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소설 <고래>의 작가 천명관의 영화 연출 데뷔작인 <뜨거운 피>를 보았다. 오래전부터 감독을 꿈꿨다는 천명관의 사연도 흥미로웠고, 몇 년 전 원작 소설 『뜨거운 피』를 재밌게 읽었던 터라 내심 기대가 컸다. 영화는 그럭저럭 볼만했지만, 원작의 재미와 감동을 따라가기엔 어림없었다. 그동안 많은 영화들을 보아오면서 느낀 거지만 소설을 스크린에 옮기면 대개 원작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물론 몇몇 예외는 있지만 말이다.
반면 만화는 좀 다른 것 같다. 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의 경우는 흥행에 성공한 경우도 많고, 만화 못지않게 또는 원작 만화보다 더 볼만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국내의 경우 예를 들어 최근 빅히트한 <신과 함께>, <타짜> 등이 그런 영화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중국영화 중 자연스레 떠오르는 영화가 있는데, 바로 90년대 중후반 큰 인기를 끈 <고혹자> 시리즈다.
<고혹자>는 유명 만화가 마영성의 원작 만화를 스크린에 옮긴 영화인데,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프리퀄과 외전을 더해 7~8편이 만들어졌고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홍콩영화가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하던 90년대 후반의 영화들이다 보니 더 짠한 구석도 있는 영화들이다. <고혹자> 시리즈는 물론 작품성을 논할만한 영화들은 아니고 그저 킬링타임용으로 볼 만한 영화들이라 하겠다. 간단히 요약해 홍콩을 휘젓고 다니는 젊은 건달들, 피 끓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고혹자>는 뭐 하나 터지면 속편과 아류작이 우르르 쏟아지던 시절의 영화다. 1996년에는 2, 3편이 한해에 개봉되어 모두 흥행이 되는 진기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한데, 꽃미남 정이건을 필두로 홍콩의 대표적 개성파 배우들인 진소춘, 오진우, 황추생 등이 스크린을 꽉 채웠다.
다음으로 감독 유위강(劉偉强)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 보자. 유위강은 80년대 촬영감독으로 영화 일을 시작했는데, 왕가위의 데뷔작 <열혈남아>의 촬영감독을 맡았다. <열혈남아>의 세련되고 감각적인 화면은 유위강의 손을 거친 것이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왕가위가 그에게 연출을 권했다고 한다. <고혹자> 시리즈도 마치 뮤직 비디오를 보는 듯하게 빠르고 감각적인 화면이 인상에 남는데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고혹자>의 성공 이후 유위강은 홍콩영화의 CG 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했다고 평가되는 <풍운>의 연출을 맡아 또 한번 흥행 감독의 면모를 보여준다. <풍운> 역시 마영성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풍운> 다음에는 2000년대 홍콩 느와르의 수작으로 손꼽는 <무간도> 시리즈를 공동 연출했다. <고혹자>에 비하면 한층 깊어진 시선으로 홍콩사회의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 어쨌든 유위강의 필모그래피엔 <무간도> 이전 초기 대표작이라 할 <고혹자> 시리즈가 있는 것이다. <무간도>로 더 큰 명성을 얻은 유위강은 많은 홍콩 감독들이 그러했듯 할리우드 진출을 시도한다. 톱배우 리차드 기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트랩>이란 영화인데, 흥행이나 비평적으로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 우리와도 인연이 있는데, 정우성, 이성재, 전지현이 나오는 <데이지>라는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최근까지 활발히 연출 활동을 이어가는 홍콩의 대표적 흥행 감독 중 한 명이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고혹자> 시리즈의 주연 정이건(鄭伊健)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자. 긴 머리와 그윽한 눈빛이 트레이드마크인 정이건 역시 4대 천황급의 인기를 누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도 연기자와 가수를 겸업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배우 쪽으로는 다소 아쉬움이 있다. 꽤 여러 영화에 출연했으나 강한 인상을 나기는 대표작을 꼽기 어렵다고 할까. 그래도 유위강 감독의 영화 속 정이건이 기억에 가장 남는다. 앞서 언급한 <고혹자> 시리즈가 초기의 대표작이라 할만하고, 또 다른 영화를 꼽으라면 역시 유위강 감독이 연출하고 곽부성과 공동 주연을 맡은 <풍운>, 그리고 모터사이클이 소재인 <극속전설> 등이 떠오른다. 정이건은 <신영웅본색>, <묘가천장지구>, <트윈이펙트> 등등 유명 영화들의 아류작에도 많이 출연했지만 대부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최근에는 활동이 뜸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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