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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식인’ 언설과 루쉰의 「광인일기」(4)

 

메이지 시대 “식인” 언설과 루쉰의 「광인일기」(4)
(明治時代“食人”言說與魯迅的「狂人日記」, 2011)

 

 

리둥무(李冬木)

 

 

5. “지나인이 인육을 먹는다는 언설”

  메이지 시대 전체 “식인” 언설 가운데 소위 “지나인이 인육을 먹는다는 언설”은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식인”이라는 화두 혹은 논의과 관련된 기록은 중국 역사상 관련 사료에 풍부한 소재로 남았다. 사실 모스가 과거 일본에 “식인 인종”이 존재했다는 추정을 내린 후 가장 먼저 반향을 보인 논문이 바로 간다 다카히라(神田孝平, 1830-1898)의 「지나인이 인육을 먹는다는 언설」로 메이지 십사 년(1881) 12월에 『동경학사회원잡지』 제3편 제8책에 발표되었다.

  간다 다카히라는 메이지 시대 지식 엘리트 선두 그룹의 일원으로 관료이자 학자이며 메이지 개화기 계몽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는 『메이로쿠 잡지』에 “재정”, “국악”, “민선의원”, “화폐”, “철산”(鐵山) 등 문제에 대해 광범위한 논술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선배들의 국가학술기구, 즉 일본학사회원(日本學士會院)의 7명 발기인 가운데 하나일뿐더러 초대 회원 21인 가운데 하나였고, 부회장과 간사를 역임했다. 츠보이 쇼고로 등 학생들이 주동하여 “인류학회”를 창립할 무렵 그는 “효고현 사족”(兵庫縣士族)의 신분으로 후학을 이끌고 『인류학회보고』 학회지의 “편집 겸 출판인”을 역임함은 물론 이 학회지에 39편의 글을 발표하여 일본 근대 “인류학”의 기원과 발전을 위해 일한 추동자가 되었다.

  “지나인이 인육을 먹는다는 언설”은 간다 다카히라의 중요한 논문으로 모스의 보고를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모스에게 간접적으로 반향했다고 여겨지며 그가 문제를 제기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야만인이 사람을 먹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닌데 “문명국이라 자칭하며 인의도덕으로 스스로 고귀하다고 표방하”는 “지나”는 자고로 군신자민(君臣子民)이 인육을 먹었다는 역사 기록이 끊이지 않으니 이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이는 확실히 그 시절 인류학이 당면한 문제였으며 동시에 역사학과 사회학 그리고 문명론이 당면한 문제이기도 했다. 38년 후 우위(吳虞, 1872-1949)는 오사신문화운동 시기 루쉰 「광인일기」의 모티프를 빌어 “식인”과 “예교”를 중국 역사상 대립하면서도 병진하는 두 가지 항목으로 제기했으니 그 정신은 바로 이와 동일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간다 다카히라는 위에 제기한 문제에 별생각 없이 대답한 것처럼 보이는데, “식인”의 방법과 원인, 그리고 특히 “식인”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 논문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문헌 인용이 고밀도로, 전문 2600자에서 “식인” 예증이 23개에 달하여 평균 100자에 하나꼴로 실례를 들고 있으며, 문헌학 방법에 있어 인류학 연구 영역을 도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영역에 맞는 새로운 참조체계를 제공하고, 동시에 이후 “지나인이 인육을 먹는다는 언설”을 기본 골격으로 삼아 “식인” 연구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번역문 한 단락을 들어 전체를 가늠해보자.

 

지나인 가운데 인육을 먹는 사람이 사실 많지만 먹는 이유를 따져보면 하나가 아니라 기아로 인해 먹는 사람, 화나서 먹는 사람, 취미로 먹는 사람, 병을 고치기 위해 먹는 사람 등이 있다. 조리법 또한 여러 가지로, 잘게 썰어 날것으로 먹으면 우리나라 쓰시와 같고, 말려서 포로 먹으면 우리나라 건어물과 같고, 삶아서 죽으로 먹거나 쪄서 먹거나 가장 많게는 소금에 절이는 방법이다. 소금에 절이는 것은 장조림(肉醬)이라 주석이 달려있으며 또 다른 주석에는 고기를 그늘에 말린 후 잘게 썰어 누룩에 소금을 부어 좋은 술로 담근 후에 병에 담아 백 일을 두면 만들어지니 대략 우리나라 오다와라(小田原)에서 만든 시오카라(鹽辛)라 하겠다. 지금 가장 비근한 역사 기록을 몇 개 옮겨 적으니 참고 자료로 삼을 수 있다. 지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예는 은 주왕(紂王)을 들 수 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은 주왕은 구후(九侯)에게 노하여 그를 고기젓으로 만들었고 악후(鄂侯)가 이를 따지자 육포로 만들었다. 만약 유명한 폭군에만 해당하는 경우라면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평생 인육 맛을 좋아하고 먹는 데 습관이 들지 않았더라면 어찌 고기젓을 만들고 육포를 만들어 식용으로 삼는 등의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당시 풍습 가운데 인육을 식용으로 삼는 경우가 있어 좋아하고 먹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 후 제 환공(桓公) 또한 인육을 먹었다 ……

 

  이후 일본과 중국 그리고 세계 각국의 고대 문헌에서 새롭게 발견된 “식인”을 예증하는 연구는 “간다 다카히라”를 분명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간다의 이 선행 연구 논문으로부터 대부분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지나” 관계로 말하자면 간다 다카히라를 포함하여 중요한 문헌은 다음과 같다.

 

(1) 간다 다카히라의 「지나인이 인육을 먹는다는 언설」, 『동경학사회원잡지』 제3편 제8책, 메이지 십사 년(1881) 12월,

(2) 호즈미 노부시게의 『은거론』, 철학서원(哲學書院), 메이지 이십사 년(1891),

(3) 마사미치 데라이시의 『식인풍속고』, 동경당, 메이지 삼십일 년(1898),

(4) 미나카타 구마쿠스(南方熊楠, 1867-1941)의 『일본 기록에서 보이는 식인의 흔적』(The Traces of Cannibalism in Japanese Records), 메이지 삼십칠 년(1903) 3월 17일 영국 『네이처』(Nature) 잡지에 투고했으나 미발표,

(5) 하가 야이치(芳賀矢一, 1867-1927)의 『국민성십론』, 동경부산방(東京富山房), 메이지 사십 년(1907),

(6) 구와바라 지츠조(桑原騭藏, 1871-1931)의 「지나인의 인육을 먹는 습관」, 『태양』(太陽) 제25권 7호, 다이쇼 팔 년(1919),

(7) 구와바라 지츠조의 「지나인의 인육을 먹는 풍습」, 『동양학보27』 제14권 제1호, 동양학술회, 다이쇼 십삼 년(1924) 7월.

 

  미나카타 구마쿠스를 제외하고는 후속 연구 논문은 두 가지 기본 공통점이 있어, 그 하나는 간다 다카히라가 제기한 사례를 반복하거나 보충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간다 다카히라가 제기한 문제를 계속 논증하고 확인하고 있어, 곧 “인육을 먹는 것은 지나 고유한 풍습”이라는 것이다. “표2”는 관련 문헌에서 보이는 “지나” 사례의 통계 대조표이다.

 

[표2] 각 문헌에 보이는 “지나” 사례 수량 대조표

 

  (1)에 대하여, 간다 다카히라의 최대 공헌은 중국 고대 문헌에 기재된 내용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상기시켰다는 것으로, 『사기』와 『좌전』을 비롯해 사조제(謝肇淛, 1567-1624)의 『오잡조』 등은 이후 논자들이 반드시 인용하는 문헌으로, 그 뒤 40년 후 구와바라 지츠조조차도 그가 창조적인 공헌을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2)에 대하여, 위에서 언급했듯이, 호즈미 노부시게의 『은거론』은 근대 “법리학”의 각도에서 일본이 과거로부터 전승한 “은거제”(隱居制)를 다룬 전문서이다. 소위 “은거”란 구체적으로 노인이 사회생활로부터 물러남을 가리켜, 노인 봉양과 가족제도까지 언급하여, 제1편 「은거기원」(隱居起源)은 다시 4개의 장으로 나뉜다. 제1장 「식인 풍속」, 제2장 「노인 살해 풍속」, 제3장 「노인 유기 풍속」, 제4장 「은거 풍속」이다. 표제로부터 알 수 있듯이 노인이 “은거”할 수 있는 시대가 오기 전에는 많은 경우 먹히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버림받는 운명을 맞았다. 제1편에서 “지나”의 사례 10개를 가져왔는데, 그렇다고 중국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세계 각국의 사례들을 뒤섞었다. 위에 소개한 가와카미 하지메가 『식인론』을 지을 때, “지나의 식인 풍속이 미상”인 고로 이 저작에 실린 사례를 인용했다.

  (3)에 대하여, 『식인풍속고』는 마사미치 데라이시가 이전에 『동경인류학회잡지』에 발표한 두 편의 논문에 기초하여 다시금 정리하고 확충한 전문서로, 메이지 시대 전반에 걸쳐 “식인 풍속”에 관한 연구 가운데 가장 체계적이고 이론화된 저서이다. “지나”의 23가지 실례를 골라 일본과 세계 각국의 사례와 같이 편집하여 그 가운데 가장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이 책이 일본 국내 문헌을 가장 많이 예증한 연구 저서라는 점이다.

  (4)에 대하여, 미나카타 구마쿠스는 일본 근대의 저명한 박물학자이자 민속학자로, 1892년부터 1900년까지 런던에서 공부했는데, 1897년 손중산(孫中山)과 런던에서 알게 되어 손중산이 “해외지기”(海外知己)라 보았기에 중국혁명사와 관계를 맺은 일본인이 되었다. 모스, 호즈미 그리고 마사미치 등 선행 연구의 계도 아래 미나카타 역시 “식인 연구”에 관해 흥취가 농후하여, 1900년 3월 “일본인이 식인한 일”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여 6월 「일본인이 태곳적 식인했다는 언설」이라는 논문을 완성하였고, “인용 서적은 71종이다”(일본 22, 중국 23, 영국 16, 프랑스 7, 이태리 3). 위에서 열거한 논문은 그가 귀국 후 영국 『네이처』 잡지에 투고했고 출판되지는 못했지만, 일본 “식인” 연구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논문이다. 미나카타는 모스의 견해를 지지한 몇 안 되는 일본학자 가운데 하나로, 일본의 “식인” 문헌 조사에 객관적 태도를 견지하여 중국에 대해서도 역시 문화적, 인종적 편견을 보이지 않았다.

  (5)에 대하여, 하가 야이치가 제공한 12개의 “지나” 사례는 말 그대로 그 의도는 “인류학” 혹은 기타 학문 영역에 있지 않고 “국민성”을 설명하는 데 있었기에, “식인 풍속”으로 “국민성”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 문헌으로 삼았고 바로 이 이유로 루쉰과 직접적 관련을 맺게 된다(후술).

  (6)과 (7)은 역사학자 구와바라 지츠조의 전문 연구 논문으로, 루쉰의 「광인일기」 발표와 같은 시기라 할 수 있지만 「광인일기」보다는 늦기 때문에, 주제와 소재 면에서 모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구와바라를 언급한 이유는 메이지부터 다이쇼 시기에 걸쳐 “지나인이 인육을 먹는다는 언설”을 집대성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연구가 동일 계열에서 간다 다카히라를 계승했다고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지나인 가운데 인육을 먹는 풍습이 있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문제가 아니라 남송 조여시(趙與時, 1172-1228)의 『빈퇴록』(賓退錄)과 원말송초에 나온 도종의(陶宗儀, 1329-1412)의 『철경록』부터 시작하여 명청 시대 지나 학자의 수필과 잡록에서 식인 사실의 단편적 소개와 평론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게 보인다. 일본 학자 가운데 이들 사실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동경학사회원잡지』 제3편 제8책에 실린 간다 다카히라의 「지나인이 인육을 먹는다는 언설」 한 편은 특히 걸출하다 하겠다. 걸출하다 하더라도 물론 충분하지는 않은 정도이다.

 

  바로 간다 다카히라의 “걸출”하지만 “불충분”한 연구 기초 위에서라야 그가 “이전 사람들이 논한 것보다 진보”가 있었고, 예전에 “전해진 사실”에 대해 더욱 충분하고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해석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지나인이 인육을 먹는 풍습”에 대해 “역사적으로 규명”했다는 것이다. 200개 이상의 사례를 인용하여 간다가 든 사례보다 8배가 많을뿐더러 기존에 있었던 사례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특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서방 문헌 가운데 동시대의 기록을 대량으로 인용함으로써 “지나” 문헌 속의 상관 내용을 증명하는 데 사용한 사람은 구와바라 지츠조가 최초라는 것이다.

  이상으로 알 수 있듯이, “지나인이 인육을 먹는다는 언설”은 간다 다카히라에서 비롯했고 구와바라 지츠조에서 완성되어, 그 주요 작업은 중국 역사에서 “식인” 사실의 조사와 확인으로부터 “지나 식인” 언설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적인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루쉰전집』에서 언급한 “식인”했다는 사실이 이 언설의 범위를 뛰어넘을 수 없었고, 심지어 소설 「약」(藥)에서 묘사하는 “인혈 만두”도 포함하여, 「광인일기」의 “식인” 모티프가 이와 같은 틀에서 탄생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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