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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도시와 시] 양주(揚州)(1)

 

  당대(唐代)에는 크게 번성했던 도시들이 몇몇 있었다. 수도 장안(長安)은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 낙양(洛陽)은 제2의 수도로서 명성을 누렸고, 다른 도시들도 인적·물적·문화적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중에서 양주는 당대에 들어서 급부상한 곳 중 대표적인 도시였다. 양주는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강도현(江都縣)의 서남쪽에 있다.

 

 

양주(揚州), 운하가 낳은 도시

  양주는 기원전 486년에 건립된 역사가 오래된 곳인데, 고대에는 광릉(廣陵), 강도(江都), 유양(維揚)으로 불렸고 당대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주로 명칭이 바뀌었다. 평범한 곳이었던 양주는 수(隋)나라 때 대운하 건설과 함께 교통의 요충지이자 물류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알다시피 중국은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이어서 강들이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서 흘러간다. 중국 문명이 시작된 황하도 동쪽으로 흘러가고, 풍부한 수량으로 중국 영토를 적시며 곳곳에 옥토를 만든 중국에서 가장 긴 강인 양자강도 동쪽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서에서 동으로 수상 이동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남북을 관통하는 큰 강이 없었기에 예로부터 남북 간 이동이 쉽지 않았는데,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한 사람이 수(隋) 양제(煬帝)였다.

  고구려 정벌을 꿈꾸었던 양제는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서 양자강에서 황하에 이르는 운하를 건설했고, 이를 기초로 명대(明代)에는 징항(京杭) 대운하가 완성되었다. 징항 대운하는 북경(北京)에서 항주(杭州)를 잇는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이다. 물론 현재는 이 중 일부 구간을 운행하지는 않기 때문에 전 구간을 뱃길로 이동할 수는 없다.

  고구려와 전쟁에서 패배하고 대운하 건설로 막대한 국비를 쏟아부은 수나라는 멸망했지만, 운하는 남아서 남북을 잇는 교통로가 되었다. 대운하가 지나는 여러 도시 가운데 양주는 대운하와 장강이 만나는 곳, 즉 동서와 남북의 물길이 만나는 곳이었고, 강남 지역에서 올라온 물류를 집결시켰다가 수도인 장안과 낙양으로 보내는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그림1] 양주와 운하

 

 

풍요와 오락의 상업도시

  남북과 동서가 만나는 지리적 이점을 갖춘 도시 양주에는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었고 돈도 자연스럽게 들어오면서 번화한 도시가 되었다. 풍요로운 경제도시는 오락과 유흥이 넘쳐나기 마련이다. 시인 두목(杜牧 803-853)은 이 도시의 유흥을 즐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두목은 30세 때 양주에 관리로 부임해서 2년간 이곳에서 생활했는데, 그는 이 도시에 애정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양주에 도착해서 느낀 첫인상부터 수없이 드나들었던 유흥가에서의 추억을 시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양주를 떠난 이후에도 양주 시절을 추억하는 작품을 남겼다. 기록을 보면 양주 임기 동안 두목은 화려한 도시 생활을 적극적으로 즐겼다. 그중에서 <증별(贈別)> 2수는 두목이 양주를 떠나 장안으로 가게 되자 그동안 알고 지냈던 기녀에게 준 이별시이다.

 

<증별> 1

어여쁘고 가녀린 열 서너 살 娉娉褭褭十三餘,

두구화 꽃망울이 나무가지 끝에 이월 초에 맺힌 듯 荳蔻梢頭二月初.

봄바람 부는 양주의 십 리 길 春風十里揚州路,

주렴 걷고 보아도 모두 너만 못하구나 卷上珠簾總不如.

 

  이 시는 기녀의 미모를 칭찬하고 있다. 1~2구는 두구화(荳蔻花)가 겨울을 이겨내고 이월 초에 이제 막 가지 끝에서 봉우리를 맺고 아직 개화하기 전의 모습을 묘사했는데, 이것은 당시에 13~14세의 여성을 비유한 표현으로 ‘豆蔲年華(두구년화)’라고 불렀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꽃에 비유하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그림2] 두구화

 

  그리고 십리의 양주 길에 부는 봄바람이란, 번성한 경제도시 양주에 즐비했던 기루(妓樓)가 십 리나 된다는 말이다. 그 수많은 기루에 미녀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주렴을 걷어 올려 긴긴 십리 길을 살펴보아도 너만큼 예쁜 기녀는 없다는 미모 칭찬으로 시를 끝맺었다. 이별시이지만 석별의 정은 드러나지 않고, 꽃과 양주와 미녀의 이미지만 드러났다.

 

<증별> 2

다정했던 사람이 되려 무정한 사람처럼 多情卻似總無情,

술잔을 앞에 두고도 웃지 못한다는 말 뜻을 알겠네 唯覺尊前笑不成.

촛불도 마음이 있어서 이별을 슬퍼하여 蠟燭有心還惜別,

사람을 대신해 날이 밝을 때까지 눈물 흘리고 있구나 替人垂淚到天明.

 

  이별의 심정은 두 번째 시에서 비로소 드러났다. 평소에는 다정했던 사람인데 이별을 앞둔 상황에서는 무정한 듯 말도 없고 어색하며, 이별주를 마주하고 앉았지만 아쉬운 마음에 웃을 수 없는 상황이다. 켜놓은 촛불은 이별의 당사자 두 사람을 대신해서 날이 밝을 때까지 촛농을 눈물처럼 흘린다. 당시에는 관리가 부임지에서 기녀와 사귀다가 떠나는 일은 흔한 애정사였고 또한 훗날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슬픔이 깊지도 애절하지도 않고 표현도 함축적이지 않다. 보이는 그대로 읽히는 시이다. 두목이 기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엿보인다. 반면에 기녀의 입장에서 시를 썼다면 어떤 작품이 나왔을지도 궁금해진다.

 

 

도시, 향락 그리고 두목

  한편 두목의 상사였던 우승유(牛僧孺)가 양주를 떠날 준비를 하는 두목을 불렀다. 이별을 앞두고 우승유는 당부의 말을 했다.

 

자네는 능력이 뛰어나니 앞으로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러나 행동에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네.”

저는 여태껏 행동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우승유는 웃으면서 작은 상자를 건넸고, 두목은 상자를 열어보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상자에는 양주에 부임해 온 이후 두목의 화려했던 향락 생활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언제 어느 기루에 출입했는지가 날짜별로 상세하게 적혀있는 것을 보고 두목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목을 아끼던 우승유는 두목이 유독 유흥을 즐기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혹시 술에 취해서 안전상의 문제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두목의 앞날에 지장이 있을까 염려해서 매일 밤 사람을 붙여서 두목을 몰래 따라다니면서 지켜보라고 시켰던 것이다. 상사의 관심과 배려에 두목은 감사와 미안함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두목은 그 후에 유흥을 줄이고 행동을 조심했을까. 장안으로 떠난 이후의 기록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두목은 성향 자체가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번화한 양주를 거침없이 즐긴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두목의 <증별>은 다소 평범한 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두목과 양주를 대표하는 시가 된 것은 양주의 향락을 만끽했던 시인의 흔적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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