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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도시와 시] 양주(揚州)(6)

 

  양주를 소재로 한 시는 당대 이후에도 꽤 있다. 그중에서 송대의 유행가인 사(詞) 중에서 대표작을 보는 것으로 양주 편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남송(南宋)의 시인이자 사인(詞人)인 강기(姜虁, 약 1154-1221)의 노래이다.

 

<양주의 노래(揚州慢)> 강기(姜虁)

1176년 동지날 양주를 지날 때 밤눈이 내리다가 막 그쳤다. 멀리 바라보니 들판의 풀들만 눈에 들어왔다. 양주성 안으로 들어가 사방을 둘러보니 쓸쓸한 분위기, 파란 강물은 차갑다. 해질녘이 되니 구슬픈 호각 소리가 들린다. 내 마음도 슬퍼졌고 과거와 현재를 개탄하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 천암노인은 이 노래에 서리(黍離)의 슬픔이 있다고 했다.

淳熙丙申至日, 余過維揚. 夜雪初霽, 薺麥彌望. 入其城, 則四顧蕭條, 寒水自碧, 暮色漸起, 戌角悲吟. 余懷愴然, 感慨今昔, 因自度此曲. 千巖老人以爲有黍離之悲也.

 

  이 부분은 서문으로, 노래를 만들게 된 배경을 밝혔다. 강기는 21살에 말로만 듣던 양주를 처음 방문했다. 눈 내린 겨울의 양주는 스산하고 도시를 에워싸고 흐르는 강물은 차가운데 호각 소리마저 슬프다. 과거의 화려했던 모습은 간데없고 강기의 가슴에는 슬픔이 일어나 노래로 남겼다.

  송사는 기존에 있던 곡조에 사인이 가사를 새로 쓰는 식으로 창작한다. 가사로 쓰려는 내용과 맞아떨어지는 곡조가 없다고 판단하면 사인이 직접 새로운 곡조를 만드는데, 이것을 자작곡이라는 뜻의 자도곡(自度曲)이라고 한다. 강기는 양주의 첫인상에 어울리는 노래를 만들었다. 제목도 양주의 노래 <양주만>이라고 했다. 오직 양주를 위해서 만든, 양주에 바치는 노래이다.

 

회남의 유명 도시 양주 淮左名都,
아름다운 이곳의 죽서정에 竹西佳處,
말안장 풀어놓고 잠시 멈춰 쉬어간다 解鞍少駐初程.
지나쳐 온 춘풍십리 길은 過春風十里,
온통 냉이와 보리로 푸릇푸릇 盡薺麥靑靑.
오랑캐가 강을 건너 쳐들어온 후 自胡馬窺江去後,
허물어진 연못가엔 나무만 남았으니 廢池喬木,
전쟁은 말조차 꺼내기 싫구나 猶厭言兵.
점점 황혼은 짙어지고 차가운 호각 소리는 漸黃昏淸角吹寒,
텅 빈 성안을 맴돈다 都在空城.

 

 

패망한 도시에 바치는 노래

  강기는 선지사 옆의 죽서정이라는 정자에 말을 매어 놓고 이 곳을 둘러보았다. 춘풍십리는 두목(杜牧)의 시 구절인 ‘춘풍십리양주로(春風十里揚州路)’를 인용한 것이다. 양주하면 익히 들었던 이 구절이 저절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두목 이후 약 350년이 지난 양주에는 금(金)나라가 침략해 왔다. 금이 양주로 처음 남침한 것은 1129년이었다. 그 후에 1161년과 1164년에 연달아 남침했고 금과 송의 전쟁은 회남 지역에서도 치열했다. 이제 주민들은 전쟁이라면 입도 뻥긋하기 싫을 만큼 진저리가 났다. 죽서정은 그대로지만 옆의 연못은 폐허처럼 허물어지고 나무만 남아 있다. 해는 저물어 가고 호각 소리는 차갑다. 한겨울 성을 채우는 차가운 호각 소리. 이것이 강기의 눈에 비친 양주이다.

 

[사진1] 양주 전경

 

  당대에 번성했던 경제도시 양주는 송대가 되자 그 세월만큼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운하의 핵심지에서 운하의 주변 도시가 되어버렸다. 생산력이 저하되어 산물도 풍부하지 않았고 더 이상 풍요를 상징하지도 못하면서 점차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기록에 따르면 강기가 이 작품을 쓰기 5-6년 전에 양주의 토지는 이미 40만 무(畝) 이상이 황폐해져서 농지 면적이 대폭 줄어들었다. 경제력은 급락했고 전쟁으로 함락되자 도시는 쓸쓸함을 넘어 쇠퇴와 황폐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송사는 유행가이다. 따라서 대중가요의 정수인 쉬운 내용과 공감을 담아낸다. 대부분 상하 두 편(片)으로 구성되는데 지금으로 하자면 상편은 1절에 하편은 2절에 해당한다. 위 부분이 상편인데, 주된 정서는 서문과 비슷하다. 쓸쓸하고 차갑다. 강기의 눈에는 양주의 현재가 보였지만 마음에는 양주의 과거가 떠올랐다.

 

두목이 양주를 좋아했지만 杜郞俊賞,
지금 다시 온다면 놀라겠지 算而今重到須驚.
꽃놀이에 취해서 쓴 시가 뛰어났고 縱豆蔲詞工,
청루의 밤도 꿈처럼 좋았지만 靑樓夢好,
그 즐거움 이제는 노래하기 어려워졌네 難賦深情.
이십사교는 여전하고 二十四橋仍在,
물결은 출렁이고 차가운 달은 소리도 없네 波心蕩冷月無聲.
다리 옆 작약을 생각해보니 念橋邊紅藥,
해마다 누구를 위해 아름다움을 꽃피우나 年年知爲誰生.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

  하편은 두목으로 시작한다. 가히 양주의 시인이라 할 두목이 지금 살아 돌아온다 해도 더 이상 그 시절의 꿈과 즐거움은 없을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고 상황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한 것도 있다. 이십사교와 그 밑을 흐르는 강물과 달과 꽃은 그대로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두목의 그때와 같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전쟁과 쇠망, 사람과 역사는 달라졌다. 서문에서 천암노인이 말한 서리(黍離)의 슬픔이 이것이다. 서리는 『시경(詩經)』의 노래인데, 화려했던 옛 궁전의 터에 지금은 기장만 무성하다는 내용이다. 흥성과 쇠망의 교체를 탄식하여 서리지탄(黍離之歎)이라고도 한다.

  이 노래에는 앞 회에서 본 두목과 이상은(李商隱) 작품의 흔적이 모두 담겨있다. 두목은 물론이고 이상은이 <수나라 궁궐>에서 양제(煬帝)의 사치와 패망을 얘기했듯이, 강기도 이민족에게 침략당한 양주의 쇠락을 노래했다. 청년 강기가 목격한 것은 금나라 군대의 침략 앞에 날로 무력해지는 송의 미래는 아니었을까. 송은 금 그리고 북방에서 세력을 키운 몽골과 한동안 대립했지만 몽골이 중국 땅을 지배하면서 결국 패망했다. 양주의 처지를 보여주는 이 노래는 결국 강기가 양주에 바친 헌사(獻辭) 혹은 애사(哀辭)가 되었다.

 

[사진2] 양주팔괴 기념관

 

  송대 이후에 큰 변화 없던 양주는 청대에 다시 부흥했다. 청대 중기에 양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여덟 명의 화가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양주팔괴(揚州八怪)라고 한다. 양주라는 이름이 사람들 입에 다시 오르내리게 되었다. 양주는 시대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수 양제가 좋아했던 도시에서 경제도시로 떠올랐다가 쇠망의 도시로 내려앉았다가 다시 예술의 도시로 거듭났다. 이런 과정을 보면 운명이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도시에도 분명 운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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