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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의 관세음보살 이야기 1]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보타락가산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들

 

모택동의 아명과 관세음보살

  우리는 어렵거나 당혹스러운 일을 맞닥뜨리면 무심코 ‘어머니’를 부르곤 한다. 한국인은 ‘엄마야!’, 중국인은 ‘我的媽呀!’라고 외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다음으로는 아마 종교적인 대상을 많이 찾을 것이다. 요즘은 서양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Oh my god’이라는 말도 많이 한다. 하지만 옛날에는 ‘관세음보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지금이야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관세음보살을 찾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불교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지 예전에는 굳이 불교를 신봉하지 않아도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사람들이 흔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 중에도 무심결에 ‘관세음보살님, 저를 구해주세요!(觀音菩薩救我!)’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모택동의 어머니도 관세음보살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어린 모택동을 안고 관세음보살상 앞에 가서 감사와 복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마침 그녀가 빌었던 보살상이 돌로 되어 있어서 모택동의 어릴 적 아명은 ‘스야쯔(石伢子)’였다고 한다.[1] 우리식으로 보면 ‘돌이’ 내지는 ‘돌쇠’ 정도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사진1] 한국 낙산사의 해수관음(출처: 낙산사 홈페이지)

 

 

관세음보살의 주석 도량 보타락가산

  《화엄경·입법계품(華嚴經·入法界品)》에서는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보타락카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바다 위에 산이 있어 많은 성현이 계시니, 온갖 보배로 만들어져 극히 청정한 곳이네. 꽃피고 과일 열린 나무들 두루 우거지고, 흐르는 개울과 연못 모두 갖추었구나. 용맹한 장부 관자재보살이 중생을 위해 이 산에 머물고 계시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관세음보살은 바닷가에 상주하고 계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타락카(Potalaka) 산은 한자로 포달락가(布呾落迦), 보타락가(補陀落伽), 보타락(普陀洛), 보타락(補陁落), 보타락(普陀落), 보타(普陀) 등으로 음역하거나 광명산(光明山), 해도산(海島山), 소화수산(小花樹山) 등으로 의역해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의 3대 관음성지인 동해 낙산사,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가 모두 바닷가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은 주산열도(舟山列島)의 보타도(補陀島) 조음동(潮音洞)이 대표적 관음성지로 꼽히며, 이외에도 중국 대륙의 바닷가에도 많은 관음성지가 있고 대만에도 유명한 관음성지가 많다. 저 유명한 티베스 포탈라궁의 이름도 보타락가산에서 유래했다. 티베트는 바다가 없으므로 라싸의 서쪽에 위치한 키추(Kichu) 강을 바다로 삼고 그 옆에 지은 사원을 포탈라궁이라 명명한 것이다.

 

[사진2] 중국 보타도 조음동(출처: 바이두)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2]

  예로부터 관세음보살은 중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하고 가장 좋아하는 보살이었다. 원래는 불경에 등장하는 여러 보살 가운데 하나였던 관세음보살은 불경의 한문 번역 과정과 함께 중국인, 나아가 동아시아 전통 문화 속에서 중요한 신앙으로 성장했다. 관세음보살은 관음, 관세음, 관자재 등으로도 불리는데 이런 이름들은 모두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먼저 ‘관음(觀音)’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는 최초의 사례는 《성구광명정의경(成具光明定意經)》이다. 이 경은 반야경 계통의 경전으로 지요(支曜)가 서기 185년에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여기에서 관음보살은 부처를 모신 30명의 보살 중 하나였다. 초기 대승경전에서는 관음보살의 역할이 문수보살과 미륵보살에 비해 상당히 미미한 정도였는데, 예를 들어 지겸(支謙, 약 220-252)이 번역한 《유마경》에서 관세음보살은 50명의 보살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반야경 계통에서 강조하는 것은 지혜이기 때문에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관세음보살이 자비의 화신으로서의 역할을 드러내는 것은 《법화경》이 시작이었다. 《법화경》은 역사적으로 총 6종류의 한문 번역본이 나왔지만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3종류이다. 그 가운데 286년에 법호(法護)가 번역한 《오법화경(正法華經)》에서는 관세음보살이 ‘광세음(光世音)’보살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구마라집이 406년에 이 경전을 번역하면서 불경의 제목을 《묘법연화경》이라 하고, 보살의 이름을 ‘관세음’으로 번역했다. 또한 구마라집의 수제자 승조(僧肇)가 쓴 《유마힐경주(維摩詰經注)》를 보면 구마라집이 관세음을 관자재라고도 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5세기 초에 중국에서는 이미 관음, 관세음, 관자재라는 이름이 모두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관자재’라는 명칭은 663년에 현장법사가 번역한 《대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부터 정식으로 사용되었는데, 현장법사와 현장법사의 제자 규기(窺基)는 ‘관세음’이란 표현은 맞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사진3] 포탈라궁(출처: 포탈라궁 홈페이지)

 

  그렇다면 관세음과 관자재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이름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5세기 법운(法雲)은 《번역명의기(飜譯名義記)》에서 중문으로 번역한 불경 원본에 이미 두 가지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였고, 이것은 1927년 한 러시아 학자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에 따르면 오타니 대학(大谷大學) 조사팀이 중국 신장에서 발굴한 세 건의 산스크리트어 《법화경》 잔본 가운데 5세기 말에 나온 것에서 Avalokitasvara(觀自在)라는 표현이 5차례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반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 에르미타쥬 박물관에 소장된 수초본 자료에서는 모두 Avalokitesvara(관세음)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일본학자 고토 다이요(後藤大用)는 구마라집 등이 사용한 천산 남로를 통해 들어온 경전에는 보살의 명칭이 관세음으로 되어 있었고, 당나라 현장이 인도 본토에서 가지고 온 불경에는 관자재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두 가지 명칭이 생겼다고 추정하고 있다.

 

 

[1] 《大公佛教》(2014.12.3.) 傳喜大和尚:觀音信仰在大陸普及的緣起.

[2] 해당 내용은 于君方(2014). <中國佛敎與觀音信仰>, 《國文天地》 제30권 제6기, p11-12를 번역·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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