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세계적 거장 허우샤오셴(侯孝賢)이 은퇴를 선언했다. 올해 나이 76세, 대략 45년간 감독으로 활동했고, 30여 편의 영화를 남겼다. 몇 년 전부터 신작 <수란강>을 준비하는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는데, 아쉽게 완성되지 못한 채 은퇴를 선언했다. 코로나를 겪었고 치매 관련 치료를 받는다는 소식도 들린다. 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신작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점이 무척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부디 편안한 노년을 보내길 기원해 본다.
허우샤오셴의 영화세계를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요령 있게 그의 작품들과 그 의미를 캐치할 수 있을까. 이미 과거의 여러 글에서 그의 영화들을 소개하고 분석해본 적이 있고 나름대로 정리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막상 은퇴를 선언한 이 노감독의 영화들을 다시 떠올려 보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좀 막막해진다.
허우샤오셴의 영화세계를 언급하자면, 역시 명작 <비정성시>가 첫손가락일 것이다. 1989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 영화는 한 가정을 배경으로 대만의 아픈 현대사를 정면으로 응시한 영화다. 대만 현대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인 2·28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만으로도 상당한 화제가 된 작품이다. 지롱의 유지라 할 수 있는 임노인과 4명의 아들은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을 맞이한다. 임노인의 큰손자가 출생하며 경사를 맞이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사는 시대는 혼란스러운 격변기다. 대륙에서 넘어온 국민당 정부의 폭압적인 정치와 본성인 차별은 계속 갈등을 키우고, 결국 폭발한 갈등이 폭발하고 군대를 동원한 진압과 학살이 이어지게 된다. 임씨네 가족은 그 광폭한 시대 안에서 풍비박산이 난다. 한 가정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시대의 아픔과 비극을 담담하게 묘사한 이 영화는 대만을 넘어 아시아 영화의 저력을 보여주면서 한 영화가 시대와 역사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가에 대한 커다란 이정표가 되었다.
<비정성시>를 통해 허우샤오셴의 영화를 좋아하게 되고, 대만의 근현대사에 관심이 생겼다면 이어서 <희몽인생>을 이어봐도 좋을 것 같다. 노년에 이른 전통 인형극 장인의 일생을 따라가며 대만의 굴곡진 역사를 펼쳐놓는데 감동과 재미가 있다. 허우샤오셴 스타일 그대로 덤덤하게 한 인간의 희노애락을 담아낸다. 그럼에도 묘한 감동을 느끼게 하고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몰입감이 있는 작품이다.
감독 허우샤오셴의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담겨있다는 초기작들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80년대 초반 만들어진 <동동의 여름방학>, <펑궤이에서 온 소년>, <연연풍진>은 따로 동년 3부작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기도 하는데, 우리네 그 시절과도 유사한 소재, 배경 등으로 친근하게 느껴지고 소년, 소녀의 성장을 담백하게 묘사하는 부분들도 참 정겹다. 평범함과 담백함 속에서 묻어나는 어떤 서정성, 아련함, 순수함 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세계적 거장으로 명성을 쌓은 후에 만든 영화들 중에는 <남국재견>, <쓰리 타임즈>, <밀레니엄 맘보>, <섭은랑> 등이 비교적 기억에 남는다. 앞서 거론한 영화들만큼 좋아하진 않지만 모두 흥미롭게 보았다. <남국재견>, <쓰리 타임즈>, <밀레니엄 맘보> 등은 과거에 대한 회고의 형식이 아닌 동시대 청춘들을 허우샤오셴의 시각으로 관찰, 묘사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허우샤오셴이 만든 무협영화 <섭은랑>도 예상을 비켜서는 독특함이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섭은랑>은 무협영화로서는 별 매력과 인상이 없지만, 허우샤오셴이 무협영화를 다루었다는 그 자체가 무척 흥미로웠다.
허우샤오셴은 명실상부한 세계적 감독이었고 언제나 다음 작품이 궁금하고 기대되는 감독이었다. 그리고 대만의 저력을 느끼게 해주는 거장이었다. 그의 뒤를 잇는 뛰어난 후배가 나와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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