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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도시와 시] 양주(揚州)(3)

 

  양주의 풍류남아였던 두목이 세월이 흐른 뒤에 자신을 어떻게 되돌아 보았는지 <회한을 풀다(견회, 遣悔)> 시에서 엿볼 수 있다.

 

실의한 채 강호에서 술을 싣고 다녔을 때 落魄江湖載酒行,

가는 허리의 미인들은 손바닥 위에서 춤 출 만큼 가벼웠지 楚腰纖细掌中輕.

십 년 만에 양주의 꿈에서 깨어나 보니 十年一覺揚州夢,

얻은 것은 청루의 매정한 사람이라는 명성 뿐 赢得青樓薄倖名.

 

  첫 구에서 ‘실의했다’고 한 것은 시적인 표현이다. 이때까지 두목은 양주를 포함하여 홍주(洪州), 선주(宣州) 등 지방 이곳저곳에서 작은 관직을 하고 있었는데, 양주가 아무리 번화한 도시였다고 해도 장안 중앙부서의 요직으로 가지 못했기 때문에 ‘落魂江湖’라고 표현했다. 실의했기에, 그래서 강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술과 함께 했고, 미녀들과 함께 했다.

  초요(楚腰)는 초나라의 허리라는 뜻인데, 초의 영왕(靈王)이 가는 허리의 여인을 좋아하자 나라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는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장중경(掌中輕)은 한(漢)의 미인 조비연(趙飛燕)이 몸이 가벼워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었다는 기록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초요와 장중경은 아름다운 여인을 상징하는 말이다. 두목은 술과 여인들에 둘러싸여 지냈던 양주 시절을 이렇듯 솔직하게 풀어냈다.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는 시인

  그 시절이 모두 지나고 십 년 만에 양주의 꿈에서 깨어보니 마치 일장춘몽처럼 덧없고 짧았다는 자각이 새삼스럽게 몰려왔다. 그리고 남은 것은 청루의 기녀들 사이에서 얻은 박정한 남자라는 별명뿐이다. 박행(薄倖)은 박정(薄情) 즉 매정하다는 뜻이다. 당시 기녀와 관리사이의 애정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었기에 관리는 타지로 부임해서 떠나가면 그만이지만 남아있는 기녀의 입장에서는 잠시 만났다가 떠나버린 남성이 매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두목도 자신이 청루의 박정한 남자가 되어버린 것을 깨닫게(覺) 되었다.

  두목이 청루에서 인기 있는 남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미남이었던 그가 술에 취해 양주의 거리를 지나가면 여인들이 그의 수레에 귤을 던졌는데, 집에 도착할 때쯤에는 수레에 귤이 가득했다고 한다(醉過楊州橘滿車). 여인들이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과일을 던져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시경(詩經)』 시대부터 있었던 관습이었다. 그리고 두목은 『통전(通典)』의 저자인 대학자 두우(杜佑, 735-812)의 손자였고, 20세에 쓴 <아방궁부(阿房宮賦)>로 이름을 날리면서 문장 실력을 인정받았다. 잘생기고 집안 좋고 실력도 뛰어난, 세간이 부러워할 것을 다 갖춘 두목이 양주에서 조용히 지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주몽이란

  두목은 이 시로 양주에서 풍류를 만끽했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이 시에 대해서 혹자는 방탕했던 젊은 시절에 대한 부끄러움과 후회를 토로했다고 하고, 혹자는 양주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새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양주몽(揚州夢)’이라는 말은 이 두 갈래 정서를 대표한다. 양주는 꿈의 도시, 혹은 꿈에라도 가보고 싶은 도시이면서 동시에 후회가 남는 시절을 상징한다.

 

 

  과거의 일이 과거의 일로 끝나는 경우는 드물다. 시간이 지나면서 거기에 온갖 감정과 왜곡이 덧칠에 덧칠을 하면서 원래의 그림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고 기억이 만들어 낸 새 그림이 자리 잡는 일이 흔하다. 두목의 양주몽은 어떤가. 꿈(夢)과 깨어남(覺) 사이를, 참회와 추억 사이를 오가면서 씁쓸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운하가 낳은 도시 양주에는 물길이 지나간다. 그 물길 따라 술과 여인과 젊음이 꿈처럼 흘러간다. 결국 물 따라 모든 것이 흘러갔지만, 두목의 작품은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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