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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식인’ 언설과 루쉰의 「광인일기」(2)

 
 

메이지 시대 식인언설과 루쉰의 「광인일기」(2)

(明治時代食人言說與魯迅的「狂人日記」, 2011)

 

 

 

리둥무(李冬木)

 

3. “식인혹은 인육과 관계된 언설의 시대 배경 및 그 원인

  그렇다면 왜 하필 메이지 시대에 “식인” 혹은 “인육,” 즉 Cannibalism의 언설이 생겨난 것일까? 바꿔 말하면 왜 “식인” 혹은 “인육”을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고 토론한 것일까? 그 시대 맥락과 주제 맥락은 모두 어떠한가? 물론, 근원을 거슬러 세밀히 연구하자고 한다면 “전사”(前史)까지 소급하여 올라가야 할 것이나, 여기서는 산술적인 “사사오입” 비슷한 방식을 빌려 취하고, 화제를 우선 메이지 시대로 한정했다. 이런 의의로 보건대, “문명개화”는 “식인” 언설의 큰 배경으로 보인다. 이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래도 이 점을 제외하면 생각건대 적어도 세 가지 구체적 요소는 고려할 가치가 있다. ① “소고기 식용의 시작”, ② 지식의 개방과 확충 및 “시대 취미”, ③ 모리스의 오오모리 패총 발견과 그 관련 보고.

  먼저 “소고기 식용의 시작”이다. 고기를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고기”에 관해 토론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인육”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이런 의의로 말하자면 메이지 시대 소고기를 식용하기 시작한 것과 그와 관련된 토론은 뒤에 “식용” 혹은 “인육” 언설의 물질적 전제와 잠재적 주제의 전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 시대에 “고기”에 대한 민감도는 오늘날 상상을 훨씬 초월한다. “문명개화”와 함께 고기가 왔고 소고기가 왔고 후각과 미각에 주는 충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의식에 있어 진동이 있었다.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먹을 것인가 먹지 않을 것인가? 고기를 먹어 본 적이 없다거나 고기를 “불결한 물건”으로 바라봤던 일본인 절대다수에게 엄청난 고민과 선택의 문제였을 것이다. 일본 전체가 뒤에 “먹기”를 선택하고 식탁 위의 “서양 풍습”을 결국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그 사상의 파동은 역사 기록으로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다. 메이지 오 년(1872) 음력 일월 이 십 사 일, 천황은 “고기반찬을 들이라 명했다.” “그때 황제께서 …… 육식을 꺼리는 낡은 풍습을 혁파하려고 고기반찬을 들이라 명하여 듣는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셔 백성들의 망상을 깨우는데 솔선수범하셨다고 환호하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고기 먹기”가 곧 “문명개화”이며, 반대로 거부하고 “육식을 꺼리”면 곧 “낡은 풍습”과 “망상”이며 혁파하고 일깨워야 할 대상으로, 천황이 솔선수범하는 행위 자체가 “메이지 계몽”의 한 가지 중요한 내용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시이 켄도(石井硏堂, 1865-1943)의 『명치사물기원』(明治事物起原)에는 독립된 하나의 장을 따로 만들어 “소고기 식용의 시작”을 기술하는데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요컨대 그때부터 일본의 위아래가 공모하고 관민이 일체가 되어 풍속을 바꾸고 육식을 행하는 “문명 시대”를 열게 되었다.

  당시 희극 작가 가나가키 로분(假名垣魯文, 1829-1894)의 희극 『아구라 나베』(安愚樂鍋, 1871)에 적힌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사농공상, 남녀노소, 현우빈부를 막론하고 걱정은 뒤로하고 서로 덤벼드니, 어느 누가 고기 요리를 먹지 않으며 어느 누가 개화하고 진보하지 않으려는가?” 루쉰이 뒤에 글에서 유학생을 조롱하며 “문을 닫아걸고 소고기를 삶아 먹는다”라거나, 그와 함께 “도쿄에서 실제로 본 적이 있다”라는 관련 글은 그 본원을 거슬러 추적하면 애당초 “소고기 식용이 곧 문명개화이다”라는 말로부터 영향을 받은 유풍이라 하겠다.

  메이지 시대 “문명개화”는 일본 국민을 육식 습관으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고기”에 대한 민감도와 관심을 환기시켰으니, “인육”과 “인육 먹기” 또한 이런 관심의 잠재적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육식”이 곧 “개화”이고 “문명”이니, 긴밀하게 연결된 문제는 이렇다. 같은 세계에서 아직 “식인종”이 존재하던 시기에 그들의 “육식”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당시의 “문명론”과 “진화론”의 상식에 따르자면, 이들 인종을 “야만 인종”으로 규정하여 “육식하는 우리”와 “육식하는 그들”이 본질적으로 다르고 문명과 야만의 다름이 있다고 인식하여, 연이어 자기를 포함한 세계인 “문명 인종” 역시 “식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과연 어떠한 혼란이 발생했을까? 필자 생각에, 이는 모두 “소고기 식용의 시작”을 실천한 연후에 추정한 관계로부터 “식인” 혹은 “인육” 언설에 이르기까지 잠재하는 문제로 후자로 발전해가는 데 있어 주는 암시가 크다 하겠다.

  그다음으로는 이 지식의 개방 및 확충과 “시대 취미”이다. 메이지 시대로 말하자면, “문명개화”는 당연히 육식만을 의미하지 않아 이 점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더 중요하게는 계몽과 신지식의 소개, 세계를 보는 눈을 키우는 것이다. 메이지 원년(1868) 4월 6일, 메이지 천황이 「오조서문」(五條誓文)을 반포했으니 바로 메이지 정부의 기본 시정 방침으로, 그 제5조는 “마땅히 세계로부터 지식을 구한다”이다.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의 “문안”(文眼)을 빌리자면 일종의 “백학연환”(百學連環)으로, philosophy로부터 “철학”이라는 한자 어휘를 만들어낸 시대이다. 『명육잡지』(明六雜誌)와 『동경학사회원잡지』(東京學士會院雜誌)에서 지식 엘리트들이 “문명”에 대해 보인 광범위한 관심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그 중 “식인”에 관한 화두가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민간 사회 역시 국내외에서 들어온 “신선한 일”(新鮮事)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충만했다. 이 외에 소위 “식인”이나 “인육” 언설은 바로 이 커다란 지식 배경 아래에서 생겨난 것이다. 일반 “서민”에게는 이와 같은 “천하기문”(天下奇聞)을 접하는 주요한 경로는 잡지나 문학 작품이었다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메이지 팔 년(1875) 6월 15일 요미우리 신문과 아사히 신문이 같은 날 동일한 소식을 전하길, 반슈(播州)의 어느 고급 관원이 하녀와 사통했는데, “사이쿤”(細君), 즉 아내가 이를 알고 관원이 외출한 틈을 타 하녀를 살해하고 그 허벅지 살을 베어 내 그가 집에 돌아오자 “사시미”를 차려내 왔다 한다. 요미우리는 그다음 해 10월 19일 「미에 신문」(三重新聞)의 기사를 인용하며 보도하길, 최근 피지섬에 식인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별안간 산을 내려가 사람을 납치하여 부녀자와 아동 18명을 잡아먹었다 했다. 본 논문이 검토한 “언설 문헌” 가운데 메이지 십오 년(1882)에 출판된 청수시차랑(淸水市次郞)의 『회본충의수호전』(繪本忠義水滸傳) 제5책 14권에는 「모야차가 맹주에서 인육을 팔다」(母夜叉孟州道賣人肉)라고 표제가 붙어 있는데, 물론 일본어로 적었다. 하지만 이런 일본 서민이 일찍이 귀에 익어 상세히 알고 있는 동방의 고사와 비교하여, “서양”에서 들어온 “인육 고사”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 잘 자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은 이노우에 츠토무(井上勤, 1850-1928)가 일본어로 번역하고 메이지 육 년(1883) 시월 도쿄의 금고당(今古堂)에서 출판된 후 삼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최소 6종의 판본이 인쇄되었고, 여기서 잡지에 발간된 것이나 뒤에 원문 강독 번역본을 제외하고도 그렇다. 이 책이 열렬 독자층을 확보한 이유를 보면, 일본 근대 “교감의 신”이라 불리는 고지로 타네스케(神代種亮, 1883-1935)의 견해를 빌리자면, 이 책의 “볼거리”가 둘로, 하나는 “제목의 기이함”이고 둘째는 “재판을 소재로 삼음”으로, 이 두 가지가 당시 “유행”과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소위 “제목”은 지금 일역과 중역의 번역 제목이 아니라 「인육을 저당 잡힌 재판에 관한 서양의 진기한 이야기」(西洋珍說人肉質入裁判)이다. 일본어에서 “질입”(質入)이란 단어는 저당 잡힌다는 뜻이고 “재판”(裁判)은 법원 심판을 말하여, 지금 말로 직역하자면 바로 「인육저당재판」이 된다. 분명히 “인육”은 이 고사의 “볼거리”이다. 베니스 부상 안토니오(Antonio)는 친한 벗 바사니오(Bassanio)와의 혼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몸의 살점을 저당 잡히고 유대인 고리업자 샤일록(Shylock)에게 빚을 지고 놀랍고도 정신이 없는 재판을 벌이게 되고 당시 독자들이 탄복하고 읽는 “서양의 진기한 이야기”로 코지로의 말을 빌리자면 “문명개화기 일본인 모두가 가진 일종의 흥미”를 실현했다는 것이다.

 

*李冬木 著, 『魯迅精神史探源: 個人⋅狂人⋅國民性』, 臺北: 秀威資訊科技, 2019, 166-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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