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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도시와 시] 양양(襄陽)(1)

 

  중국에서 가장 긴 강은 양자강 즉 장강(長江)이다. 청장(靑藏) 고원에서 발원해서 동쪽을 향해 6.211km를 흐르며 대지를 적시고 바다로 들어간다. 11개의 성(省)을 거치는 장강에는 많은 지류가 있다. 그 중 장강 중류의 큰 강이 한수(漢水)이다. 한수는 호북성(湖北省)의 양양(襄陽)을 지난다. 장강의 허리를 받치고 있는 양양은 육지와 수상 교통의 요지이다.

  세상을 등진 채 자연에서 인생을 꾸리는 은자(隱者)들은 중국의 상고시대부터 줄곧 있어왔다. 중국은 은자를 존중하는 전통이 깊다. 훌륭한 은자가 어디에 은거중이라고 하면 그곳은 금새 명성을 얻는다. 양양은 은자들이 좋아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수량이 풍부하고 산과 물이 빚어낸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으로 들어왔다. 『양양기구전(襄陽耆舊傳)』이라는 책에는 평생 관직을 하지 않고 양양에서 은거하다가 생을 마친 많은 사람들이 기록되어있다. 양양은 오래전부터 은거의 성지이고 은자의 고장이었다. 맹호연(孟浩然, 689-740)은 이 곳에서 태어났다.

 

 

은자의 고장 양양

  맹호연의 자(字)는 호연이다.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할 때의 그 호연이다. 이름에 걸맞게 그는 젊은 시절부터 자연을 좋아했고 산수에서 호연지기를 길렀다. 남들은 모두 장안으로 가서 과거시험을 보고 관직을 구하느라고 여념이 없을 20-30대에 맹호연은 고향에서 은거하며 자족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 장안으로 갔다.

  그가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38세였다. 당시 과거 합격자의 평균 나이가 20대 초중반이었던 것에 비하면 한참 늦은 나이였다. 은거에서 세속으로 인생항로를 바꾸는 도전이었다.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이고, 큰 용기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고배를 맛 본 맹호연은 깊이 상심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는 왕유(王維, 699-761)를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다. 왕유는 예능계의 수재였다. 시는 물론이고 음악과 그림에 모두 뛰어나서 어려서부터 다재다능하다는 칭찬을 익히 들어왔다. 그림에서는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다. 왕유는 인물화는 잘 그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맹호연에게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왕유가 맹호연을 매우 각별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상반된 면이 많았다. 왕유는 십대에 이미 장안에서 이름을 날렸고 과거시험에도 합격했다. 당시 그는 소년급제의 대명사였다. 40살이 다 되도록 양양에서 은거하던 맹호연과는 사뭇 다른 인생이었다. 왕유가 맹호연보다 10살이 어렸지만 둘은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고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한번은 맹호연이 장안의 중앙부처에서 일하고 있던 왕유의 집무실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둘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황제 현종(玄宗)이 곧 시찰을 나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관리가 아닌 사람이 집무실을 출입하면 안 되었기 때문에 당황한 왕유는 맹호연에게 우선 당직자용 침상 밑에 숨어있으라고 했다. 현종이 들어왔다. 왕유는 거짓말을 했다가는 나중에 벌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판단하고 사실대로 고했다.

 

“사실은 지금 이 방에 제 친구인 맹호연이 있습니다.”

“그런가? 그럼 나와서 시를 한 수 읊어보라고 하게.”

 

  현종은 규칙 위반 따위는 언급도 하지 않았고 의외로 맹호연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면서 그가 시를 잘 쓴다고 하던데 한 수 읊어보라고 했다. 사전에 준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맹호연에게는 황제를 직접 만나는 자리였다. 잘하면 관직을 얻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는 시를 읊조렸다. 그런데 가만히 다 듣고 나서 현종이 화를 냈다.

 

“방금 시 중에 ‘내가 재능이 없어 황제가 나를 버리셨네(不才明主棄)’라는 구절이 있군. 나는 자네를 오늘 처음 봤는데, 내가 언제 자네를 버렸다는 말인가?”

 

  맹호연은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겸손하게 표현한 것인데, 현종 입장에서는 자신을 매정한 황제로 표현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구절이었다. 인생 절호의 기회는 이렇게 시원하게 날아가 버렸다.

 

 

어디로 가야하나

  장안에서 몇 년 간 관직을 위해 애썼지만 성과가 없었고, 설상가상 현종의 노여움까지 산 맹호연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장안에서 겪은 좌절과 상처를 달래줄 곳은 역시 고향 뿐이었던가. 그는 양양의 녹문산으로 들어갔다.

 

<밤에 녹문산으로 돌아가며 노래하다(夜歸鹿門山歌)> 맹호연

산사에 종 울리고 날은 벌써 어둑어둑 山寺鍾鳴晝已昏
어량의 나루에는 앞 다투어 건너려는 소리가 떠들썩 漁梁渡頭爭渡喧
사람들은 모랫길 따라 강촌으로 향하고 人隨沙路向江村
나도 배에 올라 녹문으로 돌아간다 余亦乘舟歸鹿門
녹문산에 달 비추니 안개에 가리웠던 나무가 드러나고 鹿門月照開煙樹
어느새 방공이 머물던 은거처까지 이르렀네 忽到龐公棲隱處
바위 사이의 문과 소나무 길은 오랫동안 적막한데 岩扉松徑長寂寥
오직 은자만 홀로 오고 가네 惟有幽人自來去

 

  해질 녘 산사의 종소리가 들리고, 나루에는 돌아가려는 어선들로 시끌벅적하다. 사람들은 강가를 따라서 마을로 걸어가고 맹호연은 배를 타고 녹문산으로 들어간다. 어느새 달이 환하게 떠오르자 산의 나무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저 걷다보니 어느새 방공의 은거지까지 왔다.

 

[사진1] 녹문산의 입구

 

  방공은 한(漢)의 은자인 방덕공(龐德公)이다. 방덕공도 양양 출신인데 관직을 마다하고 녹문산에 은거했고, 이 때부터 녹문산은 은자의 산으로 널리 알려졌다. 바위 사이에 출입문을 내었고 소나무 길을 따라 들어가는 그의 옛 은거지에 지금은 사람들 왕래가 없어 고요하다. 맹호연은 동향 선배의 자취를 따라 녹문산에 머물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맹호연

  시의 마지막의 고요와 적막은 앞부분에서 들리는 나루의 시끌한 소리와 대비가 된다. 서로 앞다투어 나루를 건너려는 세상의 소란함은 과거급제와 관직을 향해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한 장안의 소란함이 아닐까. 안개에 가려졌던 나무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관직의 뜻을 접고 산에 깃드는 맹호연의 본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시는 초반에 소란했다가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고요해진다. 마치 맹호연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관직을 구하려고 세상의 소란함에 편승해봤지만 결국 그 곳은 나 맹호연의 자리가 아니었다. 잠시 헤맸지만 고요와 적막이 있는, 변덕없이 한결같은 이 산이야말로 바로 내가 있을 곳이다.’

 

  맹호연은 은자의 본거지인 녹문산 그리고 양양을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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