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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문화의 이모저모 18] ‘간태종십사소’에 대한 단상

 

[그림1] 염입본(閻立本)의 <당 태종 납간도(納諫圖)>, 타이베이 고궁(故宫)박물원 소장

 

 

장현소의 대담한 반대

  정관(貞觀) 원년(627), 당 태종은 자신만을 위한 토목공사에 국고를 낭비하지 않겠노라고 대신들 앞에서 공포한다.

 

“옛날 우왕(禹王)이 산을 깎고 치수했을 때 백성들이 비방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이익을 다른 이들과 함께 누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궁전을 만들 때 백성들이 원망하며 반대한 이유는 자신만을 위하고 남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진기한 것은 물론 사람이 욕망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면 멸망의 위기가 곧 닥치게 된다. 짐은 궁전을 짓고 싶고 필요한 자재도 이미 갖추어져 있지만, 진나라를 교훈으로 삼아 자제할 것이다. 왕공 이하 대신들은 마땅히 짐의 뜻을 이해하라.”

 

  그런데 불과 삼 년 뒤, 태종은 낙양(洛陽)의 건원전(乾元殿)을 대대적으로 수축하고자 한다. 일찍이 당 고조 무덕(武德) 4년(621), 이세민(李世民)은 낙양을 공격했다. 당시 낙양에서는 수 양제의 손자를 살해한 왕세충(王世充)이 황제를 자처하고 있었다. 낙양을 성공적으로 접수한 이세민은 일찍이 양제가 지은 궁전을 휙 둘러보았다. “이토록 사치와 욕심을 다 부렸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지!”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세민은 이 궁전을 부수도록 명했다. 육 년 뒤 그가 제위에 오른 첫 해에 여러 신하들 앞에서 호화로운 궁전을 짓지 않겠노라 다짐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이렇게 다짐했던 태종이 건원전을 다시 짓고자 한 것이다. 이때 급사중(給事中) 장현소(張玄素)가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아방궁을 짓고서 진나라가 넘어졌고 건원전을 짓고서 수나라가 무너졌다, 힘든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키는 것은 수나라의 폐단을 답습하는 일이며 그 화는 양제보다 더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야말로 발칙하고 대담한 상소였다. 태종은 장현소를 불러들여 추궁했다.

 

“내가 수 양제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夏)나라 걸왕(桀王)이나 상(商)나라 주왕(紂王)과 비교하면 어떠냐?”

 

  최악의 폭군인 걸왕과 주왕을 자신과 비교하라는 태종의 위협 앞에서도 장현소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정말로 건원전을 수축한다면 걸왕이나 주왕과 마찬가지라고 직간한다. 결국 태종은 건원전 수축을 포기한다. 그리고 장현소에게 비단을 하사한다. 태종과 장현소의 일화는 태종이 신하들의 간언을 얼마나 잘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위징의 간언

  인간의 다짐이란 나약하기 짝이 없고 욕망의 위력은 불가항력적이다. 태종은 장원소의 반대로 건원전 수축을 포기한 이듬해(630)에 기주(岐州, 지금의 바오지(寶鷄) 경내)에 있는 인수궁(仁壽宮)을 확장 수축한다. 인수궁은 수 문제(文帝)가 피서용 행궁으로 지었던 것이다. 태종은 인수궁을 구성궁(九成宮)이라 개칭하고 역시 피서용 행궁으로 사용했다. 또 정관 8년에는 장안(長安)의 대명궁(大明宫) 공사에 착수하고, 정관 11년에는 낙양에 비산궁(飛山宫)을 짓는다. 비산궁이 완공되자 태종은 득의만만했다. 이를 보고 위기를 감지한 위징(魏徵)은 「태종께 열 가지 생각을 간하는 상소(諫太宗十思疏)」를 올린다. 나무가 크게 자라기를 바라면 뿌리를 견고히 해야 하고 물이 멀리 흐르기를 바라면 원천을 깊게 해야 하고 나라를 평안히 하려면 반드시 덕을 쌓아야 한다, 원천이 깊지 않은데 멀리 흐르길 바라고 뿌리가 견고하지 않은데 크게 자라길 바라고 덕이 두텁지 않은데 나라가 평안하길 바라는 것은 불가하다는 말로 시작한 위징의 상소는,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면서 사치를 경계하고 덕을 쌓고 욕망을 억누를 것을 태종에게 주문했다.

  이처럼 태종을 견제하는 균형추 역할을 했던 위징이 643년에 죽고 만다. 태종은 “구리를 거울로 삼으면 의관을 바로잡을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천하의 흥망을 알 수가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밝힐 수 있다”라고 하면서 위징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다. 위징의 간언을 거울삼아 모든 것의 득실을 살폈던 만큼, 그 거울의 부재는 태종이 건강한 견제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645년 태종은 고구려 침공에 참혹하게 실패한 뒤, 만약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자신을 말렸을 거라며 후회하고 한탄했다. 그런데 불과 두 해 뒤에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다시 강행한다. 바로 이해에 그는 장안 북쪽에 옥화궁(玉華宮)을 짓는다. 위징이 사치를 경계하고 욕망을 억누르라는 상소를 올린 지 십 년째 되는 해였다.

  이후 태종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었고 장생술에 빠져 온갖 단약을 복용한 결과 52세이던 정관 23년에 세상을 뜨고 만다. 그가 숨을 거둔 장소는 장안 남쪽에 있는 취미궁(翠微宮)으로, 647년에 완공한 피서용 행궁이다. 절대권력 하에서 토목공사와 전쟁과 혼미함과 죽음의 기운은 이렇게 지척지간에 있었다.

 

 

군주가 마음에 새겨야 할 10가지

  황제가 자신에게 거슬리는 말일지라도 기꺼이 듣고자 함으로써 간언하는 신하가 균형추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정관의 치’를 이끈 동력이었다. 당시 태종과 재상 위징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군주가 어떻게 하면 명군(明君)이 되고 어떻게 하면 혼군(昏君)이 되오?”

“두루 들으면 현명한 군주가 되고, 한쪽 말만 믿으면 어리석은 군주가 되옵니다. 여러 의견을 두루 듣고 받아들이면 권신이 감히 기만할 수 없으며, 아랫사람의 의견이 윗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사옵니다.”

 

  다음은 위징이 태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언급한, ‘군주가 마음에 새겨야 할 10가지’다.

 

  욕심이 날 만한 것을 보면, 만족할 줄 앎으로써 스스로 경계해야 함을 생각하고,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멈출 줄 앎으로써 백성을 안정시켜야 함을 생각하고,
  지위가 높아 위험이 닥칠까 염려되면, 겸허하게 자신을 수양해야 함을 생각하고,
  교만해질까 두려우면, 강과 바다가 모든 냇물보다 더 낮은 곳에 있음을 생각하고,
  사냥하며 놀기를 좋아하면, 일 년에 세 번의 사냥을 한도로 삼아야 함을 생각하고,
  게을러질까 걱정되면, 시작을 신중히 하고 끝을 다잡아야 함을 생각하고,
  의사소통이 막힐까 걱정되면, 마음을 비움으로써 아랫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함을 생각하고,
  중상모략하는 말이 걱정되면, 자기 스스로를 단정히 하여 악한 사람을 물리쳐야 함을 생각하고,
  은혜를 베푸는 데 있어서는, 기쁨 때문에 상을 잘못 내리지 말아야 함을 생각하고,
  벌을 내리는 데 있어서는, 노여움 때문에 형벌을 남용하지 말아야 함을 진실로 능히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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