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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국민성’ 담론의 성립 ― 루쉰과 『지나인 기질』의 관계를 중심으로(10)

 

 

국민성’ 담론의 성립 ― 루쉰과 『지나인 기질』의 관계를 중심으로(10)
(“國民性話語的建構以魯迅與『支那人氣質』之關係為中心)

 

 

 

리둥무(李冬木)
*李冬木 著, 『越境―“魯迅”之誕生』, 杭州: 浙江古籍出版社, 2023, 295-483.

 

 

  (5) 『청일전쟁실기』와 『지나인 기질』의 상호 인용 및 이후의 번역본

  상술한 출판 상황을 소개하는 목적은 두 가지로, 하나는 『지나인 기질』의 출판 배경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필자가 조사하면서 상술한 출판물 사이에 상응하는 내적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주씨 형제의 당시 독서와 더 나아가 중국의 독서인과도 모종의 확장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나인 기질』이 메이지 29년(1896) 출간된 데에는 전쟁 배경이 있음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전쟁 및 중국 관련 출판물 가운데 분명히 나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단행본으로 출판되기 전부터 하쿠분칸의 베스트셀러 잡지에 ‘지나인 기질’이라는 총 제목으로 부분 연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재 잡지는 바로 위에서 소개한 『청일전쟁실기』이다. 역자가 ‘경재주인’(絅齋主人)이라고 서명된 것을 보면 이후 단행본에 적힌 ‘우카 시부에 다모쓰’(羽化涩江保)’와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연재 제목, 호수, 발행일자 및 각 잡지의 페이지 번호는 다음과 같다.

 

『지나인 기질』(1), “역자의 말”(譯者識), “지나인의 무신경”(支那人の無神經の事), 제31편, 1895년 6월 27일 발행, 63-66쪽.

『지나인 기질』(2), “지나인의 보수주의”(支那人の保守主義), 제32편, 1895년 7월 7일 발행, 65-67쪽.

『지나인 기질』(3), “동정심 결핍”(同感の缺乏せる事》), 제33편, 1895년 7월 17일 발행, 72-76쪽.

『지나인 기질』(4), “서로 의심하다”(互の猜疑), 제35편, 1895년 8월 7일 발행, 72-76쪽.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연재는 1895년 6월 27일 발행된 제31편부터 시작된다. 이 기부터 시작해 잡지에 변화가 생겼다. 권두 광고의 표제는 “본지의 일대 개량”으로 “본지는 이번 편부터 기사 면모를 일신했고 본지는 제50편으로 완결된다”고 했다. 이 잡지가 제50편으로 종간됨을 예고한 것 외에, 소위 “일대 개량”의 부분 내용은 일부 기사란의 변화에 반영되었다.

 

  ‘전쟁실기’(戰爭實記) 본란은 과거의 관례를 따르되 전쟁 통신을 더 늘린다. 다음으로 ‘훈공미담’(勳功美談) 난을 두어 과거 사전(史傳) 및 군인 일화 두 개의 난을 망라한다. 그 다음은 ‘전쟁문학’(戰爭文學)으로 이 난은 과거 ‘문원’(文苑)이라 했고 고금의 전쟁과 관련된 각종 글과 시를 차차 수록할 것이다. 그 다음은 ‘동양풍토’(東洋風土)라 하여, 과거의 ‘지리’(地理)를 답습하지만 그 규모를 더욱 확장하여, 일⋅청⋅한 3국은 물론 북으로 러시아 영토의 블라디보스토크, 남으로 남양 제도의 지리, 풍토, 인정, 국세까지 상세히 기술하여 동양의 형국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개량’은 사실상 전쟁이 끝났음을 의미하며, ‘전쟁실기’를 본업으로 하는 잡지는 내용상의 조정에 직면하게 되고, 일부 전장 밖의 내용이 잡지에 채워지게 된다. 따라서 『지나인 기질』의 4회 연재는 이런 조정 성격의 ‘개량’ 필요성에 부응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4기 모두 ‘동양풍토’라고 신설된 기사란 아래에 실렸기에 이 난이 가져온 새로운 내용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실기』와 『지나인 기질』 양자 사이 수용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정반대의 경우도 있어, 『청일전쟁실기』 가운데 중국에 관한 일부 기사도 나중에 출판된 『지나인 기질』 단행본에 주석으로 실리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있는 ‘비원본 내용’(非原本內容) 부분에서 집중 정리하려 하여, 간단히 설명하자면 단행본에 주석으로 실린 부분이 4군데로, 잡지에서 역시 ‘동양풍토’ 난의 내용들로 전쟁과 직접 관련이 없고, 궁중소문, 생활습관, 시가건축 등의 사항들로 전체적으로 단행본 번역본의 성격과 기질에 대한 주제와 잘 녹아 있다. 단행본에 이런 내용이 ‘주석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위에서 언급한 『청일전쟁실기』의 내용상 조정과 직결된다. 이 잡지는 말 그대로 탄생 계기와 주제가 바로 ‘전쟁’으로 ‘전쟁’이 이 잡지의 ‘본란’이지만 전쟁이 변하면서 ‘본란’ 가운데 칼을 뽑고 활을 당기는 내용 외에 잡지의 중심이 전쟁에 대한 관심과 보도로부터 점차 교전국의 ‘지리, 풍토, 인정, 국세’ 등으로 옮겨갔고, 후반기 『청일전쟁실기』에서 이에 상응하여 ‘지나’의 풍속문화와 생활 동태에 대한 내용도 추가됐다. 사실상 이들 내용은 교전 상대였던 청나라의 생활과 문화 실태에 대한 당시 일본 언론(즉, 당시의 일반 지식계)의 인식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었고 일본 일반 국민의 중국관에도 영향을 주었다.

  『지나인 기질』이 이런 내용과 동질적이라는 점에서 『지나인 기질』의 출판이 전쟁을 배경으로 했음은 분명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전사 및 전쟁 도서’라는 일반적 유행을 좇는다고 말할 수는 없어 좀더 심층적인 문화적 성격을 띠고 있다. ‘지나인’으로 설명하고 있는 바는 어떤 정신적 특성을 가진 ‘국민’의 문제이기에 다른 전쟁 도서에서는 폭넓게 다룰 수 없고 깊이 파고들 수도 없는 내용이다. 생각건대 바로 이런 이유로 루쉰이 훗날 국민적 문제를 고민할 때 참고할 수 있었다고 본다. 장멍양이 중역본 「역자 후기」에서 언급한 『지나인 기질』이 일본에서 “출판되자마자 유행했다”는 정황에 대해서는 아직 입증할 자료를 보지 못했다. 루쉰이 야스오카 히데오의 『소설로부터 지나 민족성을 보다』를 지적하며 “Smith의 Chinese Characteristics를 매우 믿어 종종 전거로 인용하는 것 같다”고 했지만 이는 훗날의 일이다. 당시엔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전쟁 자체에 쏠려 있을 때라 일역본이 과연 얼마나 많은 독자를 가질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6) 루쉰과 시부에 다모쓰의 접점

  그렇다면 루쉰은 도대체 언제 시부에 다모쓰의 『지나인 기질』을 읽었을까?

  탕타오(唐弢)는 비교적 폭넓은 시간 개념을 사용했으니 곧 ‘젊은 시절’(年輕時)이다. 쉬서우상이 회고록에서 그가 루쉰과 국민성에 관해 논의한 내용을 근거로 하여 장멍양은 다음과 같이 단정했다. “루쉰이 1902년 도쿄 고분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스미스의 『중국인 기질』을 이미 자세히 읽었으니 당연히 시부에 다모쓰의 번역본이지 영어 원본이 아니다.” 두 사람 말이 모두 이치에 맞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1902년으로 따지면 시부에 다모쓰 번역본이 나온 지 6년 가까이 지난 시간이기 때문에 이 책이 재판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읽는 시간을 뒤로 옮길 경우 구입에 장애가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1902년 일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루쉰의 일본어 수준을 감안할 때, 『지나인 기질』을 읽기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이 있었을 것이다. 내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루쉰이 이 책을 세세히 읽고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1906년, 즉 그가 ‘기의종문’하고 센다이에서 도쿄로 돌아온 이후일 것이다. 이 시기 루쉰의 일본어 수준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고, 더 중요하게는 루쉰이 그 후 쓴 몇 편의 글에서 일역본과 같거나 비슷한 표현이 나와 있어 전자를 흡수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필자는 뒷부분의 텍스트 비교에서 구체적으로 전개할 생각이다. 여기서 루쉰의 일역본 읽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한 가지 문제를 분석하려 한다. 즉, 루쉰이 일역본을 읽은 구체적인 시기와 그의 ‘국민성 발상’의 생성 계기를 잠시 다른 문제로 생각해 보는 것이 문제를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시부에 다모쓰의 일역본과 루쉰의 ‘국민성 발상’ 사이 깊은 내적 연계를 논하는 것이 논의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이 대전제 아래 반드시 일역본의 전부 또는 최대의 의미가 루쉰이 국민성을 사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그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지만). 일역본과 루쉰 사이에는 ‘계기’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루쉰이 ‘국민성 개조’를 사고하게 만든 요인은 다방면에 걸쳐 있었을 텐데, 「외침⋅자서」와 「후지노 선생」 등에서 고백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센다이에서 경험한 ‘환등기 사건’이다. 하지만 ‘개조’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전에 우선 ‘지식’으로서의 ‘국민성’이라는 개념 체계라는 전제가 필요하니 이것이 바로 본 논의가 말하는 ‘국민성 발상’의 문제이다. 그 발상을 가능케 한 수많은 계기 요소 가운데 시부에 다모쓰의 번역본이 유일하게 고려해야 할 대상은 아닐 것이다. 보다 더 직접적인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소개한 기타오카 마사코는 고분학원 ‘청강생’이었던 양두와 가노우 지고로 교장이 벌인 국민성과 교육의 관계에 대한 토론이 루쉰과 쉬서우상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사했는데, 이는 아주 좋은 ‘계기’ 연구이자 매우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루쉰이 『지나인 기질』을 언제 읽었는지는 ‘계기’ 층면으로 보자면 그리 중요치 않고 잠시 접어둬도 괜찮으니, 루쉰이 『지나인 기질』과 조우했던 관련 정황을 먼저 살펴봐야겠다.

  저우쭤런의 초기 일기 가운데 기재된 독서 내용을 보면 신서, 외국서, 특히 일본 책이 빈번하게 출현하여, 1902년, 즉 루쉰이 일본으로 떠나 유학을 하기 전후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 당시 독서계에서 대량으로 일본 책을 번역한 분위기와 일치한다. 보존이 상대적으로 완정한 1902년 1월부터 1903년 4월까지 일기를 보면 저우쭤런이 기록한 당시 반복해서 읽었던 수많은 일본 책 가운데 적어도 두 권이 확실히 하쿠분칸의 출판물이다. 하나는 『누란 동양』(累卵の東洋)이고 다른 하나는 『폴란드쇠망전사』(波蘭衰亡戰史)이다. 전자는 정치소설에 속하니 작자는 곧 “메이지 문인 기억 속의 하쿠분칸”에서 소개한 오하시 오토와이다. 이 책은 두 가지 판본이 있어 하나는 하쿠분칸에서 1898년 10월 출판된 단행본이고 다른 하나는 도쿄도(東京堂)에서 같은 해 11월 출판된 단행본이다. 도쿄도는 원래 하쿠분칸 주인 오하시 사헤이가 1890년 문을 연 소매점으로, 뒤에 대리 판매와 도서 출판으로 들어갔으나 하쿠분칸의 분점이었기에 판권 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우쭤런이 읽은 것은 일어본이 아니라 당시 출판된 중역본으로 이 역본은 1901년 5월 ‘인쇄소애선사’(印刷所愛善社)에서 출판되었고 역자는 유야쯔(憂亞子)이다. 루쉰이 일본으로 간 지 얼마 안 되어 저우쭤런이 이 책을 구입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읽다 말다 하며 ‘유야쯔’라는 사람의 번역이 좋지 않다고 여겨 “번역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후자인 『폴란드쇠망전사』의 경우는 좀 다르다.

  저우쭤런이 1902년 음력 ‘정월 삼십일’(3월 9일)에 적었다.

 

  ······ 오전에 작은 할아버지와 보성(伯升) 아저씨가 갑자기 찾아오셔서 매우 기뻤고 할아버지의 당부와 함께 『삼국지』, 『전한서』, 『계사유고』(癸巳類稿) 등의 책을 받다. 큰형이 편지와 함께 작은 솜저고리 한 벌과 큰 바구니 하나, 소금 한 병을 보내오다. 바깥에 책도 묶어두다. 열어보니 대일본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의 『물경론』(物競論), 시부에 다모쓰의 『폴란드쇠망전사』 각 1권씩 모두 양장본으로 매우 기쁘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原富) 갑, 을, 병, 세 권 역시 훌륭하니 모두 새로 얻은 책이다. ······

 

  여기에 시부에 다모쓰의 이름과 그의 편저 『폴란드쇠망전사』가 나온다. 일본에 가기 전 샤오싱으로 가족을 보러 돌아온 루쉰은 떠나기 보름 전에 이 책을 『물경론』과 『국부론』과 함께 저우쭈런에게 보냈다. 그렇다면 루쉰이 유학가기 전 이미 ‘시부에 다모쓰’를 접했고 『폴란드쇠망전사』(그리고 가토 히로유키의 『물경론』)도 역시 ‘루쉰목도서목’(魯迅目睹書目)에 들어가야 맞다. 그리고 반드시 더불어 언급해야 할 것은 위에 일기 가운데 기록한 『국부론』은 옌푸(嚴復)의 번역본으로 단정할 수 있다. 『물경론』은 가토 히로유키 원작의 중역본으로 역자는 양인항(楊蔭杭)이고 처음엔 『역서휘편』(譯書彙編) 1901년 제4기, 제5기, 제8기에 연재되었으니 저우씨 형제가 그 해 본 ‘양장’본은 필시 역서휘편사(譯書彙編社)에서 1901년 출판한 단행본의 제1판 혹은 제2판일 것이다.

  루쉰이 『폴란드쇠망전사』를 읽었을 때 어떤 감상이 있었는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지만, 훗날 저우쭤런과 함께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 약소국과 민족의 문학을 힘써 소개한 상황을 보건대 이 책과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저우쭤런이 이 책을 읽은 정황 역시 참고할 만하여 같은 해 음력 2월 ‘초칠일’(3월 16일)에 적었다. “오전에 대일본 시부에 다모쓰 선생의 『폴란드쇠망전사』를 다 읽었다.” 음력 3월 ‘십칠일’(4월 26일)에 적었다. “오후에 『폴란드쇠망전사』를 보았는데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거듭 탄식이 나왔다.”

  읽고 나서 금방 다시 읽게 만드는 책은 사람을 “읽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거듭 탄식이 나오도록” 만드는 내용일 것이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책의 내용 때문에 루쉰이 ‘시부에 다모쓰’란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을까? 더불어 일본에서 책을 구매하는 시야가 이 이름과 관련있는 다른 서적으로 향하게 되었을까? 만약 이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시부에 다모쓰 본인과 그의 저술 상황 역시 회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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