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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도시와 시] 양양(襄陽)(2)

 

  맹호연(맹호연, 689-740)은 양양의 녹문산(鹿門山)에서 살았다. 젊은 시절부터 줄곧 여기서 살았고, 장안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고 관직을 구했다가 실패한 후에도 역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생애 대부분을 양양에서, 녹문산의 자연에서 보냈다.

  맹호연은 양양에 가면 항상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당시의 문인들이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던 것에 비해서 맹호연은 줄곧 고향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간혹 약속 없이 왔다가 허탕치고 돌아가기도 했지만,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대체로는 만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양양의 지리적 위치이다. 양양은 장강 중류에 자리한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장강을 따라서 전국 각지로 이동하는 중에 지류인 한수(漢水) 근처의 양양은 방문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이백이 본 맹호연

  은자처럼 살았던 맹호연의 생활은 어땠을까. 세상의 경쟁과 욕망에서 벗어나서 자연에서 사는 삶이란, 마음은 자유롭지만 일상은 다소 외롭고 쓸쓸해지기가 쉽다. 그런데 맹호연의 은거생활은 고립되거나 적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왕유(王維), 이백(李白), 장구령(張九齡), 장열(張說), 왕창령(王昌齡), 두보(杜甫) 등과 가까이 지냈고, 그들은 맹호연을 보러 양양으로 왔다. 그 중에서 이백은 맹호연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맹호연에게 주는 시(贈孟浩然)> 이백(李白)

 

나는 맹호연을 좋아한다, 吾愛孟夫子,
그의 풍류는 천하에 유명하지. 風流天下聞.
젊은 날에 수레와 면류관을 버리고, 紅顔棄軒冕,
벼슬 없이 청송과 백운에 은거했다. 白首卧松雲.
달에 취해서 자주 맑은 술에 취하고, 醉月频中聖,
꽃에 빠져서 임금을 섬기러 나가지 않네. 迷花不事君.
높은 산 같은 그를 어찌 따를 수 있으리, 高山安可仰,
그저 이렇게 고결한 향기를 우러를 뿐. 徒此揖清芬.

 

  시는 ‘나는 맹호연이 좋다’로 시작한다. 정확하게는 맹부자(孟夫子)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부자(夫子)라는 호칭으로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다. 짧지만 담백하고 거침없는 고백은 장황한 수식어보다 강력하다. 이백이 맹호연을 좋아한 것은 아마도 그의 풍류, 즉 멋스러움 때문인 듯하다. 그는 젊어서부터 수레와 면류관을 버렸다. 수레와 면류관은 관직을 뜻한다. 대신에 달과 술과 꽃을 가까이했고, 관직을 하거나 임금을 모시러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맹호연은 마치 높은 산과 같은 존재이니, 나 이백과 같은 사람은 오를 수 없는 경지이다. 그저 그 산 아래에서 그의 아름다운 인품을 우러러보기만 할 뿐이다.

 

[그림1] 이백의 시 <贈孟浩然>

 

 

자연을 즐기는 풍류남아

  이백은 이 시를 20대에 썼다. 그는 25세부터 약 9년간 호북성(湖北省) 안륙(安陸)에서 살았는데, 이 때 양양을 오가면서 맹호연과 가까이 지냈다. 이백은 24살까지 고향인 사천성(四川省)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보통 10대 중후반에 고향을 떠나 각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사람들과 사귀었던 당시의 관례에 비추어보면 늦은 시작이었다.

  이제 막 세상경험에 나선 이백이 자신보다 나이가 12살 많은 맹호연을 어떻게 보았는지 이 시는 보여준다. 세속의 기준 따위는 가볍게 초월하며 자유롭고 고고하게 풍류로 천하에 이름을 날린 사람. 평생 자유와 낭만을 품고 살았던 이백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이것이면 충분했다. 이백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바로 이 점 때문에 맹호연을 좋아하고 따랐다. 그렇다면 친구들이 보는 맹호연이 아니라, 맹호연 자신이 보는 그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다음 화에서 다루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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