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림 중의 원림, 원명원
원림 중의 원림, 지상 낙원, 중국의 ‘통곡의 벽’이라 말해지는 이곳은 바로 청 제국의 영광과 몰락을 함께한 원명원(圓明園)이다. 베이징 서북쪽의 풍수적으로 뛰어난 지점에 자리한 원명원은 1709년 강희제가 넷째아들 윤진(胤禛)에게 하사한 별장에서 비롯되었다. 옹정제 이후 함풍제에 이르는 청나라 황제들은 일 년의 대부분을 원명원에서 지냈다. 원명원은 실질적으로 당시 황실의 주무대였던 셈이다.
영광과 폭력의 역사
원명원의 황금기는 건륭제 때였다. 원명원에서 나고 자란 건륭제는 원명원을 확장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엄청난 국고가 투입되어야 하는 원명원 조성 사업은 청나라의 전성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진 ‘강건성세(康乾盛世)’는 원명원이 조성된 시기다. 강건성세의 상징 원명원에는 그에 걸맞는 웅장한 세계가 구현되어 있다. 원명원은 세계의 모든 것을 담고자 했고, 강남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했고, 서구의 건축양식까지 도입했다. 조경 예술의 최고봉이라 칭해지는 이곳은 청 제국의 번영과 자신감을 오롯이 반영한다.
건륭제 이후 가경제와 도광제도 원명원에 많은 돈을 들였다. 청나라는 급속히 쇠퇴하고 있었지만 황제는 위기의식을 갖지 못했다. 아편전쟁에 패배하면서 영국과 난징조약(1842)을 맺고 강제로 문호를 열게 된 상황에서도 변화를 위한 그 어떤 조치도 행해지지 않았다. 함풍제는 원명원에서 머문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860년 10월 6일, 프랑스 군대가 원명원에 도착했다. 원명원을 지키던 병사는 연합군의 무기 앞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이튿날 영국 군대도 도착했다. 10월 18일, 원명원은 불길에 휩싸였다. 원명원의 파괴와 약탈이 자행되었다. 열하로 피난 가 있던 함풍제는 원명원이 불타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피를 토했다. 원명원이 약탈당하고 불타버린 이듬해 함풍제는 서른하나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 뒤를 이은 동치제는 자금성에서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동치제는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도 원명원을 복구하고자 했지만 경비 문제로 뜻을 접어야 했다. 훗날 국고가 채워지면 다시 재개하겠노라 했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1875년 동치제는 스무 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그 뒤를 이은 건 네 살짜리 광서제였다.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서태후는 역시 1860년에 파괴된, 원명원의 부속 원림 청의원(淸漪園)을 복구했다. 해군의 운용 예산이 청의원의 복구비용으로 유용되었다. 1888년 복구가 마무리되자 광서제는 청의원을 ‘이화원(頤和園)’이라고 개칭했다. 1900년 팔국 연합군에 의해 이화원은 파괴된다. 이때 원명원은 더욱 철저히 파괴된다. 이화원은 복구되었지만, 원명원은 점점 더 폐허로 변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극소수의 건축마저 무너졌다.
영광의 재현
원명원이 파괴되기 시작한 1860년 이후 16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중국인은 원명원에 가해진 약탈과 파괴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한편, 웅장했던 원명원의 모습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그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 국가의 자존심 차원에서 전면적인 복원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역사의 생생한 교훈을 일깨우는 장소로 간직해야 한다며 복원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일부만을 복원하는 절충안이 마련되었었고, 지금도 원명원에 남겨진 건축의 잔해는 참담했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땅속에 묻힌 유물을 찾기 위한 고고 발굴 작업 역시 꾸준히 진행되고 있으며, 디지털기술에 힘입어 3D로 원명원을 다시 구현해냈고, 증강현실(AR) 기술을 활용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또한 약탈당한 원명원 문물을 되찾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복원된 원명원을 보고 싶어 하는 중국인의 마음은 간절하다. 1997년에는 광둥성 주하이(珠海)의 원명신원(圓明新園)이 완공되었는데, ‘원명원 40경’ 중에서 18경을 재현한 것이다. 2016년에 완공된 저장성 헝뎬(橫店)의 원명신원은 무려 300억 위안을 투자해 원명원 건축군의 95퍼센트를 재현했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지만 또 많은 이들은 ‘가짜 문물’이라며 조소를 보낸다. 조잡한 복원을 비판하기도 한다. 헝뎬 원명신원을 건설하는 데는 고작 4년이 걸렸다. 제아무리 일대일 비율로 복제한다 한들 어찌 그 옛날의 원명원일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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