김새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기에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 공주를 알아낼 수 있었다.
당나라 역사서에 드러난 우월의식
가르통첸이 구혼 사신으로서 여섯 가지 난제를 풀었던 일을 가리켜 ‘육시혼사(六試婚使)’ 혹은 ‘육난혼사(六難婚使)’라고 한다. 다분히 전설적이긴 하지만 가르통첸의 지혜와 치밀함을 대변해주는 이야기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가르통첸이 비록 글자는 몰랐으나 천성이 사리에 밝고 굳세고 진중하였으며, 그의 지모 덕분에 토번이 강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중국의 10대 명화에 속하는 염입본(閻立本)의 <보련도(步輦圖)>는 태종이 사신으로 온 가르통첸을 맞이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수레에 앉아 시녀들에 둘러싸여 있는 이가 태종이고 그를 바로 마주하고 있는 이가 전례관(典禮官)이며 그 뒤에 가르통첸과 역관(譯官)(혹은 내시)이 있다. 당나라 관리인 전례관은 토번의 사신인 가르통첸보다 상대적으로 크고 당당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당나라를 우월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우월의식은 역사서에도 어김없이 반영되어 있다. 정관(貞觀) 15년(641), 가르통첸 일행을 따라 장안을 떠난 문성(文成)공주가 토번의 변경에 도착한다. 문성공주를 몸소 맞이하러 나온 손챈감포, 『구당서』에 의하면 그가 대국의 복식과 예의(禮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다고 한다. 또한 돌아와서 친척들에게 말하길, “우리 조상 중에는 상국(上國)과 통혼한 이가 없는데 지금 내가 대당(大唐)의 공주를 얻었으니 정말 행운이다”라고 했단다. 문명/야만, 상국/하국의 프레임에 따른 서술은 그 뒤에도 이어진다. 토번 사람들이 얼굴을 붉게 칠하는 것을 문성공주가 싫어하자 손챈감포가 이를 금지시킨다, 손챈감포는 털가죽옷을 벗고 비단옷을 입는다, 점차 중화의 풍속을 연모하게 된다, 귀족 자제들을 당나라로 유학보낸다······.
토번의 시각에서는?
문성공주가 토번에 시집온 것을 계기로 당나라의 문물이 전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어떤 프레임으로 담아내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토번의 역사서에서도 과연 당시 자국에 대해 이처럼 문명국을 우러르며 갈망하는 부끄럽고 무지한 야만국으로 기술했겠는가. 토번으로서는 문성공주와의 혼인을 오히려 자국의 강성함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손챈감포는 당나라와 통혼하기 이전인 632년에 네팔의 공주 브리쿠티를 아내로 맞이한 바 있다.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시집갈 때 불상과 불경과 각종 공예품을 가지고 갔으며 여러 장인들도 데려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브리쿠티는 그 이전에 이미 같은 방식으로 시집갔다. 브리쿠티가 가져갔던 불상(석가모니 8세 등신상)은 현재 티베트의 라모체사원(小昭寺)에 모셔져 있고, 문성공주가 가져갔던 불상(석가모니 12세 등신상)은 조캉사원(大昭寺)에 모셔져 있다.
앞서 손챈감포가 당나라에 통혼을 요청했을 당시 당나라는 애초에 그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손챈감포는 당나라가 돌궐(突厥)과 토욕혼(吐谷渾)에는 공주를 시집보냈으면서 자신의 요청은 거절한 것에 분노하며 송주(松州)를 공격한 바 있다. 그의 군대는 막강한 당나라를 상대로 거침없는 공격을 펼쳤다. 이후 당나라 선봉대가 토번의 군영을 야습해 천여 급을 베자 손챈감포는 병사를 이끌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손챈캄포는 당나라와의 통혼은 포기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면서 다시 혼인을 요청했다. 강성해지고 있는 토번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상황에서 태종은 그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당나라 우위의 일방적인 관점에서 손챈감포와 문성공주의 결혼을 해석하는 것은 그야말로 착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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