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 가장 먼저 신작을 들고 한국을 찾은 외국 배우는 견자단이다. 견자단은 총감독을 맡은 왕정과 함께 <아침마당>에도 출연해 한국팬들을 만났다. 그의 이번 방문은 신작 <천룡팔부-교봉전>을 홍보하기 위해서였는데, 의외였던 <아침마당> 출연 외에도 인기 예능 <런닝맨>과 한 유튜브 채널에도 출연하는 등 홍보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수많은 액션물에 출연하며 현존 중화권 최고의 액션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견자단의 이런 모습에 한국의 많은 팬들이 무척 반가워했을 것 같다. 그가 들고 온 신작 <천룡팔부>는 주지하듯 중국 무협의 전설 김용의 대표작 중 하나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김용과 견자단이라는 초특급 작가에 최고의 액션스타, 그리고 국내에 수많은 무협 매니아들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한번 쯤 크게 흥행이 될 것도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견자단의 적극적인 홍보활동에도 불구하고 <천룡팔부-교룡전>은 별 화제를 낳지 못하고 금방 밀려나고 말았다. 극장 관객수는 2만 남짓이었다. 필자만 해도 별로 보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 그건 왜 그럴까, 잠시 뒤에 다시 이야기해보록 하겠다.
중국 무협을 말할 때 김용이 빠지지 않는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중국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 중국인들은 그를 중국의 세익스피어라고 칭할 정도로 애정한다. 흔히들 김용, 고룡, 와룡생을 무협 3대 작가라고들 많이 말하지만, 그 영향력으로 보나 작품의 질로 보나 원탑은 단연 김용이다. 그는 잡다한 읽을거리나 서브컬쳐로 치부되며 한수 아래로 접고 보는 무협소설을 한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고, 그리하여 그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평하고 연구하는 이들도 수없이 많다. 그처럼 김용의 무협소설은 여러 의미에서 하나의 이정표다. 무협소설의 사회적, 문화적 의미나 김용 무협소설의 성취 등에 대해서는 기왕에 많은 말들이 있으니 굳이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은 드라마와 영화로 수없이 반복되어 만들어지고 소비된다. 하도 많아 헷갈릴 정도인데, 그래서 앞에 연도를 붙여 몇 년도판 작품 등으로 분류할 정도다. 사실 김용의 여러 무협 작품들은 그 편폭이 방대하고 등장인물들도 수없이 많으며 스토리도 복잡하다.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 감상하려면 중국의 역사와 문화, 즉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 안에는 또한 수많은 로맨스와 별의별 인연과 복수가 얽히고설켜 있어 굴곡진 스토리텔링이 계속 이어진다. 요컨대 간단치가 않다.
다음으로 김용 소설과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 대한 개인적 추억과 의견을 조금 이야기해본다. 80년대 한국 출판계의 한 이슈였던 『영웅문』에 대해 한마디 안할 수 없다. 필자도 『영웅문』을 통해 그를 처음 접했다. 당시 정식 판권 계약도 없이, 그의 사조 삼부곡을 한데 묶어 출판한 『영웅문』은 무려 80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나는 80년대 말,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자율학습 시간에 『영웅문』을 좀 읽었던 것 같다. 밤 12시까지 강압적으로 이어지는 지루한 자율학습, 그 지긋지긋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영웅문』도 그때 읽었던 책 중의 하나였다. 요약하면 대략 순진하고 어리버리한 주인공이 여러 역경을 겪고 마침내 무공을 쌓고 무협으로 성장해가는 스토리인데, 그 안에 수많은 인물들, 다양한 공간들, 가족과 문파, 국가와 민족, 인연과 원한이 얽히고설키면서 대서사시를 이룬다. 그 시절 김용의 소설은 무협소설의 대체적인 기능이 그렇듯, 현실을 벗어난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일종의 판타지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그렇다고 푹 빠져서 『영웅문』 전체를 열독한 것은 또 아니었다. 그냥 읽다 말다하다가 또 읽고 하는 정도였다. 한창 혈기왕성한 사춘기 시절엔 무협소설 외에도 읽을거리들이 많았다. 일본 대하소설 『대망』도 읽었고 이문열의 『삼국지』, 황석영의 『장길산』, 최인호의 『불새』 등등 이런저런 소설들을 많이도 읽었다. 김용의 『영웅문』도 딱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후에도 김용의 소설을 따로 더 읽은 적은 없다.
그렇다면 그의 소설을 옮긴 드라마나 영화는 어떨까. 수없이 많은 김용 소설 원작의 드라마, 영화가 있지만 이상하게도 딱히 깊은 인상이 없다. 드라마는 내 취향이 아니니 따로 챙겨본 적이 없고, 몇편을 지나가듯 본 적이 있지만 역시 유치찬란하다는 인상만이 좀 남아있다. 이상하게도 그의 무협소설이 영상화된 것 중에는 별로 잘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는 양조위가 나온 몇 년도 판이 좋네, 유덕화 버전이 좋네, 이연걸 버전이 좋네 하며 나름의 이유를 대지만 나는 별로 동의가 되지 않는다. 그냥 소설이 훨씬 좋았다는 기억이다. 영화는 어떨까. 영화 쪽으로는 1990년작인 <소오강호>와 비슷한 시기의 <동방불패>가 좀 괜찮다 싶고, 작품 속 인물인 동사와 서독을 데려다 왕가위 식으로 만든 <동사서독>이 그나마 좋아하는 작품이다.
두서없는 논의를 간략하게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필자는 80년대 고교시절 김용의 무협소설을 좀 접했고, 그를 통해 얼마간의 재미와 중국에 대한 이런저런 상상을 해 보았다. 무협소설을 한 단계 끌어올린 김용의 성취와 문화적 현상,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적극 동의하고 깊은 흥미를 느끼지만, 개별 작품 하나하나를 다 읽을만큼 작품 자체에는 큰 재미를 느끼진 못했다. 영상도 그렇다. 영향력이 큰 만큼 그의 작품들을 영상화하려는 시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원작이 거대할수록 그 작업이 어렵다는 것을 김용 소설을 통해 재차 확인한다. 대개 스토리를 충실히 따라가려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어떤 새로운 성취, 지평을 열기가 어렵다. 요컨대 소설과 영화는 문법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감독에 의해 다각적으로 변주, 재해석의 작업이 더해져야 영화만의 창의성이 생길 수 있는 것이고 볼만한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이번 견자단의 <천룡팔부-교봉전>이 안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자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꼽는 중국 무협영화를 좀 열거해보도록 하겠다. 물론 개인적 주관과 취향이 반영된 선별이지만, 여기서 거론하는 작품들이 무협영화의 수작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하다. 6, 70년대 작품으로는 <대취협>, <협녀>, <용문객잔>, <독비도>, <금연자>, <대자객>, <유성호접검>, <자마> 등을 꼽아본다. 8, 90년대는 <동사서독>, <황비홍>, <신용문객잔>, <소오강호>, <동방불패>, <칼>, 2000년대 이후로는 <와호장룡>, <영웅>, <야연>, <칠검>, <금의위>, <명장>, <검우강호> 정도를 꼽아본다.
쓰다 보니 더 하고 싶은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일단 여기서는 이 정도로 마무리 짓는다. 무협과 무협영화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들, 예컨대 그 연원과 범주, 계보, 그리고 앞서 열거한 영화들을 포함해 다뤄볼 만한 무협영화들에 대해서는 추후 따로 단행본으로 엮어낼 계획이다.
※ 상단의 [작성자명](click)을 클릭하시면 저자의 다른 글들을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