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중국 무협영화의 여제 정패패(鄭佩佩)가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패패를 이야기하자면 가장 먼저 <대취협>을 거론해야 할 것 같다. 1967년작인 이 영화는 무협영화의 전설 호금전(胡金銓) 감독의 작품이자 정패패의 첫 주연작이다. 또한 쇼브라더스에서 만든 수많은 무협영화 중 처음으로 메가 히트를 기록하며 쇼브라더스의 중흥을 이끈 명작이다. 국내에서는 <방랑의 결투>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고, 역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정패패는 <대취협>에 이어서 또 다른 전설 장철(張徹) 감독의 화제작 <금연자>에도 출연하여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굳힌다. 당시 <독비도>로 아시아 톱스타가 된 왕우(王羽)가 무협영화의 황제였다면, 여자로서는 정패패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 검의 여왕, 무협여제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렇게 6, 70년대를 풍미했던 정패패는 잠시 영화계를 떠나있다가 80년대 말에 다시 은막에 복귀했고, 2000년 작품인 <와호장룡>에 푸른 여우 역으로 출연하여 건재를 과시한 바 있다.
정패패는 발레를 배운 전력을 십분 활용하여 우아하면서도 힘 있고 빠른 액션으로 데뷔하자마자 톱스타가 되었다. 남자 배우들 일색이었던 무협영화에서 여협객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주었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6, 70년대는 쇼브라더스를 중심으로 소위 홍콩 무협영화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다. 물론 정패패뿐만 아니라 다른 여배우들도 무협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인기를 끈 바 있다. 가령 전설적인 작품 <협녀>와 <용문객잔>에서 주인공을 맡은 서풍(徐楓)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금의대협> 등의 무협영화에서 원톱 주연을 맡았던 하리리(何莉莉), <14인의 여걸>의 능파(淩波), <철수무정>에 출연한 리칭(李菁) 등은 당시 무협영화에서 당당히 주연급으로 자리매김한 여배우들이다.
무협영화에서 여성 협객이 활약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생소할 수도 있겠으나 이 여협, 혹은 협녀의 이야기는 사실 역사가 꽤 오래된 것이다. 가령 가깝게는 청나라의 <아녀영웅전>이 여협객의 이야기이고, 멀게는 당나라의 <섭은낭>도 협녀에 관한 이야기다. 잘 알다시피 섭은낭 이야기는 몇 년 전 대만의 거장 허우샤오시엔(侯孝賢)에 의해 영화화 되기도 했다. 호금전의 무협영화 걸작 <협녀>도 청나라 기담집 <요재지이>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답답한 봉건사회에서 그중에서도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협객이 되어 불의에 맞서고 악당을 처단하는 이야기는 더욱 큰 통쾌함과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이다.
자, 이제 시간을 좀 돌려서 필자가 극장에서 동시대적으로 만났던 무협영화 속 협녀들을 좀 이야기해보자. 역시 가장 먼저는 중성적 매력으로 폭발하는 카리스마를 뿜었던 임청하(林靑霞)가 떠오른다. 사실 임청하는 73년에 데뷔하여 청초한 미모를 무기로 소위 청순가련의 여주인공으로 스크린을 누빈 배우였다. 그러다 1983년 서극(徐克)의 SF무협 <촉산>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몇 편의 무협영화에서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임청하 하면 역시 <동방불패>가 가장 인상적이고, 이어서 <신용문객잔>, <백발마녀전>, <절대쌍교>, <육지금마>, <동사서독> 등에서 엄청난 매력과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극중에서 임청하는 이연걸(李連杰), 유덕화(劉德華), 장국영(張國榮) 등 남자 톱배우들과 멋진 케미를 보여주었고 특히 중성적 매력으로 관객들에게 어필했다. 30년 전 결혼과 동시에 은막에서 은퇴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작년에는 금마장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양자경(楊紫瓊)도 무협영화 속 여주인공으로 빼놓을 수 없다. 양자경에 대해서는 따로 다룬 적이 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양자경표 협녀를 제대로 보여준 대표작으로 <와호장룡>과 <검우강호>을 꼽고, 흥미로운 건 양자경 역시 정패패와 마찬가지로 발레를 전공한 경력이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와호장룡>과 <영웅>, <연인> 등의 무협 대작에서 빼어난 무술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장쯔이(章子怡)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 보겠다. <와호장룡>에서 가장 격렬한 액션을 보여준 배우가 장쯔이다. 신예 장쯔이는 극중에서 양자경, 장진, 주윤발과 대결을 벌이면서 화려하고 강렬하며 또 때로는 부드러우면서 우아한 액션을 선보이며 시선을 잡아끈다. 장예모(張藝謀)의 <영웅>에서 낙엽 지는 숲속에서 장만옥(張曼玉)과 벌이는 대결도 아름다웠고, <연인>에서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무공을 보여주며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장쯔이 이후 무협영화에서 강렬한 인상을 준 여주인공이 없는 것 같다. 몇 년 전 디즈니의 실사영화 <뮬란> 속 유역비(劉亦菲)를 떠올려 보았지만, 역시 좀 약하다는 생각이다.
정패패부터 장쯔이까지, 중국 무협영화에서 통쾌하고 멋진 활약을 보여준 협녀들, 무협여제들이 있었다. 그 뒤를 잇는 협녀들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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