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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다시 보기 20] 일망타진(一網打盡), 개혁파 정적들을 일시에 제거하다

 

  뉴스나 신문 등에서 일망타진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 번 그물을 쳐서 고기를 다 잡는다는 뜻으로, 어떤 무리를 한꺼번에 모조리 다 잡음을 이르는 말이다. 주로 범죄, 불법, 적군, 정적 등 제거하거나 타도해야 할 대상을 일거에 처리했을 때 사용한다. 글자를 한 자 한 자 뜯어보면, 마치 한 가득 물고기를 잡은 어부의 기쁨에서 나온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일망타진이라는 말은 송대(宋代) 신구(新舊) 정치세력의 대립과 정파 간의 투쟁이라는 배경에서 등장했다.

  송대 초기에 관료사회는 정치적 견해와 주장에 따라서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다. 특히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며 신종(神宗)의 지지까지 얻은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이 등장하면서 정치권은 신법당(新法黨, 개혁파)과 구법당(舊法黨, 보수파)으로 양분되었고, 두 당의 갈등이 빚어낸 복잡하고 심각한 사건과 상황이 수 십 년간 지속되었다. 심할 때는 양당이 교대로 집권하는 20년 동안 내각이 17차례나 바뀌었고, 인종(仁宗)→영종(英宗)→신종(神宗)→철종(哲宗)을 거치는 내내 신구는 일진일퇴하며 극렬하게 대립했다. 당연히 상대 당의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아예 제거하려는 갖가지 시도들이 수시로 이루어졌다.

 

 

신법당과 구법당의 대립

  인종 때에 신법당의 실력자였던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재능 있는 청년 소순흠(蘇舜欽, 1008-1048)을 황제에게 천거했고, 소순흠을 만나 본 인종은 그에게 관직을 내렸다. 범중엄은 개혁파가 성공하려면 소순흠과 같이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에 소순흠은 재상인 두연(杜衍, 978-1057)의 사위가 되었다. 소순흠의 정치적 후원인과 장인이 모두 개혁파였고 소순흠 역시 개혁파였다. 이 시기에는 신법당이 세력을 확장하고 정권을 장악한 듯이 보였다. 그러다가 구법당이 신법당 일파를 탄핵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탄핵은 왕공진(王拱辰, 1012-1085)이 주도했다.

  소순흠이 진주원(進奏院)의 감독이었을 때 새신회(賽神會)라는 제례 행사를 준비했다. 소순흠은 진주원의 고지(故紙, 이미 사용한 공문서와 봉투 등)를 판 공금에 자비를 보태고 행사 참여자들에게서 돈을 모아서 연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행사에서 소순흠이 공금을 유용했다는 의견이 나왔고, 게다가 소순흠의 장인인 재상 두연은 당시 청렴결백과 강직함으로 이름이 났던 인물인데, 그의 사위가 이런 불법적인 일에 저질렀으니 재상도 물러나야 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인종도 이런 여론이 일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구법당의 왕진공에게 사건을 조사하도록 시켰다.

 

 

신법당이 일거에 제거되다

  조사 결과 황제는 ‘감수자도죄(監守自盜罪)’라는 죄목으로 소순흠의 관직을 박탈했고 연회 참석자 40여명을 모두 면직, 강등, 좌천시켰고 소순흠의 장인인 재상 두연도 재상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감수자도죄’란 관리가 자신이 감독해야할 나라의 재물을 훔친 죄로 지금으로 하자면 공무원이 저지른 국가 재산 불법 유용이라는 범죄에 해당한다. 이 사건으로 신법당의 인물 상당수가 축출되면서 개혁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소순흠은 매회 개최하던 새신회를 관례대로 진행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빌미가 되어 반대파에게 공격의 틈새를 제공한 셈이 되었고, 신구 정당의 형세는 역전되었다.

 

[그림1] 왕공진의 초상

 

  왕공진은 신법당의 소순흠과 그 일파를 탄핵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물을 한번 던져서 남김없이 모두 잡았다(吾一網打去盡矣.)”

  일망타진이라는 표현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구법당의 입장에서는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혁신을 주장하는 신법당을 모조리 쓸어낼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것이고 드디어 원하는 바를 얻게 되었으니, 왕공진의 저 표현도 참으로 통쾌한 기분에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촘촘한 그물에 걸려서 한 명도 남김없이 일시에 제거했다는 비유가 매우 적절해 보인다.

 

 

타도의 주체가 될 수도, 대상이 될 수도

  정당이나 정파의 대립은 정치에 득이 될 수도 실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만사 모두 그러하듯 적정한 견제와 균형은 발전적인 상생을 가능케 하지만 과도한 대립과 분열은 공멸의 지름길이 된다. 이후에도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 사건에 이르기까지 보수와 혁신의 대립은 지속되었다. 일망타진은 구법당의 승리에서 비롯되었지만, 일련의 역사적 사실을 보면 항상 구법당의 승리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 형국이 반대로 뒤집혀서 오히려 구법당이 신법당의 그물에 잡히는 일도 있었다. 일망타진은 세력을 얻고자 했던 정당 간의 경쟁이 만들어낸 표현이다. 정적에게 쓰던 표현이 지금은 범죄와 불법과 적군에게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정치적 맞상대에 대한 증오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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