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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문화의 이모저모 11] 이역땅으로 가야만 했던 여인들

 

[사진1] 채염의 상(채염 기념관)

 

 

오손으로 보내진 세군과 해우

  한(漢)나라 고조(高祖) 때부터 중국은 왕족의 딸이나 후궁을 이민족 우두머리의 아내로 보내는 통혼 정책을 통해 화친을 도모했다. 이렇게 정략적으로 이민족에게 보내진 여인들을 화번(和蕃)공주라고 한다.

  한나라 때는 흉노뿐 아니라 오손(烏孫)에도 화번공주를 보냈다. 세군(細君)도 그렇게 오손왕의 아내로 보내졌다. 그녀는 하늘 끝 먼 곳으로 시집온 신세를 한탄하며 “항상 고향 생각에 마음 아프니, 고니가 되어 고향에 돌아가고파”라고 애절하게 토로했다. 오손왕은 말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나이가 많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손자에게 세군을 취하게 한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세군은 한 무제(武帝)에게 상서를 올렸다. 무제가 보내온 답변은 냉혹했다. “그 나라의 풍속을 따르라. 나는 오손과 함께 흉노를 멸하고자 한다.” 결국 세군은 남편의 손자인 잠추(岑陬)의 아내가 된다.

  이후 세군이 세상을 뜨자 한나라는 또 다른 여인 해우(解憂)를 잠추의 아내로 보낸다. 잠추가 죽자 해우는 그의 종형제인 비왕(肥王)의 아내가 되고, 비왕이 죽자 이번에는 잠추의 아들 니미(泥靡)의 아내가 된다. 해우는 비왕의 아내로서 3남 2녀를 낳고, 니미의 아내로서 아들 한 명을 낳았다.

  세월이 흘러 큰아들과 막내아들이 병사한 뒤 해우는 한나라 선제(宣帝)에게 상서를 올린다. “연로하여 고향이 그리우니, 돌아가 해골이라도 한나라 땅에 묻히기를 바랍니다”라고. 스물의 앳된 나이에 오손으로 보내진 해우가 한나라로 돌아온 건 일흔이 되어서다. 해우가 돌아온 해는 공교롭게도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나라에 입조해 선제를 알현한 기원전 51년이다. 그로부터 18년 뒤인 기원전 33년에 호한야선우는 또 한나라에 입조하여 통혼을 요청하고, 당시 한나라 황제 원제(元帝)는 그에게 왕소군(王昭君)을 보냈다.

 

 

채염의 파란만장한 삶

  생의 끝자락에서나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해우는 왕소군이나 세군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역땅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여인의 삶은 행복하기 어려웠다. 채염(蔡琰)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채염은 흉노에 잡혀가 지내다가 한나라로 돌아왔지만 그녀에게 귀국은 결코 평안이 아니었다.

  왕소군의 이야기가 담긴 『금조(琴操)』를 지은, 한나라 말의 뛰어난 학자 채옹(蔡邕)이 바로 채염의 아버지다. 일찍이 채염은 위중도(衛仲道)에게 시집갔지만 얼마 뒤 사별한다. 또 그녀의 아버지마저 동탁(董卓)을 암살한 왕윤(王允)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왕윤은 동탁의 수하인 이각(李傕)과 곽사(郭汜) 등에 의해 처형당한다. 이후 조정을 장악한 이각과 곽사가 대립하며 서로 공격하는 동안 장안(長安)은 공포와 굶주림의 도가니가 되고, 헌제(獻帝)는 장안을 빠져나가 낙양(洛陽)으로 피신한다. 바로 이때, 이각과 곽사의 잔당을 격퇴한다는 명분으로 한나라에 투입된 흉노가 약탈을 일삼는다. 채염이 흉노에 잡혀간 것도 바로 이 시기(195년)다.

  채염은 12년 동안 흉노 좌현왕(左賢王)의 아내로 지내면서 아들 둘을 낳았다. 그리고 207년, 조조(曹操)가 흉노에게 많은 금품을 주고 채염을 돌아오게 한 뒤 동사(董祀)에게 시집보냈다. 훗날 동사가 형벌을 받아 죽게 되었을 때 채염은 조조에게 간청해 그의 목숨을 살려내기도 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채염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두 아들과 헤어질 때였을 것이다. 「비분시(悲憤詩)」에는 그 장면이 생생히 표현되어 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목을 끌어안으며 울부짖는다. “사람들이 말하길 어머니가 떠나셔야 한다는데, 다시 돌아오실 날이 있을까요? 늘 인자하시던 어머니가 지금 어째서 달라지셨나요? 우리는 아직 어린데 어째서 생각해주시지 않나요?” 채염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진다. “아이를 보니 억장이 무너지고, 정신이 아득해 미칠 것 같다.” 이 시를 읽노라면 채염이 과연 한나라로 돌아오고 싶었을지 의문이 든다. 한나라로 돌아와 재가한 채염은 평생 그리움과 근심을 품고 살았다. “내 배로 낳은 자식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지고 찢어지는구나!” “떠돌다가 비천해진 몸, 다시 버려질까 늘 두렵다”라던 채염. 조조에게 구원받은 재녀(才女)라는 평가가 과연 진실일까. 한나라로 돌아온 것이 과연 그녀의 삶에서 구원이었을까? 어쩌면 또 다른 절망의 늪으로 빠져든 게 아닐는지.

  자신이 살던 익숙하고 정든 곳을 떠나 이역만리 물설고 낯선 곳으로 떠나 살아야 하는 건, 마치 나무가 뿌리째 뽑혀 전혀 다른 토양에 심겨지는 것과 같다. 그 누가 이런 처지에 놓이기를 원하겠는가. 하지만 많은 여인이 그런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세군·해우·왕소군·채염, 수많은 여인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원치 않는 삶의 현장으로 내몰렸다. 사실, 그녀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자였다. 『한서(漢書)』에서는 선제 이후 여러 대에 걸쳐 북방 변경지대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소와 말이 들판에 가득했다고 한다.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간 뒤 한나라와 흉노는 수십 년 동안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명나라 시인 조개(趙介)는 「제소군도(題昭君圖)」에서 가냘픈 왕소군이 곽거병(霍去病)의 천만 병사보다 낫다고까지 평가했다.

  그렇지만 의문이다. 당신은 공동체의 구원자였노라, 이렇게 칭송하는 게 과연 최선일까? 칭송보다는,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힘없는 여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공동체의 이기성과 폭력성을 성찰하는 일이 먼저이리라.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희생을 강요당하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바라면서 말이다. 누군가의 평안이 누군가의 한숨과 눈물로 지켜지는, 엄청난 빚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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