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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식인’ 언설과 루쉰의 「광인일기」(5)

 

 

메이지 시대 “식인” 언설과 루쉰의 「광인일기」(5)
(明治時代“食人”言說與魯迅的「狂人日記」, 2011)

 

 

 

리둥무(李冬木)

 

 

6. 하가 야이치의 『국민성십론』

  상술한 문헌 가운데 오로지 하가 야이치의 『국민성십론』만이 “식인 풍속”을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은 유일한 작품이다. 하지만 루쉰이 중국 역사 속에 존재하는 “식인”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일깨우고 암시를 준 관건이 되는 문헌이라 할 것이다.

  말 그대로, 이 책은 “국민성” 문제를 다룬 전문서로, 메이지 사십 년(1907) 12월에 출판되었다. 만약 세상에 “일본만큼 자신의 국민성에 대해 토론하길 좋아하는 국민은 없다”면, 그리고 국민성 문제를 다룬 문장이나 저작이 차고 넘쳐 일일이 다 꼽을 수 없다면, 『국민성십론』이 바로 일본 근대 이래 유구하고 풍부한 “국민성” 토론사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저작이라 할 수 있으며, 역대로 높은 평가를 받아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근래의 베스트셀러인 후지와라 마사히코(藤原正彦, 1943- )의 『국가품격』(國家品格)은 내용면에서 전자에 의탁한 바가 아주 분명하다.

  “국민성” 문제는 일본에서 예전부터 줄곧 근대 민족국가와 더불어 이어져 내려온 문제이다. 하나의 개념으로 보자면 메이지 시대의 시작과 함께 시대가 다르면 명칭도 다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메이로쿠 잡지』에는 “국민풍기”(國民風氣)와 “인민지성질”(人民之性質)로 불렸고, “국수보존주의”(國粹保存主義)의 메이지 20년대는 “국수”(國粹)로, 메이지 30년대에는 “일본주의”(日本主義)라는 대명사로 불리며, “국민성”이라는 단어는 갑오전쟁부터 러일전쟁에 이르는 10년간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내 “자리를 잡았다.” 일본이 두 번의 전쟁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두어 “국제 경쟁 마당의 일원”이 되었고, 서방에 “황화론”(黃禍論)의 공포를 야기함으로써 민족주의(nationalism)가 공전의 고조를 맞도록 하여, “국민성”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배경 아래 시대의 요구에 따라 생겨났다. 가장 먼저 이 단어를 문장 제목으로 삼은 경우는 문예평론가 츠나시마 료젠(綱島梁川, 1873-1907)의 『국민성과 문학』(國民性與文學)으로, 『와세다문학』(早稻田文學) 메이지 31년(1898) 5월호에 발표되었다. 이 문장은 “국민성”이라는 단어를 48차례 사용했고 단번에 이 단어가 “자리를 잡게” 만들었다. “국민성”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서명으로 사용한 경우는 바로 10년 뒤 출판된 『국민성십론』이다. 그 후, 루쉰이 일본 유학하던 시기부터 시작해, “국민성”은 중국어 언어권으로 들어와, 이때부터 이 사상 관념이 일거에 일본 유학생 사이에서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 상세한 정황은 필자의 상관 연구를 참고하기 바란다.

  하가 야이치는 근대 일본 “국문학” 연구의 중요한 개척자이다. 동경제국대학(현재 동경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1900년 국문과 부교수로 독일에 유학하여 1902년 귀국, 동경제국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임했다. 서방 문헌학을 처음으로 그가 일본 “국문학” 연구 영역에 도입하여, 이때부터 전통 일본 “국문학”이 근대 학문의 하나로 탄생했다. 주요 저작은 『고증금석물어집』(考證今昔物語集), 『국문학사십강』(國文學史十講), 『국민성십론』 등이 있고, 일본 문학 작품집 여러 종류를 편집하고 교정했다. 그의 사후 후학과 제자들이 편집하여 정리한 『하가 야이치 유작』(芳賀矢一遺著)은 그가 남긴 연구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성과이다. 『일본문헌학』(日本文獻學), 『문법론』(文法論), 『역사물어』(歷史物語), 『국어와 국민성』(國語與國民性), 『일본한문학사』(日本漢文學史)가 그것이다.

  『국민성십론』은 하가 야이치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내용 일부는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의 요청을 받아 행한 연속 강연에서 비롯했고, 메이지 사십 년(1907) 12월 1집이 부산방(富山房)에서 출판되었다. 일본 근대 사상사 가운데 이 책은 “근대 일본”이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05)의 두 차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자아인지”(自我認知)를 하게 된 중요 문헌으로, 본국 국민에게 자기의 “국민성”이 어떠한가를 강술한 책이며, 요지는 새로운 역사 조건 아래 “국민의 상성(相性)을 발휘”하여 “자기를 아는 명석함”(自知之明)을 건립하는 데 있었다.

  이 책은 10장으로 나눠 일본 국민성을 토론한다. ①충군애국(忠君愛國), ②숭배조선, 중시가족명예(崇拜祖先, 重視家族名譽), ③현실과 실제(現實而實際), ④열애초목, 희상자연(熱愛草木, 喜尙自然), ⑤낙천쇄탈(樂天灑脫), ⑥담박소쇄(淡泊瀟灑), ⑦섬려섬교(纖麗纖巧), ⑧청정결백(淸淨潔白), ⑨예절예법(禮節禮法), ⑩온화관서(溫和寬恕)가 그것이다. 국민 “미덕” 가운데 비록 “감춰진 결점”을 회피하지는 않았지만, 장점을 주로 토론하여 일본 국민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면이 두드러져 “만들어낸” 진술이라는 느낌을 준다. “지나 식인 시대 유풍”의 사례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소개되어 “온화관서” 장에서 출현한다. 그 인용된 사례와 전후 맥락을 중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아 전모를 살필 수 있다.

 

  다른 인종에게 일본은 예전부터 매우 관대했다. 하야토(準人)이거나 쿠마소(熊襲)이거나 귀순만 한다면 모두 관용을 베풀었다. 신무(神武) 천황은 오토우카시(弟猾), 오토시키스히코(弟磯城)를 귀순하게 하여 오토우카시를 다케다현(猛田縣) 현주(縣主)로 삼았고 오토시키스히코는 오토시키스현(弟磯縣) 현주로 삼았다. 이런 종류의 관계는 하치만타로 요시이에(八幡太郞義家, 1039-1106)가 아베노 무네토(安培宗任, 1032-1108)와 맺은 관계와 동일하다. 조선인과 지나인이 귀화해 오면 고래부터 받아들였다. 백제가 멸망할 때 귀화한 남녀 사백여 명을 오오미국(近江國)에 안치했고 전답을 주고 개간하게 하여 다음 해 다시 이천여 명이 아즈마국(東國)에 이주해 정착하자 관곡을 베풀었다. 영귀(靈龜) 이 년 기록에 보이듯 1790여 명의 고구려인들이 무장지국(武藏之國)으로 이주하자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했다. 이들 사례는 역사상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으며 성씨록 안에 번별(藩別) 성씨 또한 셀 수 없이 많다. 항복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전쟁에서 학살한 일은 없었다. 은혜로 포용하여 마음으로 복종하게 만드니 이는 일본에서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방법이다. 백기(白起)처럼 40만 조나라 병졸을 생매장하는 잔혹한 일은 일본 역사에선 찾아볼 수 없다. 지나 역사를 읽으면 인육으로 포를 뜨거나 국물을 내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식인 시대의 유풍이라 하겠다.

  지나인이 인육을 먹는 사례는 드물지 않게 보인다. 『자치통감』, 「당희종중화삼년」(唐僖宗中和三年) 조의 기록이다. “당시 민간에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어 도적이 사람을 잡아 식량으로 하여 산 채로 맷돌에 넣어 갈아 뼈까지 먹고 양식을 주는 곳을 가리켜 ”용마채“(舂磨寨)라 불렀다.” 이 말은 사람을 맷돌에 넣어 잘게 갈아 만든 후에 먹었다는 것으로 지옥도 한 폭이 생생히 펼쳐지고 있었다 할 것이다. 다음 해 기록에도 “염시”(鹽屍)란 말이 나온다. “군량 보급이 여의치 않아 염시를 수레에 싣고 뒤따랐다.” 염시란 곧 죽은 사람을 염장 처리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광계(光啟) 삼 년 조의 기록이다. “선주군(宣州軍)이 사람을 납치하여 맘대로 팔아치웠고 몸을 묶고 베어내기를 양과 돼지처럼 하여,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고 시체는 쌓이고 피는 내를 이뤄 저잣거리에 가득했다.” 인간의 행위라고 상상하기 정말 어렵다. 명나라 도종의의 『경철록』 가운데 기록이다.

 

  천하의 갑병이 바야흐로 떨쳐 일어날 때, 회수(淮水) 서쪽 군인들이 사람고기를 즐겨, 어린 아이를 최상으로 치고 부녀자를 그 다음, 남자를 또 다음으로 쳤다. 항아리 둘 사이에 앉으라 하곤 밖에서 불을 지폈다. 아니면 쇠막대기에 걸쳐두고 산 채로 구웠다. 손발을 묶고 먼저 뜨거운 물로 삶고 대나무 빗으로 껍질을 벗겼다. 자루에 넣어 커다란 솥에 넣고 산 채로 삶곤 했다. 혹은 토막 내어 넣었다. 남자는 두 다리를 자르고, 여자는 두 가슴을 따로 도려냈다. 혹독한 참상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다. 통칭하여 “고기가 생각난다”(想肉)라 한다. 인육을 먹고 나면 더 먹고 싶어진다는 말이다. 당나라 초엽 주찬(朱粲, ?-621)이 사람을 식량으로 하고 맷돌에 넣고 갈아 술 취한 사람을 먹음이 술에 절인 돼지를 먹는 것과 똑같다라 말한 것은 진정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겠다.

 

  이 모두가 바로 전쟁 시기 양식이 없어 벌어진 사태일지라도 평시에도 인육을 먹었다니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책의 기록이다.

 

  당나라 장작(張鷟)의 『조야첨재』(朝野僉載)에 이르길, 무후(武后) 시대 항주 임안위(臨安尉) 설진(薛震)은 인육 먹길 즐겼다. 어느 빚쟁이가 하인을 데리고 임안을 방문하여 객사에 머물 때 같이 술을 먹고 취하자 그를 죽이고 수은과 함께 넣고 뼈까지 녹여 먹었다. 그 후 그 아내까지 먹으려 하자, 이를 알아채고 벽을 넘어 도망쳐 현령에게 고발했다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이 책은 각종 고서 상에 기재된 식인의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장무소(張茂昭, 762-811), 장종간(萇從簡), 고풍(高灃), 왕계훈(王繼勳, ?-977) 등은 모두 관직에 있었지만 인육을 먹었다. 송나라 김추(金秋)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도적, 관병, 주민이 서로 잡아먹었으니, 당시 은어 가운데 노쇠한 남자는 “요파화”(饒把火), 부녀자와 아이는 “불미갱”(不美羹), 어린아이는 “화골란”(和骨爛)이라 칭하여, 보통은 “양각양”(兩脚羊)이라 불렀으니, 사람을 심히 놀라게 하는 지경이라 하겠다. 이 책으로 알 수 있듯이, 명나라까지 줄곧 식인의 사례가 있었다. 저자가 평하며 말하길 “사람일진대 사람의 심성이 없다”라 한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병사들이 전쟁에 이긴 후 부녀자를 능욕하고 제멋대로 약탈하는 일이 일본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었다. 러일전쟁 전에 러시아 장군이 만주인 수천 명을 흑룡강으로 몰아넣고 도륙한 일은 세상 사람들이 생생히 기억하는 바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남미 대륙을 정복할 때 가장 많이 남긴 사건이 바로 끔찍한 이야기들이다. 백인이 인종을 구분할 때 흑인을 아예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전에 로마인이 포로를 야수에게 먹이로 주었고 러시아는 유태인을 아직도 학살하고 있다. 백인이 비록 자애를 말하고 인도를 논하지만 자신들이 가장 우수한 인종이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다른 인종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학자들의 저술에도 “아리안인과 유색인”이라 적는다. 일본은 예부터 국내의 다툼이 인종간의 충돌이 아니었기에 자연히 잔혹한 일이 드물게 일어난 이유이지만, 일본인이 솔직하고 단순한 성정을 지녔기에 일본인이 어떤 경우에도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극도의 잔혹해지는 것을 마음에서 내켜 하지 않도록 결정되었다 할 것이다.

 

  상술한 “잔혹” 사례는 분명히 세계 각국에서 보이는 것으로 유독 “지나”에만 그치지 않아 러시아, 스페인, 옛날 로마 등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지나”에서 나온 사례가 가장 많고 가장 구체적이다. 하가 야이치는 일본 국문학자로 중국 서적에 익숙했고 그의 『일본한문학사』는 일본 근대의 첫 번째 저작이라 불리는 작품이지만, 여기서 예로 든 “지나 식인”은 메이지 시대 이래 존재했던 언설을 계승한 것이며, “식인”의 예증 방면에 있어 하가 야이치는 한 층 더 실력을 발휘했다. 그중 “백기가 조나라 투항병 40만을 생매장했다”는 출처를 밝히지 않아 역시 『자치통감』에서 취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자치통감』이라 명시하고 있는 사례는 셋, 『철경록』은 여덟이다. 『자치통감』은 기왕에 언급한 “식인” 관련 문헌이 출처를 밝히지 않았기에 예로 든 문헌의 출처를 더했지만, 『철경록』은 과거에 호즈미 노부시게(1891년 1건)와 마사미치 데라이시(1898년 3건)가 이미 인용했더라도 예로 든 범위는 하가 야이치(1907년 8건)에 미치지 못한 이유로, 비록 출처는 동일하지만 사례로 든 숫자가 증가했다. 그래서 과거 “인류학” 방면에서 예로 든 사례와 비교했을 때 이들 사례는 모두 하가 야이치가 독자적으로 문헌에서 가려 뽑은 특징이 있다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설명해야 할 부분 몇 가지가 있다.

  우선 근대에 소위 말하는 “종족,” “인종,” “민족” 혹은 “인류학” 등 방면의 연구는 처음부터 “진화론”과 “민족국가” 이론이 융합된 요소가 있어 그 “연구 성과” 혹은 사용된 사례는 “국민성”과 관련된 토론에 운용되는 와중에 문화적 편견을 낳을 소지가 다분하다. 예를 들어 메이지 삼십칠 년(1904) 출판된 『야만 러시아』(野蠻俄國)라는 책은 러일전쟁 전야에 러시아를 묘사하며 “식인 인종에 가깝다”라 했다. 하가 야이치가 “식인 시대의 유풍”을 일본 국민성 “온화관서”의 “미덕”과 비교한 것이 이 방면의 명확한 사례라 하겠다. 하지만 다른 극단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식인 연구”가 “종족 편견”을 가져올 수밖에 없음을 자인하여, 이런 의의로 본다면 미나카타 구마쿠스가 메이지 삼십육 년(1903) 완성한 연구는 그렇게 가치가 있다고는 볼 수 없고 다만 편견이 없는 그의 논문이 “종족 편견”에 의해 묻혀버렸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국민성십론』에서 하가 야이치는 이미 알려진 자국 문헌에 보이는 “식인” 사례를 알게 모르게 회피하고 말아, 다룬 내용이 가볍게 넘어가든지 아니면 언급만 하고 지나가, 오늘날 보자면 “사례가 불균형을 이룬 논증”이라지만 논지에 사로잡혔다는 비난 또한 면하기 어렵다. 단지 그가 “병사들이 전쟁에 이긴 후 부녀자들을 능욕하고 제멋대로 약탈하는 일은 일본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을 때, 그 후 일본군이 침략 전쟁 중 벌인 정황에 대해서는 물론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 “식인 풍습”이 곧 “지나인의 국민성”이 되었던 시기에 소위 말하는 “지나”는 자연히 폄하의 의미가 있었다. 이는 루쉰이 뒤에 명확히 인식한 점으로, 예를 들어 그는 1929년 중국과 일본이 해외에 소개될 때 동등하지 않다고 말했다. “중국 밖의 사람이 경서나 제자서를 번역한 사례는 있지만 현재의 문화생활, 고급과 저급을 막론하고 전체 문화생활을 세계에 소개한 사례는 드물다. 어떤 학자들은 전적 가운데서 식인 풍속의 증거를 찾으려 애썼다. 이 면에서 보자면 일본은 중국보다 아주 행복한데, 외국 사람들이 항상 일본의 장점을 특별히 선양해주거나 외국의 장점을 선선히 좋은 마음으로 들여왔다.” 루쉰이 비록 “어떤 학자들”이 “전적 가운데서 식인 풍속의 증거를 찾으려 애쓰는” 태도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전적 가운데 “식인” 사실의 존재 여부를 부정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고, 심지어는 이를 기점으로 삼아 중국인 인성을 재건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네 번째, 일본의 메이지 언어에서, 특히나 “국민성” 관련 언어 가운데 “지나”는 아주 복잡한 문제로, 처음부터 이후 중국 침략 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한 후 나타난 양상이 아니라 그저 폄하하고 “응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사실상 꽤 오랜 시간 동안 “지나”는 줄곧 일본의 “시세를 살피는 데” 중요한 참조가 되었다. 예를 들어 『메이로쿠 잡지』는 “국명과 지명”으로 “지나”라는 단어를 사용한 빈도가 여타 다른 국명과 지명이 출현한 것보다 많아서, 당시 주요 학습 대상국인 “영국”과 본국인 “일본”보다도 비할 수 없이 많았다. 이는 바로 “지나”를 “타자”로 하면서도 “일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대상이 아닌 것 이외에, 종종 “일본” 내에 포함된 이유로, 서양 각국을 들어 “지나”와 비교하면서 종종 자신과 비교하여 “지나”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대개 바로 자신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의 『백일신론』(百一新論)이 유교 사상을 비판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으며,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1832-1891)가 “지나”를 변호하는 『지나불가욕론』(支那不可辱論, 1875),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4-1901)의 『권학편』(勸學篇, 1872), 『문명론개략』(文明論槪略, 1877)에서도 볼 수 있어, 모종의 의의로 말하자면 뒤에 나오는 소위 “탈아”(脫亞)도 “지나”를 “타자”로 삼아 자신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한 문화상 결론이라는 것이다. 하가 야이치의 『국민성십론』에서 “지나”가 담당한 역할은 바로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제거하기에는 불가능한 “타자”로, 일본 이외 “국민성”의 참조 의의로써 폄하의 의미보다는 분명히 크며, 일본이 이전에 “지나”와 “인도” 문화를 수입하며 어떻게 두 가지 문화를 자신의 필요에 맞게 적용해나갔는가를 적어도 객관적으로 설명해준다. 바로 이런 종류의 “국민성” 맥락에서라야 “식인”은 일종의 사실로써 루쉰의 시야로 진입한다.

 

 

李冬木 著, 『魯迅精神史探源: 個人⋅狂人⋅國民性』, 臺北: 秀威資訊科技, 2019, 166-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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