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종상 영화제가 필자의 고향 수원에서 열렸고, 나 또한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영화제에 참석했다. 올해 59회를 맞이한 대종상 영화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영화제로 1958년에 시작되었다.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만, 그동안 수상작 선정에 이런저런 잡음이 있어 많은 말들을 낳기도 했다. 최근 들어 변화와 혁신을 통해 더 좋은 영화제로 거듭나려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연유 때문인지 이번 영화제에도 다수의 수상자들이 불참하여 아쉬움을 자아냈다. 앞으로 개선되리라 믿는다. 개인적으로 이번 대종상 영화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남녀주연상이나 작품상이 아니라 배우 장미희가 공로상을 수상한 것이었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정평이 난 만큼 이날도 여배우로서 아우라가 상당했다.
한국의 대종상이 있다면, 중화권에는 금마장(金馬獎)이 있다. 연말로 다가가는 11월 말 현재, 마침 대만에서도 중화권 최고 권위의 영화제인 금마장 영화제가 열리고 있다. 금마장은 1962년부터 시작되어 올해 60회를 맞고 있다. 올해 후보에 오른 작품들과 인물들 면면을 살펴보니, 신구세대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금마장도 최근의 내홍에서 완전히 회복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어쨌든 그중 차이밍량, 허안화, 왕빙 그리고 임청하와 같은 반가운 이름들이 몇 명 있었다.
금마장 영화제가 중화권 최고의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대만은 물론 홍콩과 본토까지 중화권 전체를 아우르는 영화제인 만큼 언제나 금마장 영화제는 중화권 톱스타들이 총출동하곤 했다. 그런데 지난 2018년, 다큐멘터리 작품상 수상자가 수상소감 중 대만의 독립을 희망한다는 발언을 해서 정치적 논란이 발생했고, 이듬해부터 중국에서 금마장 영화제를 보이콧하여 중국 본토와 홍콩의 영화인들이 불참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조금씩 회복된다고는 하나 아직 여파가 남아있는 것 같다. 60회인 만큼 신경을 더 쓰는 모양새이긴 한데, 후보작에 중국, 홍콩의 영화들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이번 금마장 영화제를 이야기한 김에, 앞서 거론한 감독과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해보고자 한다. 열거한 이들 중 차이밍량과 임청하는 대만의 감독과 배우이고 허안화는 홍콩, 왕빙은 중국의 감독이다. 흥미로운 것은 차이밍량, 허안화, 왕빙 모두 다큐멘터리 작품상 후보에 올라 있고, 임청하는 공로상 후보로 지명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차이밍량은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을 잇는 대만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애정만세>, <하류> <구멍>, <천교>, <흔들리는 구름>, <거기 지금 몇 시인가요> 등의 작품들이 떠오른다. 차이밍량은 이런 영화들에서 대도시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삼아 고독하고 소외된 현대인들의 초상을 쓸쓸하게 담아왔다. 2010년대 이후 극영화는 더 이상 만들지 않고 다큐멘터리 작업과 현대 미술 방면에 몰두하고 있다.
허안화 감독은 중화권의 가장 유명한 여성 감독으로 40년에 걸쳐 30편이 넘는 영화들을 연출했다. 몇 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인상을 수상했을 만큼 그녀의 위상은 아시아 전역에 잘 알려져 있다. 흥미롭게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후보에 올라 있는데, 작품 소개를 살펴보니 <엘레지>라는 제목이다. 올 부산영화제에도 상영되었던 작품으로 홍콩의 시인들을 조망한 작품인 것 같다. 홍콩인으로서 홍콩 사회의 변화에 늘 민감했던 허안화인 만큼 이번 작품도 그 연장선상에 서 있을 것 같다.
대륙의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인 왕빙은 우리나라 평론가 정성일에 의해 많이 소개되고 언급된 감독이다. 심지어 정성일은 왕빙의 영상 작업을 다큐멘터리로 찍기도 했을 만큼 애정하는 감독인 것 같다. 후보작에 오른 왕비의 작품은 <청춘>이라는 작품으로, 상하이 인근의 중소도시 의류공장에서 일하는 시골 청춘들의 일상을 담아내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6년에 걸쳐 찍었다고 하니 상당히 공을 들인 작품인 것 같다.(원고가 완성된 후 확인하니 왕빙의 <청춘>이 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왕년의 슈퍼스타 임청하의 공로상 수상 소식이다. 영화판에서 임청하를 보게 되는 게 과연 얼마 만인가. 1994년 <중경삼림>을 끝으로 은퇴했으니, 거의 30년 만의 귀환이다. 물론 영화 출연은 아니지만, 등장 자체만으로도 반갑고 즐거운 일이다. 나에게 중경삼림은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태웠던 90년대 초의 인상이 가장 강하다. <중경삼림>, <동사서독>, <백발마녀전>, <동방불패> 속 임청하는 대체 불가능한 막강한 카리스마와 강한 듯 여린 듯한 아찔한, 중성적인 매력으로 관객들을 홀렸던 것 같다. 우리 시대의 여신 임청하가 일흔이라니, 참으로 믿기지 않는다. 그녀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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