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아프간 사태로 뉴스가 넘친다. 카불을 점령한(2021.8.15) 탈레반에 이어 탈레반과 경쟁하는 IS-K(이슬람국가 호라산)의 카불 공항 자살폭탄 테러, 이를 응징하기 위한 미국의 드론 공습 소식 등이 숨 가쁘게 이어진다. 국내에는 난민(refugees)이 아닌 ‘특별 기여자(people of merit to the country)’ 신분의 아프간 ‘국민’ 390명이 ‘미라클’ 군사 작전을 통해 군 수송기를 타고 입국했다. 단군 이래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될 듯하다. 중국과도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아프간 소식은 당분간 국내외 뉴스의 단골 메뉴가 될 전망이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로 인해 라오스와 중국 변강을 얘기하기에 앞서, 라오스와 비슷한 역사적 경험이 있는 아프간 소식으로 시작하게 되어 마음이 씁쓸하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9년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독일과 일본에 투하한 폭탄보다 더 많은 2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라오스에 투하했습니다. 그 결과 라오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폭격을 맞은 나라가 되었지요. 어느 라오스인이 ‘폭탄이 비처럼 쏟아졌다’고 말한 것처럼 마을과 골짜기는 폭격으로 소실되었습니다. 고대 항아리 평원은 파괴되었고, 수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은 원인이 무엇이든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전쟁이란, 특히 무고한 남성과 여성, 아이들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끔찍한 희생을 낸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저는 그 갈등으로부터 초래된 모든 고통과 희생을 인정합니다.”
2016년 라오스를 공식 방문한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 중 일부이다. 연설의 역사적 내원은 대략 이렇다. 란쌍(100만 마리 코끼리의 땅, 라오스) 왕국은 내분으로 1707년 북쪽의 루앙프라방과 남쪽의 비엔티안으로 분열되었다. 주변 강대국들은 라오스의 분열을 기회 삼아 이들을 침략하였고, 그 결과 비엔티안은 1828년 시암(현재의 태국)에 의해 합병되고, 루앙프라방은 중국과 베트남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가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합병한 뒤 마지막으로 라오스까지 합병하게 되었고, 이에 씨암은 프랑스를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씨앙쿠앙과 후아판 지역을 침략하였다. 결국 씨암과 프랑스의 협상으로 1893년부터 프랑스는 루앙프라방에 부영사를 유지할 권한을 얻는다. 이후 라오스는 인도차이나반도를 침공한 일본을 이용해 1945년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인도차이나 탈환을 위해 프랑스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을 일으켰으나 베트남군에게 패하고, 1954년 열린 제네바 협정에서 드디어 라오스는 독립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라오스 독립에 앞장섰던 좌파 세력 애국전선[파테트 라오(Pathet Lao)]에 의한 정권 수립에 불안을 느낀 미국은 파테트 라오의 반대 노선인 라오스 우익 세력을 지원하게 되어 결국 새로운 내전이 시작된다.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 탐욕과 냉전이 낳은 내전이다. 이 시기에 일어난 베트남 전쟁(일명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4~1975)의 지원물자가 라오스를 통해 이동하였고, 미국은 이 전쟁 물자를 차단한다는 이유로 9년간(1964~1973년) 50만 회에 걸쳐 2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 당시 투하한 폭탄 중 8,000만 발이 불발탄으로 아직 땅속에 있다. 라오스에서는 이런 불발병기(UXO: UneXploded Ordnance)로 인해 평균 매일 1명씩 다치거나 죽는데, 그중 상당수가 어린아이들이다. 라오스 하면 아름다운 자연과 매혹적인 건축물, 때 묻지 않은 순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라오스의 불발탄 박물관(UXO Lao Visitor Centre)을 방문한 후에는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이곳은 라오스의 UXO 현황과 제거 활동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정원에는 녹슨 폭탄과 포탄들이 장식처럼 세워져 있고, 작은 전시실에는 전쟁 당시의 사진과 제거 작업 설명과 함께 처리된 수류탄, 로켓, 지뢰, 총들이 바닥 가득히 깔려 있다. 현재 세계 각국의 지원을 받은 라오스의 불발탄 제거 단원들은 빈약한 보호 장구를 가지고 제거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 지뢰 제거 작업 역시 만만치 않으나, 라오스에 비하면 그래도 수월할 것이다. 라오스처럼 더운 나라에서는 매우 힘든 작업으로, 일사병과의 사투까지 벌여야 한다. 라오스에서는 제1, 2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75)을 일컬어 30년 전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1950년 6.25전쟁 이래 잠시 휴전 상태일 뿐 아직도 70년 전쟁이 계속 중이라는 사실이 남의 일만 같지는 않다. 북한에서는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조인된 뒤 한 달이 채 안 되어(8.17) 평양에 ‘조국해방전쟁기념관’을 개관하고, 1974년 4월 11일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으로 개칭하였다. 북한이 6.25 전쟁에서 미국에게 승리했다는 인식을 강조한 것으로, 1993년 7월에 26일에는 ‘전쟁 승리의 날’을 맞아 기념관 앞에 승리기념‘탑’을 세우기까지 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은 이전까지 일명 ‘비밀 전쟁’이라고 불렀던 사태에 대한 미국 정부 최고위 관계자의 고해성사라고나 할까? 라오스가 당시 중립지대였기 때문에 이런 폭격이 없었노라고 부인해 오던 미국이었으니 말이다. 지난 20년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2천조 원의 전쟁 수행 비용을 쏟아부었다는 이야기가 자꾸 오버랩 된다. 이 내전 당시 미국 편에서 도움을 주었던 라오스의 몽(Hmong)족 10만여 명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75년의 사이공 함락 때 10만 명이 넘는 베트남인들을 괌으로 이동시킨 것도, 이번 아프간에서 미국인과 그 조력자 10만 명 정도가 미국으로 탈출해야 하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최근 베트남 국영 언론 보도에 따르면 베트남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고 건설한 라오스의 새 의회 건물을 라오스 측에 양도했다고 한다. 1억 1100만 달러(1250억 원)가 든 사업으로 수도 비엔티안(Vientiane, ວຽງຈັນ 위앙짠, 백단향, 달의 도시) ‘문화 연구 센터’로도 사용될 것이라고 한다. 2016년 11월 베트남 공산당(VCP) 총서기 응우옌푸쫑(Nguyen Phu Trong)이 처음 약속하고 5년 만에 결실을 보았다. 일각에서는 라오스가 베트남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라오스를 점차 베트남의 영향력으로부터 빼내기 시작하고 있다. 라오스 국립문화관(Lao National Cultural Hall)을 포함한 새로운 정부 건물들을 기증하는가 하면, 점점 더 많은 라오스 정부 인사와 공산당 간부가 교육과 훈련을 위해 베트남 대신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따라 2016년 12월부터 시작된 중국 국경 시솽반나[西雙版納] 모한[磨憨]에서 비엔티안까지의 철도 공사는 2021년 말에 개통될 예정인데, 국토의 절반에 해당하는 라오스 북부 지역이 중국 남부와 더욱 밀접하게 연결될 것이다. 라오스와 중국 윈난성 간의 육로 연결이 증가하고, 중국 자본과 인력이 라오스로 유입되면서 수도 비엔태안과 라오스 북부 지역의 험준한 물리적 경관이 바뀌게 되었다. 중국 윈난에서 비엔티안을 거쳐 태국의 항구도시 라용까지 잇는 약 800km 길이의 이 철도 건설에는 약 1만 7천 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투입, 산과 수많은 교량과 47개의 터널이 건설되었다. 라오스는 이 사업에 30%의 지분을 갖고 있다지만 이 또한 차관 형식이다. 세계 최빈국에 가깝고 철도 건설이나 관리 경험이 없는 라오스가 이를 계기로 인도차이나반도 내륙국의 답답함을 해소하고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중국의 변강에 위치한 나라, 100여 개 민족이 뒤 섞인 인구 700만 명밖에 안 되는 약소국가요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도 세계 최강을 꿈꾸는 중국과 함께 공동부유(共同富裕)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우리나라 경술국치(庚戌國恥) 111주년 되는 날(8.2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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