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접경한 14개 국가들 가운데 중앙아시아 3개국이 아마 가장 낯선 국명일 것이다. 이 세 나라 이름이 정리되고 나면, 나머지 국가들은 일상에서 흔히 들어볼 수 있고 위치도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말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14개 국가 이름을 이렇게 기억한다. 왕년에 ‘동멸갈꽁전고가’를 외우던 가락으로──동해에서 잘 잡히는 생선들이 시험에 나온다고 달달 외우던 시절이 있었다──말이다. ‘베라미부네, 인파아-타키카-몽러조’. 무슨 말인지 주문인지 모르겠다고 무시하면 나도 할 말은 없다. 베트남에서 시작하여 시계 방향으로,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들의 첫 글자를 나열한 것이다. ‘타키카’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세 나라 ‘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을 가리킨다. 오늘은 벌써 14개 나라 가운데 10번째 나라인 키르기스스탄까지 왔다.
필자가 수년 전 처음으로 키르기스스탄에 갈 때는 이 나라가 어디쯤 있는지를 전혀 몰랐었다. 게다가 주변에 숱한 ‘-스탄’국들이 있고, 중국 경내만 머물다가 ‘서역’으로 들어가자니 이래저래 생소했다. 필자는 한 3년간 이곳에 사는 동안, 이 나라의 동서남북에 있는 나라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7개국의 위치가 익혀졌고, 어느새 길국(吉國)을 중심으로 길국의 변강에 있는 나라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길국(吉國)이란 키르기스스탄의 중국어식 표기 ‘吉爾吉斯共和國(Kyrkyz Republic)’를 줄인 말이다. ‘키르기스’[吉爾吉斯 Kyrkyz, 현지어 발음으로는 ’크르크즈’]는 ‘40’이라는 뜻이다. 40개의 부족이 모여 살게 된 나라[땅]이기 때문이란다. ‘스탄’이 ‘땅’이라는 뜻인데, 우리 고대어의 어두 복자음[s+t > tt /ㄸ/]과 관계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 고대어와 중국 상고음의 관계를 연구할 때 참고가 될 것이다. 어음도 그렇지만 어휘나 심지어 어순도 우리말과 유사성을 보인다고 하지 않나? 친연성이 전혀 없지는 않아 보인다. 생김새도 순수 ‘크르크즈’족은 우리와 별로 구별이 안 된다. 슬라브나 다른 민족의 피가 어느 정도 섞여 있는 경우만 좀 낯설 따름이다. 처음 이 땅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은 ‘다문화’의 진수를 보는 듯했다. 우리나라에서 요즘 ‘다문화’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데, 이 나라에 가보면 소위 ‘다문화’라는 것이 확실히 피부에 와닿는다. 투르크계의 이곳 중앙아시아 각국 언어들은 약 70%가량이 서로 통한다고 한다.
신이 세상을 만들고 각 민족에게 살아갈 땅을 모두 분배했는데, 뒤늦게 키르기스족이 왔단다. 신은 할 수 없이 자신이 살려고 남겨두었던 가장 아름다운 땅을 주게 되었으니 이곳이 바로 키르기스스탄이란다. 그들이 자신들의 땅이 얼마나 빼어난지를 자랑할 때 으쓱하며 들려주는 옛날얘기다. 그래서 그런지 ‘중앙아시아의 알프스’란 좀 상투적인 표현이 그리 지나쳐 보이지 않는다. 수도 ‘비슈케크’든 그리 멀지 않은 교외든지, 어디로 나와 어디에서 사진을 찍든지 그 풍경은 가히 컴퓨터 바탕화면 감이라고 할 정도다. 국토의 40%가 해발 3000m 이상의 산악지형이다. 중국과의 국경에는 천산(天山) 산맥이 펼쳐져 있고, 남쪽 타지키스탄과는 파미르고원에서 만난다. 포베티산은 해발 7,439m로 가장 높다. 지하자원도 풍부하다. 금, 은, 석탄, 아연, 석유, 천연가스 등이 생산된다. 특히 금은 세계 10대 금광에 손꼽힐 정도란다. 여행객들이 선물로 금을 많이 사 간다. 그러고 보니 시장에도 금 상점들이 유독 많았던 것 같다. 또 양질의 석탄이 많아 중앙아시아 최고의 석탄 생산국이라 불린다.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흉노(匈奴)-돌궐(突厥)-몽골-러시아 등에게 2천 년 가까이 시달렸지만,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지금의 독립국이 되었다. 독립 다음 해에 중국과 국교를 맺었으며, 1997년에는 중국과의 교역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중국은 길국의 4번째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
키르기스스탄은 경공업이 발달하지 않아서 생활용품의 80%를 수입에 의존하며, 전자제품은 100%를 수입하고 있다. 고급 제품들은 유럽, 미국, 터키에서 들어오고, 저렴한 상품들은 가까운 중국산이 주류다. 인구 600만의 소국이어서인지 자동차도 생산하지 않으나 도로는 자동차로 몸살을 앓는다. 물론 부유층들이야 신차를 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차량은 세계 자동차 생산국의 중고차들이다. 우리나라의 옛날 대우버스가 한글 표기를 지우지도 않은 채 운행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비슈케크같은 도시에서는 공기 오염 때문에 호흡이 곤란할 정도다. 대기오염의 주범이 자동차 매연이기도 하겠지만, 각 가정의 난방 연료로 폐타이어를 그대로 태우기까지 하니 설상가상이다. 다양한 민족이 다양한 모습을 서로 용인하며 다양하게 살아가는 나라다. 본래 유목민의 후예들이고, 실제로 도시 밖의 삶은 여전히 유목을 주로 하며 산다. 바다를 구경 못 해 본 이들에게 수평선이란 상상의 세계일 뿐이고, 해외(海外)란 그야말로 산해경 속 신화일 뿐이다. 그래도 젊은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세상 물정을 알아가며 외국으로 돈을 벌러 나간다. 대부분 러시아로 많이 가는데 같은 언어권이기 때문이다. 작년 봄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된 러시아 영화 ‘아이카’는 이런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칸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탔던 여주인공은 카자흐스탄 출신 배우이면서 키르기스 여인역을 맡았다.
2016년 8월 30일, 비슈케크 번화가 근처 문방구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비상사태를 알리는 경보다. 2005년과 2010년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시민 혁명을 경험했던 나라이기에 잔뜩 긴장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대사관을 향한 자살 폭탄 테러가 있었다고 한다. 언론에서는 위구르인에 의한 소행쯤으로 보도되었는데, 정확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은 채 사건이 묻혔던 기억이 있다. 불의에 항거하는 키르기스인의 민족성과도 관련이 깊겠지만, 독재로 장기 집권을 이어가는 주변 나라들과는 차이가 있다. 유목민의 DNA와도 관련이 있는지, 이슬람의 일부다처제 용인 탓인지, 아직도 시골에서 보쌈[여인 납치]이 행해지는 풍습 탓인지 양육보다 번식에 능한 키르기스 남성들 때문에 아녀자들이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자존심이 강한 키르기스인이고, ‘김태희가 밭 갈고, 아이유가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 판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미녀들도 많다는 자부심이 있나 보다. 2020년 10월에도 총선 불복 시위가 있었고 급기야 제엔베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대통령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았다. “나는 권력에 매달리지 않는다. 키르기스스탄 역사에서 피를 흘리고 국민에게 총을 쏜 대통령으로 남고 싶지 않다.”
독립 후 약 30년간 3차례의 시민 혁명으로 부정부패 혐의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시민 의식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일상에서 채무 관계에 대한 모호한 태도라든지, 시위 도중에도 약탈을 일삼는 행동 등은 아직도 핏속에 흐르는 유목민 기질 때문일까 싶기도 하다. 물론 러시아의 입김도 있었을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 행정실의 트미트리 코작 부실장이 극비리에 비슈케크로 갔다고 한다. 러시아는 2012년부터 약 2억 5천만 달러를 지원해 주었고, 7억 달러 이상의 채무를 탕감해 주었다. 2021년 8월 키르기스스탄에 1억 달러를 대출해 주기로 한 유라시아 안정화 및 개발기금(EFSD)은 러시아가 주도한다. 거의 매년 푸틴이 연례 행사처럼 방문하기도 한다. 중국도 일대일로 정책으로 키르기스스탄을 돕지만, 키르기스인들은 자신들이 채무를 못 갚는다면 중국이 그 채무를 땅으로 대신 받아낼 심산이라 여긴다. 그래서 “니하오, 고홈!”을 외치며 반중 시위에 앞장서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 군사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2001년에 설치되었던 마나스 미군 공군기지도 임대료를 74배로 올리지 않으면 철수하라고 외쳤다. “우리는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중앙아시아는 특정 국가의 뒷마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지난 2014년에 미군 기지는 철수되었다. 아직도 비슈케크 마나스 국제공항 한 켠에는 미군 주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잠시 살았던 나라 얘기를 쓰자니 자꾸 생각이 많아지고 글이 길어진다. 독자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중국 변강과 키르기스스탄은 현대뿐만 아니라 심지어 2천여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배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온달’이 소그디아 왕국의 온씨였다고 한다. 키르기스스탄 ‘나른’(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접경지대)의 한 유적이 차사국(車師國군) 본영이 있던 곳이라고도 한다. 고선지(高仙芝, ? ~755) 장군보다 700년 앞선 기원후 1세기경 고구려 유리왕의 군대가 차사국에 진출했으며, 병사들은 결국 귀환하지 못한 채 그 지역에 정착했을 것이란다. 그래서 키르기스인들이 한국인과 외모가 비슷했나 싶기도 하지만 억측은 늘 음모론에 빠질 위험성이 있으니 잠시 논외로. 2021년 5월 27일 한국 독지가들의 정성과 노력으로 포클로포카 평원(키르와 카작 접경지대)에 탈라스 전투 기념비가 제막되었다. 한글을 비롯하여, 영어와 중국어, 아랍어, 키르어, 러시아어 등 6개 언어로 다음과 같이 새겨넣었다고 한다. “세계 전쟁사와 문명 교류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탈라스 전투와 전사들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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