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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도시와 시] 양주(揚州)(5)

 

  양주는 강도(江都, 강의 도시)라고도 불렸다. 수(隋)의 양제(煬帝)는 기존의 수도였던 장안을 서도(西都)로 삼고, 낙양에 새 수도를 건설하여 동도(東都)로 삼았다. 그리고 이 두 곳 이외에 대운하의 거점인 양주를 강도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설치했다. 그는 운하를 건설하면서 수로 근처 20여 곳에 행궁을 지었는데, 강도도 그중 한 곳이었다. 양제는 재위 14년 중에 강도를 세 번 방문했다. 물론 뱃길을 따라 거대한 수행단을 이끌고서.

  강도로 들어선 방문단의 규모와 화려함은 대단했다. 황제를 수행하는 배만 1000척이었고, 노 젓는 인원만 8만 명이 넘었으며, 4층으로 된 용주(龍舟, 황제의 배)의 2층에는 금과 옥으로 장식한 방이 120개가 있었다. 운하 건설의 대업을 과시하기에 황제의 호사스러운 행차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작은 항구였던 양주가 강도로 거듭난 시작점에는 양제가 있었다. 운하 덕분에 사통팔달 물길의 중심지가 되었고, 무엇보다 황제가 애정을 가진 도시라는 강도의 정체성은 양제가 불어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제가 사랑한 강의 도시

  서도나 동도와는 달리 강도는 수도였던 적도 없었고 정치 중심지도 아니었다. 그리고 운하 부근의 다른 큰 도시들처럼 남방을 대표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양제가 강도를 각별하게 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 중에 정치적인 해석은 이렇다. 양제는 위진남북조의 약 350년 장기 분열을 끝내고 통일을 이룬 황제였고, 통일 왕조에 맞는 강력한 황권이 필요했다. 기존의 막강한 정치 세력들이 포진한 북방의 양경(兩京, 서도와 동도)과 거리를 두면서 동시에 소주(蘇州), 항주(杭州), 남경(南京)과 같은 전통적인 남방의 도시들과도 다른 새로운 정치 기반이 필요했다. 강남의 여러 도시 중에서 양주에 관심을 둔 것도 이런 정치적인 고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양제가 운하 건설에 적극적이었던 데에는 고구려 원정도 중요한 동력이었다. 전쟁 물자를 신속하게 수송하기 위해서 운하를 확장하고 완성했다. 하지만 3차례의 전쟁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무리한 전쟁 수행과 대토목 건설로 인해서 국고는 바닥이 났고 전쟁과 부역으로 생활이 파괴된 백성들은 반란으로 민심을 표출했다. 고구려 원정 패배 이후 나라가 안팎으로 이중고를 겪던 이 때에, 궁으로 돌아가서 정무에 힘써야할 양제는 수도를 외면한 채 양주에 머물면서 방탕하고 무도한 생활을 이어갔다. 결국 그는 양주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양제의 외사촌인 이연(李淵)이 당(唐)을 창건하고 새 왕조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그림1] 수 양제

 

  양주에는 양제와 수나라의 이 모든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강도로 거듭나 명성을 누렸고, 고구려 원정을 떠나는 군대와 군수품을 실어 날랐고, 전쟁에서 패하고 온 왕을 품었고, 왕의 죽음도 같이했다. 양주의 역사는 그 자체로 당의 시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작품의 소재였다. 그래서 여러 시인들이 양주에 대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 중에 이상은(李商隱)의 시가 있다.

 

<수나라 궁궐(隋宮)> 2

장안의 궁전은 안개와 노을에 잠겨 있는데, 紫泉宮殿鎖煙霞,
양주를 취하여 황궁을 지으려 했네. 欲取蕪城作帝家.
옥새가 이연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면, 玉璽不緣歸日角,
비단 돛배는 응당 하늘가에 닿았으리. 錦帆應是到天涯.
지금은 썩은 풀에 반딧불도 없나니, 於今腐草無螢火,
예전 수양버들엔 저녁 까마귀만 깃든다. 終古垂楊有暮鴉.
지하에서 진 후주를 만나게 된다면, 地下若逢陳後主,
어찌 후정화를 다시 물을 수 있을까. 豈宜重問後庭花.

 

  이 시에는 이상은이 양주에서 느낀 생각과 감회가 잘 드러나 있다. 제목인 <수나라 궁궐>은 양주를 가리킨다. 장안에 있어야 할 황제가 없으니 궁전은 잠겨있고, 양주에 오래 머무는 것으로 봐서는 황제는 마치 양주를 집으로 삼으려는 것 같다. 만일 이연에게 멸망하지 않았다면 용주는 여전히 전국 각지를 유람했을 것이다. 비단 돛배는 비단을 향수에 담갔다가 돛으로 만들었다는 용주인데, 배가 양주를 떠나도 그 향기가 멀리까지 풍겼다고 한다. 선상 유람의 사치스러움을 표현했다.

 

[그림2] 양제의 배

 

  반딧불은 밤놀이를 보여준다. 양제는 반딧불을 수도 없이 많이 잡아놓았다가 밤에 산과 계곡으로 놀러 나가서 일시에 풀어주었다. 그러면 새까맣던 산골짜기가 온통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그리고 양제는 운하의 양쪽 언덕에 수양버들을 심어서 황제가 다니는 길인 어도(御道)를 만들었는데, 이를 수제(隋堤)라고도 한다. 지금은 밤하늘을 수놓았던 반딧불도 없고 수양버들에는 까마귀떼만 몰려든다. 영원할 것 같던 권력과 사치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시인은 양제를 향한 직접적인 비판보다는 ‘썩었다(腐)’와 ‘해가 저물다(暮)’라는 말로 은연중에 뜻을 전하고, 과거와 현재를 반짝임과 어둠으로 대비시켜서 역사의 명암을 드러냈다.

  진(陳) 후주(後主)는 진의 마지막 황제이고, 후정화는 그가 즐겼던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라는 노래이다.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사치와 방탕을 일삼으며 노래나 즐겼던 후주는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양제는 황제가 되기 전에 군대를 통솔하여 진을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진 후주가 양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용주의 뱃놀이가 즐거우신가? 애초에 그대는 어진 정치를 해서 요순(堯舜)을 능가할 업적을 쌓겠노라 장담했건만, 지금 다시 유람을 즐기다니. 그렇다면 지난번 내게 죄를 물은 것이 심하지 않은가?”

 

  이 장면은 실제 만남이라고도 하고, 양제의 꿈속 만남이라고도 한다. 실제이든 꿈이든 이 대목에는 양제가 후주와 다를 바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시인은 양제가 죽어서 저승에서 후주를 다시 만난다면 노래나 부르던 그의 한심함을 지적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진나라를 패망시키면서 자신은 성군이 되겠다고 했던 다짐이 무색할 만큼, 양제 역시 후주처럼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고 말한다. 후주를 내세웠지만 양제를 겨냥한 구절이다.

 

 

도시에 인간과 역사가 새겨지고 시인은 이것을 노래한다

  <옥수후정화>의 가사는 화려하고 곡조는 슬펐다고 전한다. 중국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노래를 통해서 세태를 읽는 전통이 있었다. 어느 시대이건 유행하는 노래에는 그 당시 정황이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치세의 노래(治世之音)도 있고, 난세의 노래(亂世之音)도 있고, 망국의 노래(亡國之音)도 있다. <옥수후정화>는 슬픈 곡조에 이미 망국의 기운이 담겨있는 망국지음이다. 시의 마지막에서 시인은 ‘망국지음을 즐긴 후주를 양제가 과연 탓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있다.

  양주에 풍요와 쾌락과 유흥만 있었다면 중국의 다른 수많은 도시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평범한 곳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자칫 밋밋할 뻔한 양주의 얼굴은, 흥성과 쇠망을 모두 담고 있어서 입체적이고 풍부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이상은은 간결하면서도 핵심이 있게, 안타까우면서도 덤덤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양제와 수의 관계는, 역사서로 쓰자면 한 왕조의 분량이고, 소설로 쓰자면 대하소설 분량이 된다. 양주의 아니 강도의 내력을 이상은은 한 편의 시에 담아냈다. 이것이 시의 압축성과 함축성이다.

  <수궁>을 처음 읽으면 양제라는 인물과 양주라는 도시만 보인다. 그러나 되돌아가서 다시 찬찬히 읽어보면 양제와 양주를 바라보는 시인도 보인다. 도시의 내력에는 인물과 사건이 있다. 그리고 이제는 시인과 시도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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