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북한 김정은 총비서는 68돌 ‘전승절’(7.27)에 즈음하여 평양 모란봉구역의 조·중 우의탑(북·중 우의탑)을 참배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의 기치를 높이 들고 가열처절한 나날들에 ‘우리 군대와 어깨 겯고 싸운’ 지원군 장병들의 참다운 전투적 의의와 무비의 희생정신은 위대한 전승의 역사와 우리 인민의 기억 속에 역력히 새겨져 있다. …… 우리 공화국이 가장 혹독하고 힘든 고비를 겪을 때 우리 인민의 성스러운 역사적 투쟁을 ‘피로써 지원한’ 중국 인민의 고귀한 넋과 공적은 번영하는 사회주의 조선과 더불어 불멸할 것이다. …… ‘혈연적 유대로 맺어진’ 조중친선(朝中親善, 북중친선)은 공동의 위업을 위한 한길에서 대를 이어 굳건히 계승될 것이다.” 시진핑 중국 주석도 금년 8월 16일 랴오닝[遼寧] 진저우[錦州]의 랴오선[遼沈] 전투 기념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동북 인민은 랴오선 전투 승리와 동북 해방에 거대한 희생을 치렀을 뿐 아니라 신중국 건설과 ‘항미원조전쟁의 승리’에 거대한 공헌을 했다. 당과 인민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국은 6.25를 내전으로서의 ‘조선-한국전쟁’과 국제전으로서의 ‘항미원조출국작전(抗美援朝出國作戰)’으로 구분한다. 그들의 구분에 따르면, 조선전쟁은 1950년 10월 24일 북·중 국경인 압록강에서 북한의 패배로 끝났다. 이후 김일성의 지원 요청에 따라 10월 19일 압록강을 통해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 44만 명이 1차로 동원되었고,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지역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날이 바로 중국이 항미원조전쟁 기념일로 제정한 날이자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된 날짜이다.
위의 담화문에서 보듯 중국과 북한은 이 한국전쟁에서 ‘혈맹’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중국은 작년 11월에 채택한 제3차 역사결의에서 항미원조전쟁에 대해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고 기술했다. 2000년 6월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있고 4개월쯤 후, 중국 지도자들이 평양을 대거 방문해 대규모 군중 집회를 열면서 항미원조전쟁 승리 50주년의 조중우의(朝中友誼, 북중우의)를 강조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당시 대규모 중국 병력이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로 이동하던 소리도 기억난다.
지금의 북·중 국경선도 이런 혈맹(血盟)의 기초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1334km(혹은 1344km)의 국경선은 앞서 살펴본 13개 나라의 그 어느 국경선보다 안정적이고 평온하다. 평온할 뿐 아니라 공동 방위의 의지까지도 천명하여 공동의 적에 대해 매우 협조적이다. 탈북민들을 색출하여 임시로 가두어 두기도 하고 강제로 북송하는 친절까지도 보여준다. 요즘이야 대표적인 공동의 적이 미국이다 보니 시의적절하게 항미원조전쟁을 상기하며 ‘항미’에 방점을 두기도 한다. 때로는 남북의 ‘자주적’ 통일 자세에 대해서 견제를 하기도 하지만, 최근의 미·중 패권 전쟁 분위기에서는 미국의 침략 ‘만행’에 대항해 승리한 것을 강조하며 애국과 단결, 자존감을 고취하고 있다. 중국으로서는 한때 백두산 부근의 북한 핵실험으로 인해 국경 지역의 방사능 문제라든지 화산 폭발 위험 등으로 인해 혐조(嫌朝) 현상도 있었다. 심지어 북한을 미국에 이어 중국에 가장 큰 위협을 줄 수 있는 국가로 규정한 보도도 보인다. 외교적으로는 여전히 중국의 우호국이지만 핵미사일 개방 등으로 군사적 ‘가상 적국’에 필적하는 위협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2016년 5월 발행된 ‘가상 적국에 대비한 전시 훈련 가이드라인’에서는 “북한이 핵보유국을 선언하고 많은 핵시설을 국경 인근에 설치해 중국을 인질화하고 있다”라고도 하였다.
위 지도에 대표적인 북·중 국경 도시들이 보인다. 국경선 역시 지도에 보이듯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강은 발원지인 백두산에서 각각 동서로 흐른다. 백두산 역시 국경선이 통과하며 그 정상의 천지(天池)도 국경선이 통과하고 있다. 종전협정 후 19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 김일성과 중화인민공화국 총리 주은래가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은 1964년 3월 20일 베이징에서 의정서(議定書)를 교환함으로써 발효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북한과 중국은 지도와 같이 국경선을 명확히 하여 1800년대 이래 근 100년 동안의 국경선 시비를 종결하였다. 1887년 조선의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 이중하(李重夏, 1846~1917)가 최종 제시한 두만강 발원지 ‘홍토수(紅土水) 국경설’과 거의 비슷하므로 중국 측의 양보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백두산 천지를 북한이 항미원조전쟁에 참여한 중국에게 빚을 갚으려고 절반을 내어 주었다는 설도 있었으나 공식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의정서에는 천지의 경계선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마루의 서남쪽 안부(鞍部-5호 대형 경계 팻말)로부터 동북쪽 안부(6호 대형 경계 팻말)까지를 그은 직선’으로 하여, 천지의 54.5%는 조선에, 45.5%는 중국에 속하게 되었다(제8조). 양측 국경의 총 451개 섬과 사주(沙洲) 가운데 264개(총면적 87.73㎢)는 조선에, 187개(총면적 14.93㎢)는 중국에 귀속된다(제9조 제1항).
압록강변의 단둥[丹東]은 북한의 신의주와 이어지는 주요 국경도시이다. 도로와 철로를 통하는 물동량이 상당하고, 압록강의 황금평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압록강 단교는 미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으로서 끊어진 모습 그대로 보존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그 옆에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 중조우의교(신의주에서는 조중친선다리)라고 이름 붙였다. 지안[集安]은 광개토대왕비 등 고구려 유적지가 산재해 있는 곳으로 북한 자강도(慈江道)의 만포시와 연결되어 있다. 창바이[長白]현은 북한 양강도의 중심도시인 혜산과 마주보고 있다. 백두산은 원래 이도백하(二道白河)에 속하여 조선족자치주에서 관리하던 것을 2000년대 초 길림성 성도인 창춘[長春]시 직할로 넘어가면서 조선족자치주의 관광 수입원이 타격을 받았다. 개산툰(開山屯) 근처의 연길, 용정(龍井), 도문 세 도시를 하나로 묶어 연룡도(延龍圖)라는 광역시로 통합 발전시키려는 계획도 세웠지만 아직 보류 중인 듯하다. 도문은 한반도 최북단 남양(南陽)과 마주한 국경도시로 두만강 다리에 국경선이 그어져 있다. 많은 관광객이 찾으며 최근 두만강 광장도 조성되어 두만강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훈춘 근처의 취안허[圈河] 세관을 통해서도 북한의 온성을 거쳐 라선(羅先: 나진선봉) 특별시와도 교류가 많은 곳이다. 방천(防川)은 중국, 러시아, 북한이 한눈에 들어오는 독특한 곳으로, ‘중국의 변강학’ 연재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여러 접경지역에는 구안(口岸)이라고 적혀 있다. 우리 말에는 없는 단어다. 중국어의 사전적 의미를 따라 항구나 개항지 등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사실 이러한 번역이 적절치 않을 때가 많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대한민국에는 국경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다. 남북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했으니, 만약 북한,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하나의 나라로 인식하면 지금의 판문점이나 휴전선이 국경선 역할을 하겠지만, 아무래도 국경이란 개념으로는 받아들이기 주저된다. 국경 같지 않은 국경, 그것도 철저히 닫혀서 어쩌다 한번 열렸다가 다시 잠기는 특별한 나라에 우리는 산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변강(邊疆)이니 국경이니 하는 단어가 낯설다. 국경을 전문으로 다룬 어느 책에서는 중국어의 ‘口岸’을 ‘국경통과지점’이라고 의역해 실은 것을 보았다. 우리에게도 ‘국경통과지점’이 활성화되어 ‘국경 없는 의사회’ 활동이 실제적이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어느새 반도 남쪽에 갇혀 대륙 세력(북·중)과 해양 세력(미·일) 사이에서 갈등하며 부끄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바로 얼마 전이 112주년 국치일(國恥日, 8/29)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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