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를 넘어 2030년이면 G1이 될 것이라는 중국의 경제. 10여 년 전부터 줄곧 예측되어 온 것. 숱한 경제 지표들을 열거할 필요도 없이 중국은 경제 대국이라는 이름으로 바로 우리 곁에 있다. 경제, 이건 또 무슨 물건인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이 경제라고도 들었다. 쌀독에서 인심 나고,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도 들었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사회계약론에서 시작하여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70~1831)을 거쳐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4)에게서 꽃을 피운 집산주의(集産主義, Collectivism)가 경제 대국 신중국을 이끄는 엔진이 되어 있는 이 아이러니를 나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한중 수교 전인 1990년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기상천외한 현실 앞에서 깜짝 놀란 기억이 새롭다. 두이환취안(兌換券)이라고 불렀다. FEC(Foreign Exchange Certificate)라고도 불렀다. 액면가는 중국 돈과 같은데 외국인들은 이 돈을 사용해야 한단다. 중국 ‘인민’은행에서 발행한 런민비(人民幣)는 중국 인민들만 사용하고, 외국인들은 ‘중국은행’에서 발행한 이 태환권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중국에서는 1979년부터 발행되었다가 1994년에 발행 정지된 ‘돈’ 정책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북한과 미얀마에서도 이런 태환권이 통용되었단다. 북한은 2002년에, 버마는 2013년에 폐지되었다지만. 이는 외화(주로는 USD)가 부족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안정적인 외화 확보를 위해 발행했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라도 흔히 보기 쉽지 않던 희한(稀罕)한 물건이었고, 지우링허우(九零后)들에게는 옆 마을 라떼 꼰대의 헛소리 정도로나 들릴 듯. 불과 30년 전의 괴현상을 뒤로 한 채 중국은 외화 보유고 3조 달러를 넘어선 지 오래란다.
한중 수교 직후 죽의 장막을 여행하게 되신 한국 관광객들께서 동북 지역의 소수민족 지구를 방문하셨단다. 경제력이 의식을 자극했나 보다. 환율 차이와 당시 한중 임금 수준의 차이로 100불이면 제법 힘이 있었다. 현지 가이드에게 USD 100 지폐를 흔들며 너희가 평소에 이런 돈을 만져 보기나 하겠냐며 호기를 부렸단다. 두들겨 맞고 붕대 감고 귀국길에 올랐다는 무용담(?)은 지금 들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우리나라가 7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96년)을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면,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을 신호탄으로 죽의 장막을 걷고 고속 성장의 길에 들어섰다. 1991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에 이어 1992년 장쩌민은 헌법에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명시한다. 2001년에 WTO에 가입하면서 2008년까지 중국 경제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2011년 GDP가 일본을 추월하면서 G2가 되고, 2012년 시진핑이 집권하면서 중국 굴기(崛起)·중국 몽(夢)을 기치로 중국제조 2025·일대일로·국제통화로서의 위안화 등이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다. 2019년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에 진입하여 본격적인 소비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요즘도 혹 중국을 관광하며 100달러 지폐를 흔들다가는 정신병원행이 될 듯하다.
“지대물박, 인구중다(地大物博, 人口衆多)” 중국을 설명하는 여덟 글자다. 앞의 네 글자는 소수민족 지역을, 뒤의 네 글자는 한족을 주로 지칭한다. 인구의 1/14도 안 되는 55개 소수민족이 전 국토의 60%에 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미식별 민족을 포함한 55개의 소수민족을 다 합쳐도 아직 1억 명에는 이르지 않을 듯하다. 2020년 인구조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14억에 육박하는 중국 인구를 고려할 때 인구분포가 고르지 못할 것은 뻔하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대목은 소수민족을 제외한 13억 명 이상을 과연 모두 한족(漢族)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전 세계 8천만 명에 달한다는 저 유명한 객가(客家, Haka)족은 한족의 방계(漢族民系) 정도로 설명하면 그만인가? 객가인뿐 아니라 공식 소수민족으로 신청이나 등록하지 않은 다른 민족들도 자발적 한화(漢化)의 길을 갔거나 가고 있지는 않을까? 소수민족 지구의 경제건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족들이 변강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야 할 텐데, 이는 곧 소수민족 지구의 한화를 촉진하는 것이 아닐까? 경제와 개발과 발전의 이름으로 소수민족 지구는 서서히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경제야말로 민족 현대화의 기초라고 하면서 중국 신시기의 민족 사업 임무라든지, 4대 현대화 촉진은 민족학자들의 영광된 책임이라고 역설하는 것을 들을 때 드는 생각이다.
대표적인 소수민족 지구요 월드 뉴스의 단골로 등장하는 칭하이(靑海)성과 티베트(西藏) 자치구. 각각의 수도인 시닝(西寧)에서 라싸(拉薩)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이것은 칭짱 고속도로(靑藏公路)이다. 총연장 1,937km의 아스팔트 도로이며 1950년 착공하여 1954년에 개통되었다. 그 후 50여 년이 지나 이번에는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다. 서부 대개발의 상징이라고 부를 만한 칭짱철로(靑藏鐵路, Qinghai-Tibet Railway)가 착공 5년 만에 개통되었다(2006.7). 총연장 1,142km에 달하고 해발 4000m 이상 구간만도 80%란다. 이 구간에 건설된 다리만도 640여 개나 된단다. 해발고도가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세계 최고. 세계 철도사의 기적으로 기록되었다. 라싸에서 네팔, 부탄, 인도 접경지역까지 철도를 이어 ‘철도 실크로드’를 만드는 구상도 곧 완성될 텐데, 우리나라는 허리가 잘린 채 유라시아 철도 실크로드 구축이 계속 제자리걸음인 듯해 심히 안타깝다. 유라시아는 고사하고 몇 뼘 안 되는 남북의 끊어진 철도와 도로도 연결하지 못하는 신세가 참으로 가슴 아프다. 테스 형, 우리는 왜 이래?
민족지구 경제건설 문제 해결을 위해 제시한 다음의 여덟 가지 제안들을 들으면서도 위에 드는 생각들은 떨칠 수가 없다. ①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생산 관계의 변혁, ② 낙후된 생산방식과 사상의식의 제거, ③ 각지의 실정에 맞는 생산 방침의 제정, ④ 다종 경영에 의한 종합 발전, ⑤ 과학적 영농과 지력(智力)의 개발, ⑥ 민족 공업의 발전과 일대일 지원 강화, ⑦ 시장경제 발전과 개혁의 속도 내기, ⑧ 국가적 지원과 자력갱생의 조화 등.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 집산주의가 계속되는 한 변방은 영원히 변방으로 남을 텐데. 땅을 옮길 수야 없으니. 참고자료의 일독을 권하며 함께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자료: 林耀華(1997), 『民族學通論』 530~543쪽 – 白振聲 쓰고, 손정일 옮김
중국 사회주의제도의 건립은 민족 압박의 근원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각 민족의 공동 번영과 발전을 위해 가장 유리한 조건을 창조하였다. 그러나 중국 소수민족 지구의 빈곤하고 낙후된 면모를 철저히 고치려면, 후진 민족이 선진민족 대열에 재빨리 올라타서 역사적으로 내려온 경제문화 방면의 불평등을 점차 제거하여 각 민족의 공동 번영을 실현해야 한다. 그 근본적인 사항이 바로 경제발전이다. 이를 위해 민족 현대화 실현을 위한 경제의 역할을 정확히 인식하고, 중국 각 민족 경제문화 유형의 특징을 전면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해야 한다. 역사 유물주의 관점과 실사구시의 과학적 태도로 어떻게 소수민족 경제를 발전시킬 것인지 연구하는 것이 당면한 민족학 연구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이런 연구는 ‘경제 민족학’의 범주에 든다.
1. 경제: 민족 현대화의 기초
一. 중국 신시기의 민족 사업 임무
마르크스주의는 다음 사항을 일관되게 주장한다. 무산계급이 국가 정권을 얻고 특별히 사회주의 제도를 건립하기 위해 각 민족 인민이 주인 역할을 하게 된 이후의 가장 주요한 임무는 생산력을 크게 발전시키고 확고부동하게 사업의 중점을 경제건설에 옮겨서 차츰 전체 인민의 물질과 문화생활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의 소집은 이러한 역사적 전변(轉變)의 표지였다. 이로부터 중국은 경제발전을 중심임무로 하는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신시기에 들어섰다. 중국은 하나의 통일된 다민족 국가이고, 4대 현대화[四化: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 현대화]의 실현은 민족 공동의 목표와 임무이다. 이는 신시기 당과 국가의 민족 사업 임무에도 잘 드러난다. “신시기의 총 노선 총 임무의 집행 관철하고, 당의 민족정책을 굳건히 관철하며, 민족단결을 굳건히 하고, 조국 통일을 공고히 한다. 변강과 소수민족 지구의 안정을 수호하여 각 소수민족 인민의 사회주의 적극성을 충분히 동원하여 중국을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으로 건설해 나가는 데 매진해야 한다. 국가는 현대화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소수민족이 경제와 문화 건설에 가속도가 붙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나아가 공산주의 의식이 있는 소수민족 간부와 각종 전문기술 인재를 적극적으로 배양하고, 역사에 남아 있는 사실상의 불평등을 차츰 제거하여 각 소수민족이 한족의 발전 수준을 따라가거나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보(公報)의 이 말은 낙후된 민족이 번영을 향하여 가는 객관적 규율이며, 중국 각 민족 인민의 공동 염원과 근본 이익을 충분히 나타내 주고 있다.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중국 각 민족이 공동 번영 발전할 수 있다는 큰 희망을 지니게 해야 한다.
二. 현대화에는 소수민족이 필요하고, 소수민족은 현대화가 필요함
중국 다민족 사회주의 대가정 안에서 소수민족 인구는 전국 총인구의 8%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전국 총면적의 60% 이상을 차지하며, 이는 중국 역사 발전에서 형성된 기본적 특징이다. 이런 특징에서 출발해 마오쩌둥은 올바른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소수민족 방면의 지대물박(地大物博)을 한족의 많은 인구와 잘 결합해야 함을 강조했다. 현재 중국의 4대 현대화 대업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 큰 규모와 더욱 긴밀한 방법으로 결합해야 한다. ‘사회주의 현대화는 소수민족이 필요하며, 소수민족은 사회주의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말이야말로 이런 결합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적절하고도 생동감 있게 개괄하고 있다.
현대화에 왜 소수민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걸까? 중국 소수민족은 중국 변강 지역에 비교적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산맥이 연이어져 있고, 그곳의 지질 구조가 복잡하고 다양하여 다른 역사가 싹텄다. 각자 독특한 광화(鑛化) 조건을 지니고 있어서 금속광·비 금속광·가연성 유기암 등 에너지 자원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다양한 종류·많은 매장량· 높은 품질·넓은 분포를 자랑한다. 그중 일부 성이나 자치구는 석탄·석유·희토류·망간·납·수은·크롬·붕사(硼砂)·인석회(磷石灰) 등 지하자원 매장량 방면에서 모두 전국 제일이다. 동시에 산지는 귀한 삼림과 다양한 동식물 자원의 보고이다. 삼림 자원만도 전국 삼림 면적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다민족 지역인 윈난성 경내 많은 고산 협곡의 식물은 한대에서 열대에 이르기까지 수직으로 분포되어 ‘식물 왕국’의 명성을 얻었다. 민족지구에는 드넓은 초원도 있어 그 면적이 전국 초원의 90%를 차지한다. 그곳은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목축업 기지이고 그중에 소와 양 두 종류 가축은 전국 소와 양 총수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말 생산은 전국의 80%, 낙타는 100%를 차지한다. 이런 목축 지구는 중국의 광대한 농촌 농업과 축산업 및 도시와 농촌 육류 식품 공급의 중요한 기지이다. 민족지구에는 많은 평원·고원·하천과 계곡·분지 등이 있어서 여러 대에 걸쳐서 개발되었고, 일찍이 중국의 전통적 농작물 기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곡물은 수량도 많고 품종도 다양하게 완비되어 있으며, 사탕수수·천연고무·찻잎·담배·유동(油桐: 기름 오동)·면화[長絨棉: 섬유질이 가늘고 긴 원면] 등등과 같은 경제 작물은 더욱 특색을 갖추고 전국에서 그 생산량과 질에 있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로 보아 민족지구는 중국 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 현대화의 매우 중요한 원료기지이며, 사회주의 4대 현대화 대업의 중요한 물질적 배경이다. 이 외에 9120만 명의 중국 소수민족은 근면·용감·지혜로워서 사회주의 건설의 중요한 요소이며, 민족지구 4대 현대화 건설의 가장 기본적인 힘이기 때문에 4대 현대화 건설은 소수민족의 지지와 참가를 절대 필요로 한다. 소수민족의 지지와 참여가 없다면 소수민족 지구 경제문화 건설의 신속한 발전도 없고 국가의 4대 현대화도 불가능하다.
왜 소수민족이 현대화를 매우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는 중국 소수민족 사회경제가 해방 전에는 대부분 자본주의 이전의 낙후 상태로 장기간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야 당과 국가의 영도 하에 사회개혁을 거쳐 아주 짧은 십수 년 내에 각종 착취 제도와 원시 공사제(公社制)의 잔재를 폐기하여 역사 발전단계를 한 둘이나 건너뛰게 하였고, 그런 사회경제 구조들이 한족과 대체로 같은 소수민족도 함께 사회주의 사회로 건너오게 하였다. 이는 수백 년 심지어 수천 년을 뛰어넘는 거대한 사회적 비약이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승리한 선진민족 무산계급의 큰 도움 아래 자본주의 발전단계를 피해서 낙후한 민족을 사회주의 이론의 풍부함과 발전으로 건너오게 해 주었다. 그러나 중국 소수민족이 사회주의 제도를 건립한 이후에도 낙후된 경제문화 면모를 일시에 고치기는 어려웠고, 역사상 형성된 민족 간의 불평등한 현실 또한 여전히 뚜렷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사회제도의 비약만을 의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사회주의 제도의 건립은 생산력을 해방하여 새로운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을 위하여 가능성만을 제공하는 것이다. 가능성을 현실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집정(執政)한 무산계급 정당의 정확한 정책과 전국 각 민족 인민의 창조적 노동에 따라 이후 수십 년 내에 한 차례의 큰 비약을 다시 실현해야 한다. 이 비약은 국가가 4개 현대화 과정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각 소수민족이 자력갱생의 기초 위에 경제문화 발전을 가속화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 역사상 남아 있는 사실상의 불평등을 차근차근 없애며 그들이 한족의 발전 수준을 따라오거나 근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소수민족은 현대화를 매우 필요로 하며 현대화가 매우 절박한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회주의 공업화 국가 건설에는 어느 민족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한족 지구 공업의 고도 발전만 있었지, 티베트는 장기간 낙후된 채이고 내몽골 목축구역도 마찬가지였으니 이는 사회주의국가일 수 없다.”
경제발전과 4대 현대화 실현은 세계 민족들 가운데 우뚝 솟은 중화민족이 강대한 물질적 기초를 세우는 것이다. 소수민족 경제발전은 소수민족 지구의 4대 현대화 건설에 속도를 내게 하여 중국 소수민족이 진정한 민족 평등과 번영을 실현하는 것이다.
三. 경제발전과 4대 현대화 촉진은 민족학 종사자들의 영광된 책임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신국면을 열기 위해 중국공산당 제12차 대표대회는 중국 경제건설전략의 목표·중점·순서 등을 확정하고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1981년부터 20세기 말까지 20년간 중국 경제건설의 전체 분투 목표는 경제 효율을 부단히 향상시켜서 전국 농공업의 연 총생산액을 4배, 즉 1980년도의 7100억 위안에서 2000년의 약 2만8천억 위안으로 증가시킨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고무시키는 거대한 계획인 동시에 중국 경제와 사회 발전의 역사와 현상에 대해 충분한 분석 연구 기초 위에 제정된 실사구시요, 중국 국가 정세의 계획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다. 소수민족 경제는 중국 사회주의 국민경제의 중요한 조성 부분으로 전국 농공업 총생산액의 네 배 목표를 실현하는 동시에 소수민족 지구 경제건설의 중요 임무이기도 하다. 그럼 국가의 총체적 계획과 요구에 따라 소수민족 경제와 소수민족 지구의 경제는 어떻게 발전하며,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이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이는 소수민족 사회·경제의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역사와 현상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이고 구체적이며 실사구시적인 분석을 하여 소수민족의 지역적 정황과 민족적 정황에 과학적으로 적합하게 제정해야 한다. 민족학 종사자들은 책임감과 능력을 겸비하여 본 학과의 시각에서 이 영광스럽고 거대한 임무에 대해 자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2. 각지의 구체적인 실정에 맞는 민족지구 경제의 발전
당의 제11차 3중전회 이후 소수민족 지구 경제발전이 대체로 양호하여, 본 지구의 과거와 비교해 발전이 상당히 신속했다. 그러나 전국 발전 수준과는 아직 거리가 있었고, 연해(沿海)의 전진(前進) 지역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욱 컸다. 농공업 총생산액의 증가 폭을 보면, 1950~1983년 전국 농공업 총생산액은 매년 평균 9.2%씩 증가한 데 반해, 민족자치 지역은 7.7%였다. 1988년 전국 인민 평균 농공업 총생산액은 2198위안(元)이었고, 민족자치 지역은 겨우 156위안으로 차이가 1/3이나 되었다. 다섯 소수민족 자치구와 윈난·구이저우·간쑤·칭하이 등 4개 자치구 급 다민족 성(省)의 자료에 따르면, 1986년 1인당 농공업 총생산액 순위는 다음과 같다. 신쟝은 14위, 닝샤는 19위, 간쑤는 20위, 칭하이는 28위, 티베트는 29위로 대부분 전국 평균 수준 이하였다. 이 9개 성과 구 중에서 1인당 평균이 가장 높은 곳은 신쟝으로 997위안이고, 가장 낮은 곳은 티베트로 419위안으로 연해 지역과 비교하면 거의 몇 배의 차이가 난다. 상하이의 일 인당 평균 7661위안은 티베트의 18배 이상이다.
소수민족 지구 경제발전이 전국과 격차가 나는 것은 한편으론 역사와 자연조건 등의 여러 원인을 반영했는가 하면 소수민족 지구 경제발전의 약한 기초라는 객관적 현실을 조성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민족지구 경제발전 가속화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소수민족 경제는 중국 사회주의 경제의 중요한 조성 부분이기 때문에, “소수민족의 경제가 없는 중국 경제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소수민족 지구에는 이전의 어떠한 시기보다도 더욱 빠른 속도의 발전이 있어야만 한족 지구와의 경제발전 격차를 신속하게 줄이고 되도록 빨리 각 민족의 공동 번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신중국 성립 이후의 역사와 실천 경험으로 보아 중국 소수민족 지구 경제와 사회 발전에 속도를 내어 민족 경제 번영을 촉진하려면 다음 몇 가지 방면의 문제를 중시해야 한다.
첫째, 생산력의 발전과 호응하는 생산 관계의 변혁. 소수민족 지구의 민주개혁과 사회주의 개조의 완성은 새로운 사회주의 생산 관계의 기초를 확립하여 각 민족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 광활한 전망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과거 비교적 오랜 기간, ‘좌’의 간섭으로 전국적으로 생산 관계의 변혁이 보통의 상궤(常軌)를 벗어나는 속도를 보였다. 그러나 전국과 비교해서 소수민족 지구의 생산력 발전 수준은 매우 낮았다. 예컨대, 생산력의 중요 내용 가운데 하나인 생산도구를 볼 때 광대한 농목 지구는 대부분 지금까지도 전통적인 큰 칼·호미·곡괭이·쟁기·도리깨 및 우마차 등 천년이나 이어온 재래식 도구나 부분적으로 개량된 농구 정도로 기계화되어 있지 못했다. 노동 기술적인 면에서도 민족 지구의 과학기술 수준은 매우 낮고, 경영관리 인재가 부족하며, 어떤 마을은 심지어 기록원이나 회계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자연 생산력 면에서 민족 지구의 어떤 곳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분산 거주하고 있으며 경지도 뿔뿔이 흩어져 있어 큰 농기구를 사용할 방법도 없었다. 춥고 높은 산간 구역과 황량한 사막 지구는 생산조건이 더욱 열악하다. 이처럼 낮은 생산력 수준에서 주관주의로 생산 관계를 개선하려는 것은 객관 규율 밖이었고, 수년 내에 민족지구의 생산과 각 민족 인민의 생활에 상당히 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당의 11기 3중전회 이래 전국 농목 지구에는 농업생산책임제를 전면 실행하게 되면서 중국 소수민족 지구도 점차 가정단위 도급생산의 경영관리 책임제 형식을 널리 보급하였다. 이런 책임제가 실제는 일종의 생산 관계의 조정이었다. 이와 함께 중국 농목 구역은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생산 관계와 생산력의 부조화라는 모순을 일거에 해결하였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중국의 모든 정당 정책과 그 실천은 중국 인민 가운데 표현되는 잘잘못과 크기는 결국 중국 인민의 생산력 발전에 도움이 되는지와 그 도움의 크기를 보는 것이요, 생산력을 속박하는 것인지 생산력을 해방하는 것인지를 보는 것이다.” 중국 소수민족 지구의 광대한 농목민이 기꺼이 ‘쌍포(雙包)’[包产到户(농가 생산 청부제)와 包干到户(농가 경영 청부제)] 책임제 형식을 받아들인 것은 생산력을 속박하지 않고 생산력을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 소수민족 경제발전은 생산 관계가 생산력 수준과 호응해야 한다는 객관적 규율에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둘째, 낙후한 생산방식의 개혁과 낙후된 사상 의식의 제거. 해방 후 사회개혁을 겪으면서 중국 각 민족은 한 개 혹은 몇 개의 사회 발전 단계를 넘어 사회주의 사회로 직접 진입하였고, 경제문화의 발전과 변화는 거대하였다. 그러나 한족과 비교해 일부 소수민족의 사회진보는 두드러지게 완만하였는데 그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이 민족들의 해방 전후 사회 발전단계와 관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그 더딘 정도는 원 사회형태의 낙후 정도와 정비례한다. 대표적인 예로 해방 시에 원시 공사제 잔재가 짙게 남아 있던 동북 오로첸[鄂倫春]족과 윈난의 일부 징포족이 있다.
동북 변강(邊疆)의 오로첸족은 해방 때까지 줄곧 채집·수렵 위주의 경제생활을 영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산도구는 주로 창·마필(馬匹)·사냥개였고, 겨울에는 산의 양지쪽 여름에는 강가에서 살며 일정한 주거지가 따로 없었다. 의복은 짐승 가죽, 음식은 짐승 고기를 주로 하고 채집과 어로를 겸했다. 이런 단순함이 대자연에서 얻어내는 경제여서 남는 생산물이 별로 없었고, 이 때문에 그들은 시종 공동으로 노동하고 평균적으로 분배하는 원시 공사제 사회 발전단계를 뛰어넘을 방법이 없었다. 해방 후 당과 정부는 오로첸족에게 일정한 거처를 마련해 주고, 수렵인들에게 수렵과 동시에 삼림 보호와 순록·가축 사육을 겸하게 하는가 하면 농업도 발전시켰다. 그러나 해방 후의 초기 30년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농업이라는 생계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상품 생산과 노동에 따른 분배도 중시하지 못했다. 1980년대 이후 토지 도급경영책임제 시행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농토를 벗어나 다시 산으로 들어가 채집과 수렵의 옛날로 돌아갔다. 현대사회 과학기술의 진보와 대자연에 대한 개발에 따라 수렵할 수 있는 공간이 날로 축소되고, 이처럼 낙후된 생계방식을 계속 견지하는 것이 아무 전도가 없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채집과 수렵으로 얻는 것이 일정하지 못하고 수확도 심히 미약하여 매년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했다.
윈난 더홍[德宏] 지구의 일부 징포족 역시 유사한 상황이다. 해방 전의 화전형 농업 생계방식이 1980년대까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그 원인은 이런 생계방식이 투자보다 큰 이익·편리함·간단함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민족 전통을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처럼 낙후한 생계방식은 대규모 삼림 자원 훼손을 가져왔고 현지의 생태환경을 매우 위태롭게 했으며, 징포족 농업의 폭넓은 발전이나 민족경제문화의 진보에 매우 나쁜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생산력 발전에 힘을 기울이고 낙후한 생계방식과 전통관념을 고치기 위해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건설에 매진하는 것이 소수민족이 발전해서 빈곤을 벗어나는 또 하나의 관건이다.
셋째, 각지의 실정에 맞는 생산 방침의 제정. 소수민족 지구는 지역이 광활하고 자원이 풍부하며 자연환경이 복잡하다. 기후조건도 다양하여 자연자원·경제구조의 다양성·복잡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곳에는 농업경제 발전에 적합한 평원·오아시스·분지 등이 있고, 목축업 경제에 적합한 광활한 초원이 있는가 하면, 어업 수산업 경제에 적합한 강·호수 등도 있고, 임업·수렵업과 기타 다양한 경영에 적합한 산지 구역 등도 있다. 이 때문에 각 민족지구는 본 성과 자치구의 생산 방침을 제정할 때 상술한 지리·자연 등 생태조건과 민족 분포·각 민족의 전통 생계방식·경제문화 특징 등을 고려하고, 현 단계의 교통 운수·상업 유통·기술 역량·자금 저축·노동력 조합·역대 생산지표 등 각종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요인 등을 고려해야 한다. 전면 분석·종합 연구의 기초 위에서 우세를 발휘하고, 장단점을 취사선택하고, 본 지구의 특징과 실제 상황에 맞는 생산 방침을 세워야 한다. ‘식량 생산 총력 경주, 다종 경영 적극 전개’라는 국가농업발전 총 방침의 지도하에, 현지의 실제 상황에 맞게 농사에 적합하면 농사를, 목축에 적합하면 목축을, 임업에 적합하면 임업을 주로 해야 한다. 혹은 식량을 위주로 하면서 임업·목축·식용유를 결합하고, 혹은 임업을 주로 하면서 식량·목축을 결합하고, 혹은 목축을 위주로 하여 농업·임업을 결합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다종 경영이란 우수한 것을 선택해 발전시키는 것이다. 당 중앙에서는 중국의 소수민족 집단거주 지역인 대서북(大西北)의 실제 상황에 맞게 ‘풀 심고 나무 심어 목축 발전’이라는 방침에 따라 초원 개발로 목축을 촉진하고, 목축으로 식량 생산을 촉진하는 소위 ‘기발한’ 경제발전 방침은 변강 소수민족 지구의 실정에 맞는 경제발전계획으로 시범을 보이고 방향을 제시하였다.
넷째, 다종 경영에 의한 종합 발전. 오랜 기간 소수민족 지구 경제발전이 늦었던 또 하나의 원인은 자연 규율과 경제 규율을 홀시하고 다종 경영 발전을 중시하지 않은 것이다. 1958년부터 특별히 ‘문혁’기간에 식량 증산을 강조하면서 목장을 마구 개간하는가 하면 삼림을 남벌하며 호수를 막아 밭을 만드는 등 단순히 경지면적 넓히기에 급급한 결과 자연자원과 생태 균형을 깨트려 식량 생산만을 생각하느라 다종 경영의 지지와 협력이 부족하였고 노동자의 경제적 내원 역시 막히게 되었다.
중국 소수민족은 대부분 변경지역에 살고, 이 지역은 산이 많고 평지는 적고 초원은 광활하여 식량 생산 발전 조건에 제약이 있지만, 다종 경영 발전의 조건은 오히려 상당히 유리하다. 이 때문에 노동력을 유한한 경지에 집중시켜 단일 식량만 생산하고 그 풍부한 자원을 한쪽에 놓아둔다면 토지·인력·자원의 커다란 낭비를 초래해 생산 발전과 생활 개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컨대, 광시 좡족 자치구 용닝[邕寧]현은 산지에 있는데 전체 현 사람들이 골고루 경지 1.5무[畝], 임지 2.6무, 산지 2.1무씩을 갖고 있다. 과거에는 온 기력을 1.5무의 경지에 쏟느라 경제발전이 더뎠다. 1980년대부터 그들은 원래 단일 생산 방향을 바꾸어 다종 경영과 종합 발전 방침을 실행한 결과 식량 생산량은 1인당 평균 808근(斤, 1근=500g)에서 1122근으로 높아졌고, 바나나·감귤·파인애플 등 아열대 과일은 평균 5배나 증산되어, 1인당 평균 수입도 신속히 증가하였다. 윈난 시솽반나 징홍[景洪]현 기눠[基諾]산 중의 지눠족은 1980년 이전에는 줄곧 화전(火田)식 조방(粗放) 농업이었다. 1980년에 선진 기술을 도입해 축사밀(縮砂蔤)과 찻잎 가공·목재 가공과 당즙(糖汁) 짜기 등의 다종 경영을 실천하여 농업 내부의 생산 구조를 크게 변화시키면서 수입이 증대되었다. 동시에 삼림 훼손도 대대적으로 감소하였다.
식량 생산이 비교적 어려운 그런 지역에서는 본지 생산 우세의 경제 작물 발전을 고취하고, 경제 작물로 식량을 교환하도록 하였다. 이는 계속되는 개간에 따른 산림 훼손·식량 생산을 위한 목초지 훼손·식생(植生) 파괴 등을 면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 발전에도 유리하였다. 동시에 상품 생산 발전을 고취하고 공급과 판매 경로를 확충하며 판로를 확대하는가 하면 각종 방법으로 재부(財富)를 창조하여 수입을 증대시켰다. 이렇게 전력을 다한 생산량의 극대화를 통해 소득을 증대시킴으로 경영 효율이 현저히 증가하였다. 다년간의 실천이 증명하듯, 다종 경영을 통한 종합 발전은 중국 소수민족 지구의 경제를 번영시킨 주요 전략 조치였고, 소수민족 빈곤 퇴치의 주요 경로였다.
다섯째, 과학 영농의 제창과 지력(智力) 개발의 중시. 농업과 목축업은 소수민족 경제의 중요 부문이었다. 농목업의 흥쇠(興衰)는 소수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직접 연결된다. 광대한 농목 구역에서 과학지식을 보급하여 과학 영농을 제창하며, 과학적으로 목축하는 것이 소수민족 지구 농목업 생산 발전의 관건이다.
오랜 기간 소수민족 문화 교육과 과학기술의 낙후로 말미암아 농목업 생산 수준은 비교적 저조했다. 농업을 예로 들면, 1979년까지 전국 소수민족 지구의 식량은 단위면적당 평균 생산량이 242근으로 내지 평균 생산량의 1/3 정도였다. 목축업 역시 목장 건설의 부족으로 목초지는 방치 상태가 되어 초원이 심각하게 사라지는 바람에 방목은 줄어들고, 가축 또한 과학적 관리 방법이 확보되지 않아 자연재해를 만나면 대량으로 사망했다. 통계에 따르면 1950~1979년의 내몽골과 신쟝에서 자연재해로 사망한 가축이 1.2억 마리에 이르렀는데 이는 같은 기간 국가에서 수매한 가축 총수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 과학지식을 중시하고 과학적 경작과 과학적 축산을 실행하여 영농법을 개선하고 적기 재배에 합리적인 시비(施肥) 등으로 다모작 면적을 넓히고, 초장을 합리적으로 이용하여 초원 건설에 힘을 쏟는가 하면 사료 가공을 발전시켜 세심하게 사육을 관리하여 농목업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대폭 향상되었다. 예컨대 윈난의 시솽반나 멍하이[勐海]현은 1981년 4만 무의 토지를 논농사 과학기술 종합 시범 구역으로 정하여, 1무당 연평균 409근의 생산량을 일거에 665근으로 올렸다. 무당 256근이나 증산하여 총증산량이 1024만 근에 달했고, 증산 지수도 62.34%에 달했다. 내몽골·신장의 목축업은 1980년대 초부터 과학적 관리에 힘을 쏟기 시작하여 이미 생산 불안전성 내지는 심지어 하강 추세까지도 완전히 바로잡았다.
역사적 원인으로 대다수 소수민족은 변강에 거주하면서 교통이 불편하고, 문화는 낙후되어 생산에 있어 선진 기술을 확충하거나 채용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그래서 소수민족의 각종 기술 인재를 배양하고 육성하고 소수민족의 지력 개발에 속도를 내는 것이 매우 절박한 문제였다. 각종 방법을 통해 각종 형식으로 인재를 배양하고 육성하는가 하면 현지의 지력 자원을 발굴하고 내지 한족 과학기술 인재의 지원을 쟁취하는 것이 소수민족 지구의 사회경제 발전에 속도를 내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다.
여섯째, 민족 공업의 발전과 일대일 지원 강화.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부유하려며 공업이 있어야 한다. 어느 민족도 공업이 없으면 부유해질 수 없다.” 해방 전 중국 소수민족 지구의 공업은 ‘빈약하거나 공백 상태였다[一窮二白]’고 말할 수 있었다. 해방 후 당과 국가의 도움 아래 소수민족 지구에 일군의 경공업과 중공업 기업들이 건설되었으나 기초는 여전히 매우 미약했다. 이 때문에 원래 기업의 잠재력·혁신·개조를 강화하는 것 외에 본 지구 자원과 물산 등의 우세에 근거해야 했다. 새로운 광공업 기업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공업생산 능력을 증가시켜 차근차근 단순 원료 산지의 상황을 고쳐나가며 소수민족 지구 경제의 신속한 발전과 인민 생활 개선에 기초를 놓을 수 있었다.
소수민족 지구는 오랫동안 경제문화 발전이 더뎠고, 기초가 약해서 공업 발전에는 국가의 자금·물자·기술 등의 방면에서 지원이 필요하였다. 이와 동시에 내지의 공업이 비교적 발달하고 선진 과학기술을 지닌 성시(省市)가 소수민족 지구와 손을 잡도록 조직하여 일대일 지원하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1970년에 베이징은 내몽골을, 상하이는 윈난·닝샤, 톈진은 간쑤를, 허베이는 구이저우를, 쟝쑤는 광시·신쟝을, 산둥은 칭하이를, 그리고 전국은 티베트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 방법은 경제 연합이나 기술 협업 등의 형식으로 경제가 발달한 성과 자치구는 자신의 자금·기술·경영관리 등의 우세를 소수민족 지구의 물산 자원 우세와 결합하는 것이었다. 혹은 자원을 개발과 창업, 혹은 소수민족 지구의 기업에 기술 개발을 도와 설비 이용률·생산품질·경제성 등을 높여줌으로 쌍방의 우세가 모두 충분히 발휘될 수 있게 하였다. 예컨대 닝샤 인촨(銀川)의 생 페인트 공장에서 생산하는 알코올산[醇酸] 페인트는 기술이 낙후하여 한 가마 생산에 20~30시간이나 필요하고, 가마 청소에는 이틀이나 생산을 중단했었다. 이후 상하이시 지원 아래 공예개조를 통해 생산주기는 16~18시간으로 단축되었고, 가마 청소를 위해 생산을 중단하지 않아도 되었다. 효율은 2배로 높아지고 품질도 높아졌는데 원가는 낮아졌다. 윈난 쿤밍[昆明] 화학비료 공장은 13년간 공장 건설에 1200만 위안의 적자를 보았으나, 쟝쑤[江蘇] 창저우[常州] 화학비료 공장의 도움으로 기술을 개조하여 관리 수준이 향상되자 적자를 만회하고 이익을 증대시켰다. 내몽골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제지공장은 공예설비가 쟝쑤보다는 선진적이었지만 경영관리 수준이 낮고 장기 적자였는데 창저우 제지공장 공장장과 회계 과장 한 명의 도움으로 2개월이 못 되어 적자를 만회하였다. 또 쓰촨 간쯔[甘孜] 방적 공장에서는 원래 생산한 모직제품의 품질이 안 좋아 현지에서는 판로 확장이 어려웠으나 후에 충칭[重慶] 방적 공장의 도움으로 생산품의 품질이 향상되고 제품의 종류도 증가하면서 베이징 시장에까지 진출하여 빠르게 적자를 메꾸게 되었다. 쟝쑤성이 지원한 광시의 항목은 70여 개에 달했고, 대부분 2~3년 내에는 효과를 보게 되었다.
실천이 증명하다시피 일대일 지원은 전국의 역량을 동원하여 소수민족 지구의 경제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투자가 적으면서도 효과는 신속하고 수익이 큰 아주 좋은 방법으로 당의 각 민족 공동발전 번영 정책을 구체적으로 구현하였다.
일곱째, 시장경제 발전과 개혁 속도 증진. 내지 한족 지구 특히 연해(沿海) 지역과 비교해서 소수민족 지구의 경제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것이 뚜렷한 현실이었고, 시장경제는 발달하지 못하였다. 대다수 농업목축 지역의 상품 교역은 발전 정도가 낮고 규모도 크지 않아 기본적으로 닫힌 자연경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소수민족 지구의 시장경제가 낙후된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다. ① 전체 사회 생산력 발전 수준이 낮고, 생산도구·생산기술·노동조직·노동관리 등 모두가 낙후되고 잉여 생산품이 많지 않았다. ② 사회 분업이 발달 되어 있지 않아 많은 농업목축 구역 특별히 변두리 산간 지역은 가가호호 혹은 마을마다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단계였다. ③ 교통이 막혀 있어 왕래가 불편하고, 어떤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근처의 작은 시나 진(鎭)의 장터에 가는 데도 하루 이틀이나 걸렸다. ④ 전통습관의 속박이 단단해서 많은 민족이 장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⑤ ‘좌(左)’의 잘못된 정책 영향을 오래 받아왔다. ‘사청(四淸: 정치·사상·조직·경제를 정화하는 운동)’에서 ‘문혁’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자본주의 꼬리를 자르며’ 본래 미약했던 소수민족 지구 상품 경제에 손상을 주었다.
이론적으로는 일찍이 일종의 ‘국가 계획경제를 상품 경제와 대립시키는 전통관념’이라고도 하여, 상품 경제 발전이 곧 양극 분화를 가져와 곧 자본주의를 불러온다고도 여겼다. 당의 12기 3중전회의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결정”에서 ‘계획경제가 상품 경제와 대립 된다는 전통관념’을 철저히 부정하고, 사회주의 경제는 ‘계획이 있는 상품 경제’라는 역사 유물주의 과학논단이 명확히 제출되었다. “결의”에서 중국에는 아직 국가·집체·노동자 개체등 다종의 소유경제 성분이 존재하며, “다종의 경제형식과 경영방식의 공동발전은 중국의 장기적 방침”이라고 천명하였다. 실천이 증명하다시피 단일한 경제형식을 발전시키려면 반드시 봉쇄식 경제체제로 가야 하고, 다종의 경제형식을 발전시키려면 자연히 개방식 경제체제로 가야 한다. 중국 소수민족 지구의 경제는 아직 낙후되었고, 발전도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계획적인 상품 경제를 힘써 발전시켜야 하고, 다종 경제형식의 경영방식을 견지하여 자연경제에서 상품 경제로의 변화에 박차를 가해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현재의 소수민족 지구 경제발전을 추동시키는 것이요 경제개혁의 당면한 급선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자연경제가 상품 경제로 변화한다는 것은 역사적 발전과정이기 때문에 일정한 사회조건이 필요하다. 소수민족 지구는 각종 조치를 강화하며 필요한 조건을 창조하였다. 현 단계의 일반적인 상황에서 취해야 할 조치와 조건들로 아래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① 각 민족 중의 특정업종 경영 농가[專業戶]를 적극적으로 도와서 사회 분업의 발전과 상품화 정도의 향상을 촉진한다. ② ‘모임[集]’·‘마당[場]’·‘거리[街]’·‘저자[圩]’ 등 각종 민족형식의 시장 무역을 잘 조직하여 농업목축 구역의 초급 시장을 활성화한다. ③ 각 민족의 전통적 특산품과 특수 상품 생산을 적극 발전시켜 전통적 민족 시장을 확대한다. ④ 각 민족의 농목민들이 도시와 마을[鎭]에 상점을 열고 공장을 건설하여 소규모 정기시장이나 현급 경제 센터의 건설을 추진한다. ⑤ 소수민족 지구의 교통 건설에 속도를 내어 각지의 시장과 연계함으로써 물류를 촉진한다. ⑥ 소수민족 지구의 상품 소식과 활동을 건립하고 강화하여 상품 생산과 상품 교환을 돕고 발전시킨다. ⑦ 자연자원의 우세를 이용하여 소수민족 지구의 관광업을 적극 발전시킴으로 민족 교류와 소수민족 지구의 3차 산업 발전 추진을 확대한다. ⑧ 변경 무역을 개방함으로 국제 연계를 강화하고, 변강 소수민족 지구의 시장경제를 활성화한다. ⑨ 국가는 계획적으로 조건이 되는 소수민족 지구에 대형 공업과 광업의 현대화된 기업 건설을 통해 소수민족 지구 경제 중심의 형성과 발전을 촉진한다.
여덟째, 국가 지원과 자력갱생의 견지. 소수민족의 경제문화 발전을 도와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 각 민족 사이의 불평등을 점차 해소한다는 것이 당과 국가의 일관된 주장이다. 신중국 성립 이후 마오쩌둥은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우리는 성심성의껏 소수민족 경제문화 건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소수민족을 도와 각 소수민족이 발전과 진보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곧 전체 국가의 이익이다.” 이를 위해 국가에서는 투자·물자·기술 등 여러 방면에서 효과적인 여러 시책을 내놓았다. 예컨대 재정방면에서는 매년 소수민족의 재정에 40~50억 위안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외에 ‘소수민족지구 보조비’·‘변강 소수민족 기본건설자금’·‘변경사업비’·‘저개발 지구 발전 사업 자금’ 등 전문항목 경비로 10억 위안가량을 더 지원했다. 생산이 특별히 낙후된 일부 소수민족 지구에서는 세수 감면 정책과 농기구 무상 공급을 실행하여 지출 감소·수입 증가로 생산을 촉진했다. 그러나 소수민족 지구의 경제발전은 결국 자신의 노력에 달린 것이기에 자력갱생의 길을 견지해 나가야만 한다. 저우언라이는 말했다. “모든 민족은 우수하고 근면하며 지혜로워서 그들에게 발전의 기회만 주면 된다. 모든 민족은 용감하고 힘이 있기에 그들에게는 단련의 기회를 주기만 하면 된다. 세계적으로 비교적 낙후한 민족들이 있는 것은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발전과 단련의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주의 민족정책은 모든 민족이 발전하여 번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민족지구의 각 민족 인민은 당 중앙의 통일된 영도 아래 당과 국가의 신시기 사회주의 건설 총 노선과 국민 경제발전의 위대한 전략목표 요구에 따라 지혜롭고 능력있게 현지 경제문화 건설의 신국면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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