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중국의 교육열과 과학기술에 대한 자부심은 그들의 경제력에 대한 자신감만큼이나 드높다. 교육 방면에서는 985공정(1998.5)과 211공정(1995.11~) 등을 통해 천문학적인 중앙정부의 지원이 있었고, 그 혜택은 동북 지역의 최초 민족 대학이었던 연변대학까지 이어졌다. 과학기술의 꽃이요 최종판이라고 할 항공 우주 방면에서도 짧은 기간 안에 우주 굴기(崛起)를 외칠 만큼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신중국 성립 초기부터 있었던 중국 소수민족 지역의 교육 및 과학기술 문제에 대한 회고가 신파조 같은 소리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당시 중국 공산당 정부의 의지와 철학과 결기를 엿볼 수 있다는 면에서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 일부를 간추려 아래에 싣는다.
당의 15대(1997년)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과학기술과 교육 체제 개혁을 심화하여 과학기술·교육과 경제의 결합을 촉진한다. 인재는 과학기술 진보와 경제 사회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원이므로 인재 배양과 활용에 유리한 인센티브 시스템을 잘 세워야 한다. 백년대계는 교육이 기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의 진흥과 사회 전체의 진보는 모두 노동자 소질의 향상과 대량의 고급 인력에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교육 사업 발전을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지력(智力) 개발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소련 학자들의 1975년 (소련) 경제 성장 분석에 따르면 생산 영역에서 교육투자의 수익률이 고정 자산 투자 수익률보다 20%가량 더 높았다고 한다. 전공 지식 향상을 위한 1루블 투자가 1년 내 0.53루블의 이윤을 제공하는 데 반해, 1루블의 고정 자산투자는 0.39루블의 이윤밖에는 못 냈다는 것이다. 불가리아 학자의 연구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는데, 한 국가의 교육비용은 같은 비용 대비 4배의 경제 효과를 낼 수 있으며, 한 국가 수입의 15~20%는 직접적으로 교육에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의 1900~1959년 투자 효과 비교 분석에서도 물질 자본 투자 이윤이 3.5배 증가했는데, 같은 기간 교육투자 증가 이윤은 17.5배에 달했다고 한다. 모든 국가나 사회에서 교육투자가 가장 높은 경제 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천 년간의 봉건 통치는 보수성·폐쇄성과 사회경제 발전의 불균형성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중국 소수민족 교육과 과학기술 사업은 줄곧 낙후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더욱이 근대 제국주의자의 침략과 박해로 대다수의 소수민족은 해방 전야까지 근대 교육 발전 수준에 이르지 못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근대문화와 과학기술조차 갖지 못했다. 어떤 소수민족 지역의 경우 문화·교육·과학기술 사업이 완전히 백지상태여서 콩으로 수를 세고 목각(木刻)이나 결승(結繩)으로 기사(記事)를 표시하는 원시 상태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1949년 이전에는 중국 내 민족 대학이 한 군데도 없었다. 보통교육 역시 극히 박약하여 소수민족의 초중고생은 전국 초중고생 총수의 2%쯤에 불과했다. 칭하이와 같이 다소 큰 다민족 성에서조차 해방 전 소수민족 문맹률이 99%에 달했다. 이처럼 문화교육이 낙후 상태였으니 과학 사업은 더 말할 것이 못 되었다. 이런 국면은 1949년 사회주의 신중국이 건립되고 나서야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교육 방면에서는 첫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적고 문맹률이 높았다. 1990년 전국 제4차 인구조사 통계에 따르면 15세 이상의 전국 인구 중 문맹률이 22.21%였는데, 이 중 한족이 21.53%, 소수민족이 30.83%로 한족보다 9.3% 포인트 높았다. 회족 같은 소수민족은 33.11%였고, 티베트 민족은 더욱 높아 69.39%에 달했다. 둘째, 학교 운영비와 학교 기본 건설 투자 및 교학 설비 등이 매우 부족했다. 소수민족 지구는 일반적으로 생산력 수준이 낮아 경제발전이 완만하고, 지방재정 능력은 약한 데에다가 일부 간부들은 교육 사업을 홀시하였다. 정부가 매년 지원하는 교육 경비는 교사들 월급으로나 사용할 수 있을 뿐 건물 개보수라든지 교학 조건 개선에는 별로 쓰이지 못했다. 교사(校舍)와 교구(敎具) 부족은 많은 소수민족 지구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셋째, 교사들의 자질이 부족하고 소질도 차이가 났다. 소수민족 지구는 교육 기초가 뒤떨어지고 교사 자질이 부족하여 초등학교 졸업생이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중학교 졸업생이 중학교에서 가르치거나, 고등학교 졸업생이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현상이 매우 보편적이었다. 교사 수가 적을 뿐 아니라 질도 낮았다. 예컨대, 1983년과 1984년에 윈난성에서는 성 전체의 초중등 교사를 대상으로 심사를 하였는데, 그 결과 중고등학교 교사 합격률은 27%, 초등학교 교사 합격률은 46%였다. 이 중 추슝[楚雄] 이[彝]족 자치주 1∼3학년 교사 합격률은 2.2%에 불과했다.
과학기술 등 문화 사업은 교육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수민족 지구의 낙후된 교육 사업은 해당 지구 내 과학 기술 인재의 결핍과 노동자의 능력 부족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선진국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각종 문화·과학기술 전문 인재 비율이 전체 인구의 10~15:1인데 반해 중국은 163:1이며, 중국 내에서도 소수민족 지구의 경우는 200~250:1에 지나지 않는다. 80년대 전기 통계에 따르면, 전국 한족은 약 10만 명당 1명의 고급 엔지니어가 있었는데, 소수민족은 약 48만여 명 가운데 1명에 불과했다. 윈난성에 사는 24개 소수민족 가운데 13개 민족은 전문 기술 간부가 1명도 없다. 간쑤성 소수민족 전문 간부는 전성(全省) 전문 간부의 3.5%에 불과하다. 간난[甘南] 티베트족 자치주 간부 중에는 문화교육 정도가 초등학교 이하인 비율이 50%이다. 닝샤 회족자치구의 노동자들은 문화교육 정도가 중학교 이하인 비율이 60%이다. 몽골족·티베트족이 위주인 칭하이성의 광대한 목축 지구에는 총 200여 개의 초원 사업장이 있는데, 가축 1만 마리당 수의사 수가 1명도 채 되지 않아 평균 200만 묘(畝)의 초원에 겨우 1명의 가축 전문 기술인력이 있을 뿐이다. 대단위 원시 삼림이 있어 ‘식물 왕국’이라 불리는 윈난성에도 평균 15만 묘의 삼림에 겨우 1명의 임업 전문가가 있을 뿐이다. 광대한 농촌과 산촌은 농업 기술 전문가의 결핍이 더욱 심각하다.
이에 대한 덩샤오핑의 지적은 정확했다. “현재 중국이 당면한 엄중한 문제는 4대 현대화의 노선과 방침이 맞느냐 안 맞느냐가 아니라 이런 노선과 방침을 실현해 나갈 인재의 부족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어떤 일이든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인재가 많지 않다면 우리의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 4대 현대화를 실천함에 있어도 실력을 갖춘 많은 인재의 양성과 선발이 급선무이다. …… 우리 현대화 실현의 관건은 과학기술의 향상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교육의 진작 없이 불가능하다.” 요컨대, 교육을 수립하는 것이 4대 현대화의 기초이며, 과학기술은 4대 현대화의 관건이고, 교육과 과학기술에 매진해야만 민족 지구 4대 현대화 건설은 이런 새로운 인식과 관념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지원한 결과, 소수민족 지역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갖춘 과학기술 인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20년, 화성(火星) 탐사선 천문(天問) 1호와 달 탐사선 항아(嫦娥) 5호의 발사로 중국 전역이 뜨겁게 달아오를 때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 문창(文昌) 우주 발사장 지휘관 저우청위(周承鈺: 1996~ )는 바로 투쟈[土家]족 출신의 젊은이였다. 마이크로파 원격 센서와 우주 비행 프로젝트 신주(神舟) 4호의 달 탐사 및 인공위성 권위자 강경산(姜景山: 1936~ )은 길림성 용정(龍井)시 출신의 조선족 과학자이며, 시스템과 제어 방면의 최고 권위자 한경청(韓京淸: 1937~2008)은 장백현(長白縣) 출신의 조선족이었다. 로켓 엔지니어로 장정(長征) 4호 총설계사 겸 지휘관이었던 이상영(李相榮: 1941~2008)은 경상북도에서 출생하여 이듬해 부친의 손에 이끌려 만주로 갔던 조선인이다. 남인동(南仁東: 1945~2017)은 2016년 9월 25일, 평생 각고의 노력으로 윈난 부이족·먀오족 자치주 카르스트 저지대에 지름 500m의 세계 최대 전파 망원경(일명 FAST: Five-hundred-meter Aperture Spherical radio Telescope)을 완성하여 ‘중국 천안(天眼)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는 길림성 료원(遼源) 출신의 만족(滿族) 혹은 조선족이라고도 한다. 거액의 연봉을 포기하고 미국에서 귀국한 그의 한마디는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회자 된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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