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당대의 도시와 시] 양주(揚州)(4)

 

  양주는 화려함과 번성과 유흥의 상징이었고, ‘양주몽(揚州夢)’이라는 표현에 들어맞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양주몽은 살아서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꿈의 도시, 꿈에서라도 가고 싶은 곳이고, 양주의 장점만을 집약한 단어가 되었다. 도시의 이미지가 이렇게 고착화되는 듯하지만, 여기에 정반대의 시적 이미지를 부여한 작품이 있다. 두목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장호(張祜 785-849)의 시가 그것이다.

 

<회남에서 맘껏 놀다 縱游淮南>

십 리 긴 거리에 시장이 늘어섰고 十里長街市井連,

달빛 아래 다리에서 기녀들을 보노라니 月明橋上看神仙.

사람은 태어났다면 양주에서 죽어야하리 人生只合揚州死,

선지사와 산광사가 있으니 좋은 무덤 밭 아니던가 禪智山光好墓田.

 

  제목의 회남(淮南)은 양주 지역을 가리키고, 종유(縱游)는 마음 가는 대로 돌아다니면서 논다는 뜻이다. 시의 앞 두 구는 양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잣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들, 밤이 되면 달빛이 비추는 다리에서 아름다운 기녀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할 나위 없이 즐겁다. 제2구의 신선(神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선이 아니라, 기녀를 뜻하는 당시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 즐거운 순간, 시인은 갑자기 죽음을 말한다. 언젠가 죽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양주여야 한다. 선지사와 산광사와 같은 좋은 사찰들도 있어서 여기서 놀다가 죽더라도 묻힐 곳 걱정 따위는 없으니, 이곳이야말로 죽음을 맞이하기에 좋은 곳 아닌가. 그러니 사람은 제각각 다른 곳에서 태어났을지언정 죽음은 양주에서 맞아야 한다.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이 아니라, 죽을 때 와야 할 곳이고 죽어서 묻혀야 할 곳이다.

 

[사진1] 장호의 동상

 

 

생의 마지막 순간에 머물고 싶은 도시

  이 시는 ‘화려한 거리와 기녀-생의 마지막 순간-사찰’로 전개된다. 그런데 시를 읽다보면 두목의 시가 연상된다. 시의 첫 구에서는 두목의 ‘春風十裏揚州路’(<증별> 제1수-양주(1)회 참고)가 떠오르고, 두 번째 구에서는 두목의 ‘二十四橋明月夜’(<寄揚州韓綽判官>-양주(2)회 참고)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표현과 시상이 매우 비슷한데, 양주를 묘사하는 이미지와 정서가 전형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3~4구에서는 불교 사찰을 언급했다. 선지사(禪智寺)는 원래는 수(隋) 양제(煬帝)의 궁이었다가 후에 사찰이 되었고, 산광사(山光寺)는 양제의 행궁이었다가 후에 절로 개축한 곳이었다. 정해진 글자 수 안에서 최대한 경제적으로 시어를 써야하는 시 창작의 원리에 비추어 보면 사찰 이름을 두 곳이나 거론하는 것은 어쩌면 비경제적인 방법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양주에 불교사찰이 많았다는 역사 사실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양주의 사찰에 관한 표현은 두목의 시에도 역시 보인다.

 

<강남의 봄 江南春> 두목

천 리 길에 가득한 꾀꼬리 소리, 푸른 강물에 비추인 붉은 꽃 千里鶯啼綠映紅,

산과 물과 마을, 술집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네 水村山郭酒旗風.

남조 때 지은 사백 팔십 개 사찰들 南朝四百八十寺,

안개 속에 잠긴 수많은 누대 多少樓台煙雨中.

 

  1~2구는 양주의 익숙한 모습이다. 시각과 청각의 교차하고 색채의 선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3~4구에서는 남조시기에 번성했던 수백 개의 불교사찰을 보여준다. 운하로 인해서 생긴 물의 도시답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면 사찰들의 수많은 누대가 안개 속에 잠긴 듯이 보인다. 이 시는 두목이 양주에 처음 도착해서 본 풍경을 쓴 시이다. 양주의 첫인상은 즐비하게 늘어선 사찰의 도시였다.

 

[사진2] 양주의 선지사

 

  강남은 남조(南朝)의 네 나라인 송(宋)·제(齊)·양(梁)·진(陳)의 수도였다. 이 시기 황제들이 불교를 신봉했는데, 특이 양(梁)의 무제(武帝)는 불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나라 도처에 불교사찰을 지었으며, 승려가 되고 싶어 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불교에 심취해서 정치를 등한시하는 동안 후경(侯景)이 난을 일으켜서 반란군이 황궁을 포위했고, 무제는 결국 성 안에서 아사했다. 이런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현장을 본 두목이 쓴 시가 <강남춘>이다.

  장호의 시에는 두목의 시 세 편이 녹아든 느낌이다. 둘 중 누가 누구의 시를 먼저 보고 비슷하게 썼는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각기 다른 시대의 수많은 시인들이 같은 장소에서 시를 지었고, 중국은 앞선 작품의 이미지나 시어를 그대로 답습하는 전통도 깊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중국 고전시에 적용해 보면 절로 수긍이 될 정도로 비슷한 이미지의 반복적인 사용이 많다. 특히 명작이 만들어 낸 표현이나 정서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일종의 전통인 나라이기 때문에, 지금의 관점으로 표절의 잣대를 들이대면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한 글자에 담긴 창신

  장호의 시는 두목의 작품들과 같이 놓고 보면 오히려 흥미로워진다. 장호는 다른 것들은 그대로 두고 양주몽(揚州夢)이 아니라 양주사(揚州死)라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다. 여태까지 양주는 환상, 쾌락, 즐거움, 꿈의 도시라는 일관된 이미지를 축적해왔는데, 이 시에서는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도 좋다, 즉 죽음마저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낮-밤, 술-꿈의 상보적 이미지를 넘어서서 꿈에서 죽음으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살아서 즐기고 즐기다가 죽을 도시. 이보다 더한 표현이 있을까.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고대에는 고향에서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타향에서 죽더라도 고향에 와서 묻혀야 했다. 이런 통념 하에서, 죽어 묻힐 곳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응당 양주여야 한다는 발상은 낯설고 새롭다. 그래서 양주사(揚州死)는 기존의 양주몽(揚州夢)과 정반대의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양주의 특징을 표현한 면에서는 양주몽을 뛰어넘는다. ‘꿈(夢)’에서 ‘죽음(死)’이라는 이 한 글자의 전환에 시인의 착안이 있다. 전통과 답습 중의 새로움이란 이처럼 작은 생각의 차이에 있다. 그리고 장호의 붓끝에서 양주는 이제 문학적으로 더 풍부해졌다.

 

 

 

※ 상단의 [작성자명](click)을 클릭하시면 저자의 다른 글들을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