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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식인’ 언설과 루쉰의 「광인일기」(3)

 

메이지 시대 식인” 언설과 루쉰의 「광인일기」(3)

(明治時代食人言說與魯迅的「狂人日記」, 2011)

 

 

 

리둥무(李冬木)

 

 

  사실상, 문학 작품은 이러한 시대 “흥미”와 “식인” 언설을 담아내는 중요한 도구로, 「인육저당재판」 외에 동시대에 번역된 「수기덕기담」(壽其德奇談)과 뒤에 우화선사(羽化仙史)의 「식인국탐험」(食人國探險), 삽강불명(澀江不鳴)의 「나체여행」(裸體遊行)을 이 방면의 대표작으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인육 고사”는 기이함과 취미에만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신흥 과학 영역의 하나의 언설로도 확장될 수 있다. 특히 미국의 동물학자 모스(Edward Sylvester Morse, 1838-1925)가 건너와 일본에 진화론을 “말과 행동으로 전했”을 뿐만 아니라 “식인”과 관련된 언설을 진화론, 인류학, 법학, 경제학 내지 문명론의 영역까지 끌어들였다. 이것이 바로 이어서 소개할 모스의 오오모리 패총 발견과 관련 보고에 관한 내용이다.

  모스는 미국의 메인 주 포틀란드 시에서 태어나 1859년부터 이 년 간 하버드 대학에서 저명한 해양, 지질 및 고생물 학자 루이 아가시(Jean Louis Rodolphe Agassiz, 1807-1873) 교수의 조교로 일했고 교수의 강의도 청강했다. 이 기간에 마침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의 『종의 기원』(1859)이 출판되었고 모스는 점점 진화론에 빠져들었다. 1877년, 즉 메이지 십 년 6월, 연체동물을 연구하기 위해 사비를 들여 일본 현지조사를 진행했고, 곧이어 일본 문부성의 초빙을 받아 도쿄대학 동물학 및 생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모스는 일본에 진화론, 동물학, 생물학과 고고학을 전수한 최초의 서양인으로, 도쿄대학에 재직하는 기간 진행한 진화론과 동물학에 관한 강의는 도쿄대에서 강의를 들은 제자 이시카와 치요마츠(石川千代松, 1860-1935)가 수업 필기에 기초하여 연이어 정리 출판하여, 『동물진화론』(動物進化論, 만권서방[萬卷書房]에서 1883)과 『진화신론』(進化新論, 동경경업사[東京敬業社]에서 1891)은 모두 일본에서 진화론을 설명한 초기의 중요한 문헌으로 공인받았고, 루쉰이 일본에서 유학한 후 공부한 진화론 교과서였다. 모스 최대의 공헌이자 일본에 와서 거둔 최대 수확은 오오모리 패총의 발견이다. 오오모리 패총은 현재 도쿄 시나가와구(品川區)와 오타구(大田區)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1877년 6월 19일 모스가 기차를 타고 요코하마(橫濱)로부터 신바시(新橋)로 가는 도중 오오모리 역을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눈 앞에 펼쳐진 단층지대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이는 일본의 조몬 시대(繩文時代, 1만 6천 년 전부터 3천 년 전까지)의 패총으로, 풍부한 원시인 생활 흔적을 보존하고 있었고, 모스는 같은 해 9월 16일 도쿄대 학생들을 데리고 발굴을 시작하여 대량의 조개껍데기, 토기, 토우, 돌도끼, 돌쟁기, 사슴과 고래 내지 사람의 인골 등을 수습했고, 뒤에 이는 모두 일본 중요 국가 문물이 되었다. 1879년 7월 모스가 오오모리 패총에 대해 진행한 조사와 발굴의 상세 보고서는 도쿄대학에서 “오오모리의 패총”(Shell Mounds of Omori)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오오모리 패총의 발견 및 모스의 연구 보고는 당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그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출토 인골에 기초하여 만든 추론으로, 이는 곧 일본에 예전에는 “식인 인종”이 거주했다는 것이다. 1878년 6월 그가 도쿄 아사쿠사 수가정(淺草須賀町)의 정심촌루(井深村樓)에서 오백여 명의 청중 앞에서 자신의 이 추론을 처음 꺼냈을 때 “문명개화”의 근대화 노정에 전력 질주하던 “메이지 일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분명히 모든 시대의 문화 대배경 이외에 상술한 모스의 견해는 이후 “식인” 혹은 “인육” 언설의 “과학성” 전개와 관련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4. 모스 이후 식인관련 언설의 전개

  모스의 상술한 견해를 가장 빨리 일본어 텍스트 형식으로 공중에게 보급한 것은 메이지 십이 년(1879) 도쿄대학 출판회가 출판한 『이과회수』(理科會粹) 제1첩 상책으로, 『오오모리 조개무지 고물편』(大森介墟古物篇) 안에 「식인종의 증명」(食人種之證明)이라는 소표제를 달아 모스의 추정을 명확히 적어 놓았으니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어지러이 널브러진 멧돼지와 사슴의 뼛조각 사이로 인골을 발견하곤 했는데 …… 어느 한 구도 순서를 갖춰 놓여있지 않았고, 세계 각지에 있는 조개무지에서 발견되는 식인 유적과 하나 다를 바 없었다. 말하자면 그들 인골 조각은 다른 멧돼지나 사슴의 뼈와 마찬가지로 당장 혹은 뼈를 두드려 골수를 빼 먹으려고, 혹은 솥에 넣으려고 부러뜨렸거나 그 흔적이 선명히 남아 인위적으로 남긴 흔적은 감출 수가 없어, 특히 인골에서 근육이 붙어 있어 부러뜨리기 어려운 부분은 윗부분의 가장 깊은 곳에 남겨지고 손상이 심한 깎인 흔적이 있었다.

  이것은 일본 상고 시대에 식인 풍속이 존재했다고 모스가 추정하는데 관건이 되는 한 단락이다. 생각건대, 이 단락이 사상사에서 점하는 의의는 고고학에서 한 가지 추론보다 더욱 중요한데, 왜냐하면 모스로부터 시작해 소위 “식인”은 반드시 “타자”의 “야만 풍습”이라고 볼 수는 없고, 일본 역사나 일본 정신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자기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하나의 “타자”를 전환하여 “자기”로 바꾸는 문제이다. 일본 과거에 식인 인종이 존재했다는 말인가? 식인의 풍속이 있었단 말인가? 이러한 문제의 배후에는 자기가 식인종의 후예일지 모른다는 당혹스러움이 깔려있다. 사실, 이후 허다한 대표적인 중요 논문과 서적은 모스의 이런 논증과 관련하여 전개되어 “모스”가 바로 뒤에 등장하는 “식인” 언설의 소위 “문제 의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모스에 대한 “반응”과 관련하여 “인류학회”(人類學會)의 성립과 그 학회 잡지에 발표된 관련 문장이 가장 주목된다. “인류학회”는 후에 “도쿄인류학회”(東京人類學會)로 이름이 바뀌어 메이지 십구 년(1886) 2월에 정식 성립되어 『인류학회보고』(人類學會報告)를 발간했고, 뒤에 학회 명칭의 변화에 따라 『도쿄인류학회보고』(東京人類學會報告)와 『도쿄인류학회잡지』(東京人類學會雜誌)로 이름이 바뀌었다. 애시당초 관심을 둔 대상은 “동물학과 고생물학상 인류 연구와 국내외 여러 나라 사람들의 풍속습관과 구비방언, 역사 이전과 이후에 자세히 알 수 없는 고생물의 유적 등” 방면으로 연구하였고, 그 목적은 “인류의 해부, 생리, 유전, 변천, 개화 등을 연구하여 인류 자연의 이치를 밝히는 것”이었다. 분명히 가장 처음에는 “학문을 위주로 하는” 학생 동인들의 단체였다. 하지만 그들의 생물학과 고고학 발굴 방면의 흥미는 “모스 대학 교수가 메이지 십이 년 오오모리 패총”을 발굴하고 채집하여 각종 연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발기인 중 하나인 츠보이 쇼고로(坪井正五郞, 1863-1913)의 소개에 따르면, 그들은 일본 고인류생활 유적에 대해 독립적인 조사와 발굴을 하고 발견한 것에 관해 토론을 전개하여 매월 한 차례 회의를 열었다. 학회가 성립되었을 때는 이미 14차례 회의를 치뤘고 제15차 회의 보고가 바로 『인류학회보고』의 “제1호”로, 성원 역시 당초 4명의 “학우들”에서 28명으로 늘었고 뒤에는 더 많아져 일본 정규 인류학 학술연구기구가 성립되게 된 것이다.

  “식인,” “식인종,” “식인풍습” 등은 당연히 “인류학”이 흥미를 느낀 과제 중 하나로, 회간(會刊)에서 주요 문장과 기사는 다음과 같다(「」는 일본어 원표제 편명이고 『』는 서명이다).

  (1) 이리사와 다쓰키치(入澤達吉, 1865-1938)의 「人肉を食ふ說」(인육을 먹는다는 언설), 제2권 11호, 메이지 이십 년(1887) 1월.
  (2) 마사미치 데라이시(寺石正路, 1868-1949)의 「食人風習に就いて述ぶ」(식인풍습을 취하는 데 대한 기술), 제4권 제34호, 메이지 이십일 년(1888) 12월.
  (3) 마사미치 데라이시의 「식인풍습론보유」(食人風習論補遺), 제8권 제82호, 메이지 이십육 년(1893) 1월.
  (4)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1870-1953)의 「生藩の首狩」(야만 부락의 인두 사냥), 제13권 제147호, 메이지 삼십일 년(1898) 6월.
  (5) 『식인풍습고』(食人風習考, 작자 미상, 마사미치 데라이시를 소개하는 동명 저작), 상동.
  (6) 이노 가노리(伊能嘉矩, 1867-1925)의 「臺灣における食人の風俗(臺灣通信ノ제24회)」(대만의 식인풍습과 대만통신의 제24회), 제13권 148호, 메이지 삼십일 년(1898) 7월.
  (7) 이마이 소조(今井聰三) 초역(抄譯) 「식인풍습」(食人風俗), 제19권 제220호, 메이지 삼십칠 년(1904) 7월.

  이 중 (1)과 (7)은 서방 학자가 “식인”에 대해 진행한 조사와 연구를 소개한 것이고, (2), (3), (5)는 모두 마사미치 데라이시와 관련이 있어, 사실상 “식인” 연구 방면에 있어 메이지 시대에 이론화와 계통화가 가장 잘 된 사람이 바로 마사미치 데라이시이다. 그는 “식인” 관련 사례를 풍부하게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진화론을 적용하여 해석하려 시도했다. 그는 다른 논자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과거에 “식인”했다는 모스의 추정에 그리 동의하지 않았지만 일본 구문헌 가운데 “식인”의 사례를 가장 많이 찾아낸 연구자이다. 1898년 그는 자신의 연구를 모아 동경당(東京堂)에서 「토양총서제팔편」(土陽叢書第八編)을 출판하고 『식인풍속고』(食人風俗考)라 제목을 달았다. (4)와 (6)은 타이완의 “부락”과 “식인”의 현지보고에 관한 것으로 청일전쟁 후 일본이 타이완에 진주한 일과 직접 관련이 있다.

  위에 든 『동경인류학회잡지』에 발표된 문장 외에 “인류학” 방면 서적과 논문으로는 적어도 두 가지를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어, 그 하나는 영국 선교사 존 배철러(John Batchelor, 1854-1944)의 『아이누족과 그 설화』(1900)이고, 다른 하나는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 1879-1946)의 논문 「식인론 ― 식품으로써의 인육을 논함」(食人論 ― 論作爲食料的人肉, 1908)이다. 배철러는 메이지 십육 년(1883)부터 일본의 후쿠오카에서 선교사를 시작했고 아이누족을 면밀히 관찰하고 연구하여, 이 책은 그가 일본어를 사용하여 출간한 아이누 전문서로서 이전에 영어로 적은 논문 내용을 총정리하였기 때문에, 일본 아이누족 연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그중 제2장 「아이누 사람들의 주거」 첫 마디가 바로 다음과 같다. “아이누족은 시초에 일본 전역에 걸쳐 거주했다. 후지산이 바로 아이누족이 이름 붙인 것이다. 아이누족은 에조(蝦夷)에게 쫒겨났다. 아이누족이 바로 인육을 먹던 인종이다.” 그래서 “인육을 먹는 것”이 아이누족의 표식이 되었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경제학자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동아시아에 도입한 중요한 학자이고, 뒤에 중국이 “사회주의”를 추구할 때 젊은 학자들 사이에 매력을 끌어, 1924년 궈모뤄(郭末若, 1892-1978)가 『사회 조직과 사회 혁명』을 번역한 후 다시 또 『자본론』을 번역한 것이 모두 이와 관련이 있다. 1908년 발표한 이 논문은 당연히 “식품으로써”의 경제학 의의를 고려한 것이 아니고 사실인즉슨 그는 뒤에 이 논문을 제목 그대로 “경제학연구”의 “사론”(史論)에 넣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는 사실 이 논문을 통해 그가 특별하게 익숙하지 않은 “인류학” 영역의 토론에 참여코자 한 것이고, 주요하게는 모스의 고대 일본인의 식인 풍속설을 “논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모스와 가와카미 하지메는 서로 삼십여 년의 간격이 있고, 삼십 년이 지나 다른 분야 사람이 이만 자 분량의 장편 논문으로 반박한 것으로 보아 모스의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족히 알만하다 하겠다.

  그 외에, “식인” 언설은 법학 영역까지 연결되어 관련 법률 사유를 낳았다. 같이 배를 타고 표류하다가 식량이 부족하여 동료를 잡아먹은 “국제 사례”를 법학 잡지에서 볼 수 있고, 노인을 부양하는 문제를 탐구한 전문서 가운데서도 역시 “식인”과 관련된 법률 문제에 편폭을 아주 많이 할애하여 다루고 있다. 전자는 원구태랑(原龜太郞)과 안청일(岸淸一)의 『표류박아식인건』(漂流迫餓食人件)이 대표적이고 후자는 노부시게 호즈미(穗積陳重, 1856-1926)의 『은거론』(隱居論)이 대표로, 앞서 언급한 가와카미 하지메의 논문 역시 이 두 가지 자료를 광범위하게 인용하고 있다.

  요컨대, “식인” 언설은 신문 매체와 문학 작품에 실려 메이지 시대를 통틀어 하나의 “흥미”가 되었고 일반 사회에서도 연속하여 동시대 학술 문제의 하나로 고고학, 진화론, 생물학, 인류학, 민족학, 사회학, 법학 내지 “문명론” 등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모스는 의심할 나위 없이 이러한 전개 양상에 있어 유력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러한 전제 아래 그다음 내용은 더욱 구체화 되어 또 다른 문제에 이르게 되니, 이는 바로 메이지 시대 “식인” 언설 가운데 “지나”(支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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