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시대 ‘식인’ 언설과 루쉰의 「광인일기」(1)
(明治時代“食人”言說與魯迅的「狂人日記」, 2011)
리둥무(李冬木)
1. 들어가며: 메이지 시대 관련 맥락에 대한 설명
루쉰(魯迅, 1881-1936)의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는 중국현대문학의 초석이 되는 작품으로, 작가가 “루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발표한 첫 번째 작품이다. 1918년 4월에 짓고 같은 해 5월 출간한 『신청년』(新靑年) 잡지 제4권 제5호에 실렸다. 중국현대문학과 작가 “루쉰”의 탄생과 관계된 이유로, 90여 년 간 「광인일기」와 그 관련 연구는 중국현대문학사와 루쉰연구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해 왔다. “중국지망”(中國知網, CNKI) 데이터베이스만 살펴봐도 수록된 논문은 이미 1400편이 넘고, 심지어 “광인학사”(狂人學史)라 부르는 문학사가의 저술도 있다.
그 중, 「광인일기」는 어떻게 쓰여진 것인가? 그 창작 과정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이미 수많은 논문이 검토해온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논술하는 방식은 여전히 루쉰 자신이 지은 “설명”에 대부분 근거하고 있어, 작품 형식을 고골(Nikolai V. Gogol, 1809-1852)의 동명 소설로부터 빌어왔다거나, “예교식인”(禮敎吃人)의 주제가 『자치통감』(資治通鑑)으로부터 “계발”(乃悟) 받았다고 하는 식이다. 이는 루쉰 연구에 있어 일종의 상식으로 굳어져 왔다. 그리고 실증 연구 역시 사실 관계상 루쉰이 고골을 빌어왔다고 밝히고 있다. “「광인일기」”의 작품명과 “일기” 형식은 메이지 40년(1907) 『취미』(趣味) 잡지 제2권 제3, 4, 5호에 연재된 “장곡천이엽정주인”(長谷川二葉亭主人, 즉 이엽정사미[二葉亭四迷]를 말함, Futabatei Shimei, 1864-1909)이 러시아어로부터 일본어로 번역한 고골의 「광인일기」로부터 직접 가져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 주제와 관련된 지점은 아직 얼마간의 의문점을 남기고 있어, 루쉰이 말한 “우연히 『통감』을 읽고 중국인이 식인 민족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이 작품을 짓게 되었다”의 경우, 도대체 『자치통감』의 어느 부분을 읽었다는 것이며, 무슨 계기로 “우연히 『통감』을 읽게”된 것일까? 이들 문제는 작품 속 “식인”(吃人) 모티프의 창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아직 현안으로 남아있다.
「광인일기」가 독자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는 부분은 바로 “식인” 모티프의 창조에 있다 말할 수 있겠다. “식인”이라는 모티프는 주인공 “광인”이 공포에 젖게 하며 독자에게 강렬한 울림을 준다. 전체 4870자에서 “식인”이라는 단어는 28번 나오고 평균 170자 가운데 1번 나오고 핵심어로 전편을 지배하고 아우르며 작품 주제를 표출하는 데 관건이라 말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열풍」(熱風 42, 54, 1919)과 「등하만필」(燈下漫筆, 1925)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식인”이라는 모티프는 문명사 비판 영역까지 확장되어 “루쉰”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어로 자리잡는다. 그렇다면 “식인”이라는 모티프는 어찌하여 창조되게 되었을까? 그리고 또 어떻게 창조된 것일까? 이 글의 요지는 바로 이로부터 생각을 풀어내어, 일본 메이지 시대 “식인”과 관련된 언설을 일종의 맥락으로 삼아 「광인일기」 작품 연구로 들어가보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가 생각하기에, 「광인일기」의 “식인” 모티프는 일본 메이지 시대 논의된 “지식”(知識) 배경 아래 창조된 것이고, 다른 말로 하자면 메이지 시대 “식인”과 관련된 언설이 「광인일기」 창작에 하나의 “모티프”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이 문제를 명확히 말하기 위해서는 잠시 「광인일기」는 접어두고 먼저 메이지 시대 “언설”(言說)로 들어가 결말을 보고자 한다. 그 시대에 왜 “식인”이라는 화두가 있었으며 이 화두가 어떻게 논의되었는지를 말이다.
2. 메이지 시대 이래 “식인” 혹은 “인육”과 관련된 언설의 기본 문헌
일본어에서 “식인”(吃人)이라는 단어는 “식인”(食人)이라 한자로 적는다. 필자는 “식인” 혹은 “인육”(人肉)을 실마리로 삼아 관련 문헌을 검색하여 초보적 인식을 확보했다. 바로 일본 근대 이후 “식인” 혹은 “인육”과 관련된 언설은 메이지 시기 생겨나 모양을 갖췄으며, 다이쇼(大正) 시기에 완성되어 쇼와(昭和) 시기로 이어져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일본 근대 이후 연호와 서력의 대응 관계는 다음과 같다(이 글에서는 한자 숫자로 일본 연호를 표시하고 아라비아 숫자로 서력기원을 표시한다).
-메이지 시대 사십오 년: 1868년 9월 8일 ― 1912년 7월 29일.
-다이쇼 시대 십오 년: 1912년 7월 30일 ― 1926년 12월 24일.
-쇼와 시대 육십사 년: 1926년 12월 25일 ― 1989년 1월 7일.
-현재 헤이세이(平成) 시대: 1989년 1월 8일 ― 지금, 금년 2011년 헤이세이 이십삼 년.
「광인일기」와 관련된 의의로 말하자면 문헌 조사의 중심은 당연히 메이지 시대에 두었지만, 하나의 “언설”로서의 연속성과 루쉰이 이 단편 소설을 창작하고 발표한 시기가 다이쇼 시대와 퍽이나 중복되는 고로, 문헌 조사의 범위를 다이쇼 말년까지 확대했다. 이렇게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에 “식인”이나 “인육” 언설과 관련된 문헌의 “총량 윤곽”을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총량”이란 필자가 조사한 범위 내에서 확보한 문헌 “총량”을 가리키는 것으로, 불완정하기 마련이고 이렇기에 도출된 것은 그저 하나의 “윤곽”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윤곽”임에는 틀림없기에 그중에 주요하고 기본이 되는 문헌이 포함되었으리라 믿는다. 도표1: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 “식인” 혹은 “인육”과 관련된 언설의 출판물 통계」를 참고하시오.
표에서 보이듯 검색한 대상은 메이지와 다이쇼 두 시기 기본 출판물로, 구체적으로 서적, 잡기, 신문으로 나뉜다. 신문은 일본의 양대 신문인 요미우리와 아사히만 대표로 하여 그 외에는 통계에 넣지 않았다. 그렇다면 검색 결과로 알 수 있듯이, 1875년부터 1926년까지 반세기 동안 관련 문헌은 261점이다. 이들 문헌이 본 논문에서 말하는 “언설”의 기본 문구 내용과 경과를 구성한다. 하지만 여기서 몇 가지 부연 설명할 점이 있다.
(1) 두 신문에서 관련 문헌 수의 총합이 서적이나 잡지 관련 문헌 수의 총합보다 많아 164 대 97의 비율일지라도, “언설”의 역량을 실현하는 방면에 있어, 내용의 풍부함과 계통성 그리고 심도를 보자면 서적과 잡지와 비교할 바가 못 되니, 본 논문에서 신문은 그저 참고 문헌으로 삼는다.
(2) 문헌의 주체가 되는 서적과 잡지는 시간 범위가 47년(1879-1926)으로 수량은 97점이며, 종합 평균하면 대략 매년 2점씩이고, 기본적으로 이 “언설”의 출현과 전승 특징이 서로 일치하여, “열기”가 있지는 않더라도 “냉담”하지는 않아, 집중적인 토론은 되지 않았더라도 토론은 계속해서 여전히 존재하여, 물이 졸졸 흘러 시냇물을 이루듯 계속하여 끊이지 않는 모습이다.
(3) 서적의 수량이 잡지 속 문장보다 분명히 많지만, 둘 사이에는 상호 관련성이 있어, 어떤 서적들은 잡지 속에 이미 발표된 문장을 손보아 만들어진 것이고, 같은 책이 재판 발행된 사례도 있다.
*李冬木 著, 『魯迅精神史探源: 個人⋅狂人⋅國民性』, 臺北: 秀威資訊科技, 2019, 166-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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