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성’ 담론의 성립 ― 루쉰과 『지나인 기질』의 관계를 중심으로(5)
(“國民性”話語的建構―以魯迅與『支那人氣質』之關係為中心)
리둥무(李冬木)
*李冬木 著, 『越境―“魯迅”之誕生』, 杭州: 浙江古籍出版社, 2023, 295-483.
(4) 쉬서우상 문제 이후 연구 발전
쉬서우상의 회고를 전제로 하여 루쉰의 ‘국민성’ 문제를 탐구하는 연구는 매우 많지만, 절대다수가 중복되고 대다수가 ‘국민성’을 사고하는 와중에 ‘출발점’ 문제를 국민성 사상 자체와 혼동하여 실질적 성과가 부족했다. 예를 들어, 만약 한 발짝 더 나아가 질문하면, 무엇이 과연 그 당시 루쉰과 쉬서우상이 ‘국민성’ 문제에 관해 토론을 벌이도록 만들었을까? 이런 기본적인 문제는 이제까지 나온 연구에서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기타오카 마사코가 ‘다른 의견’을 통해 근본부터 뜯어고친 후 ‘루쉰과 쉬서우상의 국민성 토론’을 ‘이끌어 낸’ 연구에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기타오카 마사코는 일 년 내내 세밀한 연구 조사를 거쳐 루쉰과 쉬서우상이 고분학원 당시 국민성 문제에 관해 벌인 토론이 사실 그들이 수학하던 시절 교장 가노우 지고로(嘉納治五郞, 1860-1938)와 고분학원에서 같이 유학하던 선배 ‘공생’(貢生) 양두(楊度, 1875-1931)가 ‘지나 교육 문제’에 관해 토론한 ‘여파’의 산물임을 밝혀냈다. 이는 ‘루쉰과 쉬서우상’ 두 사람의 토론을 역사 현장으로 되돌린 최초 작업이며, 이로부터 루쉰 국민성 문제 의식의 생산이 구체적인 환경과 맞닿을 수 있었다. 이는 쉬서우상 문제 이후 중요 성과 가운데 하나이다.
‘국민성’ 문제 의식은 당시에 시대 공유성이 매우 커서 어느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 하나의 이념으로 상승할 수 있고 아주 많은 복잡한 촉진 요인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량치차오의 ‘신민설’과 그로부터 일어난 사상계와 루쉰 국민성 개조 사상의 생성 관계는 아주 큰 문제이다. 그러나 문제 의식과 이념은 하나의 방면에서 그렇고 그것이 조정의 층위에서 실현될 때, 즉 창작으로 녹아 들어갈 때 만약 구체적 현실 체험과 풍부한 독서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다른 문제 하나가 파생되니, 바로 ‘국민성’에 대한 관찰 의식을 무엇이 배양했고 루쉰의 진일보한 사고를 무엇이 촉진했으며 그의 사고에 참고할 수 있는 관찰 시각과 창작 소재를 제공한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루쉰은 『아Q정전』 성공 이후 자신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처럼 침묵에 잠긴 국민의 영혼을 그려 내는 일은 중국에서 참으로 지난하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우리는 끝끝내 혁신을 겪지 않은 낡은 나라의 인민이기에 여전히 통하지 않는 데다가, 자신의 손조차도 자신의 발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온 힘을 다해 사람들의 영혼을 찾으려 했지만, 줄곧 동떨어진 점이 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이 단락에서 흘러나오는 고충은 연구자들에게 별반 주의를 끌지 못했다. 사람들이 생각하길, 루쉰이 중국인이라 중국인에 대해 자연히 이해가 있으며, 게다가 ‘루쉰’이기에 『아Q정전』과 같이 국민 영혼을 분석한 작품을 써낼 수 있음은 아주 당연한 일이고,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식인’의 고사를 모르는 중국 사람들이 없으니, ‘루쉰’은 당연히 말할 나위도 없고, 그래서 ‘깨달음’과 같은 격정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루쉰의 이 말은 그와 자기 동포인 ‘고국 인민’ 사이의 ‘거리’를 말하고 있고, 자신의 창작을 ‘인민의 영혼을 탐색’하는 작품으로 보아 ‘손’과 ‘발’ 사이의 이해와 소통을 추구하는 실천 행위이다. 이와 같은 사고와 관조의 시야 아래 중국 국민성에 대한 기술은 독서 흥미를 낳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관찰 대상이 되었으니 아주 당연한 순서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선교사 아더 스미스의 저작 『중국인 기질』(Chinese Characteristics)은 그중 하나이다. 루쉰의 문장에서 이 책이 네 번 언급됐고 시간 순서대로 배열하면 각각 다음과 같다.
① 1926년 7월, 「화개집속편⋅마상일기 속편(7월 2일)」(華蓋集續編⋅馬上支日記[7月2日])
② 1933년 10월 27일, 「타오항더에게 보내는 편지」(致陶亢德信)
③ 1935년 3월, 「차개정잡문이집⋅우치야마 간조의 『살아있는 중국의 자태』 서문」(且介亭雜文二集⋅內山完造作『活中國的姿態』序)
④ 1936년 10월, 「차개정잡문말편⋅“립차존조”(3)」(且介亭雜文末編⋅“立此存照”[三])
루쉰의 의견을 종합하자면, 그가 생각하기에 이 책이 중국인의 특성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했고 메이지 이래 일본인의 중국관에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의 약점을 공격하는 면에서 “일본인이 지은 것보다 훌륭하기에” 번역해서 중국인에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으로 이 책을 언급했을 때는 그가 죽기 전 일주일쯤이지만 중국인에게 이 책을 추천하길 잊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금도 누군가 스미스의 『지나인 기질』을 번역해 내길 희망한다.” 이 책과 루쉰의 관계가 깊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루쉰과 스미스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고 문제를 발전시켜 연구한 연구자가 나오게 된 것은 루쉰 사후 40여 년이 흐른 뒤이다.
루쉰이 스미스를 논한 사실은 쑨위스(孫玉石)가 1979년 발표한 논문에서 가장 먼저 보여, 제목이 「루쉰의 국민성 개조 사상 문제의 고찰」(魯迅改造國民性思想問題的考察)로 겨우 한 구절에 그친다. “루쉰이 여러 차례 언급한 미국 선교사 스미스(A. H. Smith)는 중국에서 50년을 거주했고 『중국인의 기질』을 적어 중국의 ‘민족성’을 멸시하고 지극히 악의적인 영향을 미쳤다.” ‘루쉰과 스미스’의 관계를 진정으로 문제 삼아 제기하고 발전된 논의를 펼친 것으로 말하자면 그다음 해에 발표된 장멍양(張夢陽)의 「루쉰과 스미스의 『중국인 기질』」(魯迅與斯密斯的『中國人氣質』)이 있다. 이 논문의 수정본은 1983년 1월 『루쉰연구자료』(魯迅硏究資料) 제11기에 발표되었다. 십수 년이 흐른 1995년 둔황문예출판사(敦煌文藝出版社)에서 장멍양과 왕리쥐안(王麗娟)이 스미스 영어 원저의 중역본을 공역하여 『중국인 기질』이라 제목을 달았다. 앞에는 탕다오(唐弢)의 서문이, 뒤에는 장멍양이 지은 2만여 자의 「번역 후기」(譯後評析)가 있다. 이는 이전 논문의 기초 위에 번역본을 결합하여 한층 더 세밀하고 충실한 결과물이고 또한 이 연구가 여러 저명 학자의 지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장멍양의 연구와 번역은 루쉰의 ‘국민성 개조’ 사상이 현실적 의의를 띠고 있음을 긍정하는 전제하에 이 사상이 형성되는 데 밀접한 관련을 맺는 ‘참고’가 되는 문제를 명확히 했으니, 이는 곧 루쉰이 “중국 국민성을 개조하는 허다한 중요 사상이 모두 『중국인 기질』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에 관해,” “루쉰이 20세기 초 일본 유학 시기 이 책을 열심히 읽었고 …… 이로부터 많은 타당한 의견을 참고했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후속 연구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쉬서우상 문제를 계승함에 있어 실질적인 진보를 선도했다. 필자가 2018년까지 살핀 불완정한 통계에 따르면 이후 발행된 『중국인 기질』의 중역본은 50여 종에 이르며 ‘국민성’ 문제 토론과 관련된 논문과 서적은 이보다 더 많다. 장멍양의 연구 논문과 번역, 장편 「번역 후기」가 당시와 이후 루쉰 연구 영역에 미친 창조적인 의의와 영향을 본다면 필자는 여기서 이를 일종의 ‘패러다임’으로 보며 연구사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로 여기는 바이다.
(5) 시부에 다모쓰 일역본 문제의 제기
장멍양은 ‘스미스와 루쉰’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스미스의 영어 원전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스미스와 루쉰’의 텍스트를 비교함으로써, ‘스미스와 루쉰’의 인식 패러다임을 확립했다. 그리고 이 인식 패러다임이 동서 관계를 주축으로 한 근대 문화론의 차원에 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소위 ‘서양과 동양’의 인식 구조로 확장된다. 장멍양 이후, 그가 제안한 ‘스미스와 루쉰’ = ‘서양과 동양’이라는 인식 구조는 무조건적으로 복제되어 이 주제를 탐구하기 위한 하나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다음 몇 가지 예를 보자.
갑. 쑨위(孫郁)의 『루쉰과 저우쭤런』(魯迅與周作人): “어느 외국 선교사와 어느 중국 계몽주의자가 같은 대상을 바라보며 비슷한 영적 시선을 보이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인류 문명사에서 감동적인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외국인이 우리의 선구자에게 계시를 주어 이역의 횃불을 밝혀 수천 년 역사의 기나긴 암흑기를 꿰뚫어 보게 했고, 그 후 그는 고난의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의 결단을 내려 고독하게 행진하여 마치 천사처럼 고된 바다, 가시덤불 속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뇌하고 투쟁하며 신념을 잃지 않았다. 문명사에서 이 얼마나 감격적인 장면이란 말인가! 스미스와 루쉰의 작품을 읽고 나면 문화 순교자의 위대함에 감동하게 될 것이다. 동서양 현자들의 사랑과 자비는 바로 이러한 만남 속에서 일종의 불멸과 영원으로 굳어진다.”
을. 리우허(劉禾) 저작 2종: “비록 스미스의 책으로 인해 국민성 이론이 중국인 가운데 전파된 여러 통로 가운데 하나일지라도 이는 공교롭게도 루쉰 국민성 사상의 주요 원천이 된다.”
병. 펑지차이(馮驥才)의 「루쉰의 공과 ‘과’」(魯迅的功“過”): 루쉰의 국민성 개조 사상 = 서구 식민 담론. 그의 글이 발표된 후 학계에서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루쉰 연구계의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이 논쟁의 주요 발언 중 일부는 “세기말”과 “세기초” 두 권의 논쟁집에 수록되었다. 이것은 학술 연구가 아니라 기껏해야 ‘사회 여론’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국민성’ 문제이며 ‘루쉰과 스미스’의 문제이자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등 문제가 외부화된 형태이다.
정. 판보췬(范伯群)과 사와타니 도시유키(澤谷敏行)의 「루쉰과 스미스, 야스오카 히데오(安岡秀夫)의 중국 민족성에 관한 발언 비교」(魯迅與斯密斯, 安岡秀夫關於中國國民性的言論之比較): 이 논문은 장멍양의 논문과 그 번역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지만, 관련 텍스트의 비교 범위와 영향 관계의 확장으로 보자면 앞의 경우를 넘어서고, 그 결과 루쉰 연구사에도 실렸다. 실상인즉 이 논문이 이룩한 더 큰 공헌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바로 야스오카 히데오의 ‘언론’ 부분을 처음으로 일본어 원문에서 직접 발췌하여, 원문을 통해 야스오카 히데오의 원작 내용을 재검토했을 뿐만 아니라, 원문을 근거로 루쉰의 야스오카 히데오 평가를 재검토하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중국 『루쉰 전집』의 주석가들’은 야스오카 히데오의 『소설로부터 지나 민족성을 보다』(從小說看來的支那民族性)를 “중화 민족을 비방하는 책”이라거나(『전집』 3권, 338쪽, 1991년 인민문학판본), “이 책은 중국 민족을 제멋대로 비방했다”라고 주석을 달았는데(『전집』 12권, 246쪽), 이는 “루쉰의 원래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문을 처리하는 면에서 이 논문 역시 아쉬운 점이 있으니, 바로 장멍양 논문이 설정한 ‘루쉰과 스미스’라는 틀 안에서 텍스트 패러다임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충분히 입수할 수 있었고 걸러낼 수 있었던 역사 사료, 일역본 ‘『지나인 기질』’이 또다시 대수롭지 않게 넘겨졌다는 점이다. 저자 가운데 한 명인 사와타니 도시유키는 그의 이른 시절 작성된 석사 논문의 ‘후기’에서 말하길, 1896년 시부에 다모쓰가 번역한 『지나인 기질』의 일역본을 구할 수 있었지만 언어가 너무 오래된 관계로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려 시라카미 도루(白神徹)의 1940년 번역본을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멍양과 왕리쥐안의 번역본이 출판되고 나서 느낀 바가 있어 “공백을 채우려했던 욕망이 크게 줄었다”고 자인했으니, 독자도 알다시피 논문이 공개적으로 발표되었을 때는 이미 ‘스미스’ 이름의 텍스트는 중역본이 나와 있었다.
이로부터 연구 패러다임이 얼마나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알 수 있다. 장멍양이 이미 스미스와 루쉰 사이에 존재하는 일역본에 주의를 기울였고 루쉰이 당시에 읽은 것이 “당연히 시부에 다모쓰의 일역본이지 영어 원전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비교를 위해 실제로 사용한 판본은 영어판 또는 영어판에 기초한 중역본이었기에 일역본은 논의 범위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동일한 패러다임에 따른 연구에서도 일역본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어, 리우허가 1903년 쭤신사(作新社)에서 출판한 『지나인 기질』의 중역본을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사료 발굴 측면에서 연구사상 미친 공헌이 대단히 크고, 이 번역본이 시부에 다모쓰의 일역본 『지나인 기질』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지만, 두 텍스트와 루쉰 사이 관련성을 깊이 있게 살펴보지 않고 ‘스미스와 루쉰’이라는 패러다임을 계속 가져갔다는 것이다.
필자는 근대 문화에서 ‘동양 대 서양’이라는 인식 패러다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반 원칙을 적용하기 전에 기본적인 역사 사실을 전제 조건으로 삼아야 함을 주장한다. 루쉰이 스미스의 영어 원전이 아닌 시부에 다모쓰의 일역본을 읽었다는 기본적인 역사 사실은 위에 언급한 연구에서 사고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고 있다. 즉, 이른바 ‘스미스와 루쉰’의 관계는 시부에 다모쓰의 일역본을 통해 건설되었으며, ‘스미스와 루쉰’, 그리고 ‘동양과 서양’이라는 장중한 전당으로 나아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기본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지나인 기질』이라는 책을 문제로 제기한 주된 이유이다.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이 쭤신사의 중역본이 저본으로 삼은 것은 영어 원전이 아닌 시부에 다모쓰의 일역본임을 알기에 일역본의 역사적 가치는 더 커진다.
시부에 다모쓰의 『지나인 기질』 일역본에 대한 필자의 연구는 1997년에 시작되었는데, 장멍양의 연구를 계기로 삼아 더 많은 성찰과 탐구를 거듭하게 되었다. 중심은 영어 원본에서 일역본으로 옮겨졌고, 후자의 출판 기구, 시대 배경과 분위기, 역자 시부에 다모쓰의 생애를 추적하여 저자는 저우수런이 당시 처했던 역사적 장면을 복원하고, 이 현장을 통해 그와 ‘스미스’ 사이의 진정한 연관성이 무엇인지 찾았다. 마지막으로 일역본의 텍스트 자체에 주목하여, 루쉰의 텍스트와 비교함으로써 두 텍스트 사이 접점을 규명하고, 이를 통해 루쉰이 국민성 담론을 어떻게 건설했으며 이 과정에서 시부에 다모쓰의 ‘스미스’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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