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시진핑 체제의 3연임이 공식화되었다. 이로써 장쩌민 체제를 과도기로 10년 주기로 권력을 교체하는 관행과 제도는 모두 폐기되었다. 그러나 시진핑의 3연임이 덩샤오핑과 장쩌민의 권력이양만큼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아니다. 1989년 6월 무명 인사였던 장쩌민이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선임되었던 것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학자와 언론은 장쩌민이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권력이양기 화궈펑(華國鋒)의 운명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과도기를 거쳐 1997년 제15차 당대회에서 장쩌민이 당군정의 통치권력을 장악하면서 ‘장쩌민의 미래’를 비관했던 전문가들은 실패를 자인해야 했다.
반면, 시진핑 체제의 3연임은 2013년 출범 직후, 그리고 1997년 19차 당 대회에서 예견되었다. 국내문제를 통치이념으로 제시했던 전임 체제와는 달리 시진핑 체제는 중국의 꿈, 신형대국관계, 일대일로 등 대외관계를 통치이념화했다. 격대지정에 따른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으면서 연임이 예견되었고,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시진핑 사장)’이나 2021년 ‘역사결의’를 통해 이념적 정풍운동(整風運動)을 해왔다.
통치이념, 인민해방군의 통제, 그리고 통치세력 등 중국공산당의 세 가지 권력기반에 비추어본다면 시진핑 체제의 3연임을 비관할 근거는 없다. 첫째, 시진핑 체제는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통치이념에 더해 개혁개방, 경제체제, 그리고 주권, 영토, 발전 등 핵심이익이 결부된 대외관계를 이념화함으로써 ‘이념적 권위’를 강화해왔다. 두 개의 100년을 목표로 하는 ‘중국의 꿈’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경험했던 굴욕의 역사를 해소하는 정치이념이다. 공세적 중국 문제를 불러일으킨 ‘신형대국관계’는 다시 강대국이 되었다는 자긍심이다. 그리고 일대일로를 통해 주변 국가에 대한 관여와 책임을 다하는 ‘책임대국’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강조했다.
둘째, 군의 통치를 넘어 혁신과 개혁을 주도하고 있다. 역대 당군정의 권력이양에서 군의 통수권은 과도기를 거쳤다. 덩샤오핑은 1987년 당정의 모든 직위에서 사퇴했지만 1989년 11월까지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유지했다. 이후에도 상당 기간 심복을 통해 군 통수권을 행사했다.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이양한 이후에도 장쩌민은 2년간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유지했다. 군과 당정 권력이 분리된 ‘두 주석체제’가 유지된 것이다. 시진핑 체제는 출범과 함께 군 통수권을 행사한 것은 물론, 역대 최대 규모의 인민해방군의 개혁을 추진했다. 20차 당 대회에서는 다시 한번 2027년까지 인민해방군의 현대화, 그리고 세계화를 완성하는 목표가 강조되었다. 그리고 태자당, 상하이방, 공청단 등의 전통적 파벌이 시진핑 세력(習家軍)으로 재편되면서 시진핑을 핵심(核心)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된 권력기반도 공고화되었다.
그러나, 시진핑 체제의 3연임은 신중국 건국 이후 통치권력의 기반이 되어왔던 세 가지 요인보다 중요한 요소가 더해졌다. 위기를 이념화한 것이다. 시진핑 체제의 3연임은 중국의 부상에 수반되는 역사적 필연이자 정치적 결단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부상은 필연적으로 구조적 과제를 수반해왔다. 비교우위 전략에 따른 대외의존 발전은 도농 간, 산업 간, 지역 간 격차를 심화시켰다. 절대적 빈곤을 해소하는 소강사회를 성취했지만, 사회구조적 불균형은 심화되었다. 사회적 격차는 정치적 모순을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 성장을 가로막는 중진국의 함정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부상은 필연적으로 주변 관계를 지역 관계로 확장했다. 세계적인 분업질서에 편입되고, 양자, 다자 등의 다자협력으로 연계되면서 대외의존 성장만큼 취약성, 민감성도 증가했다. 시진핑 사상과 역사결의는 개혁개방의 성취와 함께 이에 수반된 대내외적인 과제를 ‘위기’로 치환함으로써 시진핑 체제 3연임을 정당화하는 이념적 권위로 활용했다. 그리고 미중갈등, 코로나-19, 대외의존, 영토와 주권 분쟁까지, 시진핑 체제의 3연임은 중국이 대내외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모든 위기가 이념적 권위로 전환된 결과다.
역사적 그리고 비교적으로 본다면, 중국공산당의 권위주의 통치 권력의 강화를 비관할 이유는 없다. 중국공산당의 일당지배와 동일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국과 대만의 권위주의 체제, 그리고 55년 체제 이후 자민당의 장기집권은 삼국이 동아시아의 기적이 될 수 있었던 정치적 요인이었다. 권력이양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시진핑 3연임은 개혁개방에 수반된 사회경제적인 위기를 해결하는 국가능력이 될 수 있다.
중요한 문제는 주변 분쟁과 대외관계에 있다. 미중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안보질서가 변동하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진 시진핑 체제의 3연임은 중국이 핵심이익으로 강조해 온 대만, 동중국해, 남중국해 분쟁에 공세적 대응을 넘어 강압적, 군사적 수단을 사용할 가능성을 높이게 되었다. 펠로시 하원의장의 방문으로 촉발된 제4차 양안위기에 대한 중국의 공세는 1, 2, 3차 양안위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더구나 미국은 제3차 양안위기와 달리 항공모함이나 군사력을 전개하여 개입하지 못했다.
20차 당 대회를 앞두고 2027년 대만통일 계획이 보도되었지만, 중장기적으로 영토, 주권관련 분쟁을 중국이 강압적 수단으로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하다. 하지만 대만 문제를 최우선으로 남중국해 또는 동중국해의 영토주권을 기정사실하는 점진적인 전략이 추진될 것이다. 핵심과제는 중국이 강제력을 수단으로 일방적으로 현상을 변경하는 의도와 행위에 어떻게 억지력(deterrence)을 발휘할 것인가의 문제다. 역설적이게도 억지력은 물리적 파워의 양적 우위, 또는 균형에서 발휘되는 결과가 아니다. 억지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군사력, 강제력을 배제한 선택을 하도록 중국의 정책결정자를 설득해야 한다. 만약, 중국의 의지와 심리에, 부정적, 또는 긍정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면 전후 유지되었던 동북아의 현상은 중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변경될 수 있다.
시진핑 체제가 3연임 하게 되면서 미국과 중국의 억지 의지의 불균형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중국의 파워, 특히 비대칭적 지역균형(local balancing) 전략이 고도화되면서 미국의 군사적 억지와 관여비용은 증가하고 있다. 미국이 역내 균형자, 또는 역외 균형자로서 동아시아에 대한 군사적 관여와 개입은 고정불변의 미래가 아니다. 비용 합리적 (cost-benefit) 시각에 따른다면 미국의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비용이 높다면 개입은 축소할 수밖에 없다. 시진핑 체제가 위기를 이념화하여 3연임을 결정하면서 ‘하나의 중국’은 타협할 수 없는 통치이념이 되었다. 대만 또는 주권, 영토 관련 분쟁에 타협하거나 양보하면 시진핑 체제의 붕괴를 초래할 만큼의 청중비용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체제유지와 공고화를 위해 미국 또는 주변국과의 분쟁 비용을 감수할 가능성도 높아지게 되었다.
시진핑 체제의 3연임 이후 낙관적 또는 비관적 중국의 미래는 모두 동북아와 세계질서의 미래의 문제다. 비관적 지역질서의 재편을 억지하기 막기 위한 중간국의 전략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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