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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 & 차이나] <열혈남아>, <초록 물고기>, <소무>

 

  이창동의 데뷔작 <초록 물고기>를 최근 다시 보았다. 이미 여러 번 본 영화지만 이번에도 역시 좋았다. 다시 새롭게 다가오는 장면과 인물들이 있어 흥미로웠다. 더불어 영화를 극장에서 본 1997년 무렵이 떠올라 뭉클한 감정도 들었다. 최근작 <버닝>까지 이창동의 영화들을 빠짐없이 보았고 대개 몇 번씩 보았다. 그의 영화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과 날카로운 탐색이 담겨있어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주지하듯 이에 부응하여 국내외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창동의 모든 작품들을 대체로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나는 이 <초록 물고기>를 가장 좋아한다. 일단 감정적 울림이 크고 문학적인 느낌도 강하다. 제목을 비롯하여 곳곳에 비유와 상징을 배치한 것도 좋고, 배우들의 생생하고 살아있는 연기도 무척 좋다. 이후 이창동이 얼마나 더 깊고 단단하게 자신의 영화 세계를 구축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최고작은 이 <초록 물고기>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는 이창동을 비롯하여 데뷔작이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감독들이 많다. 세계 영화계에는 많은 작품들로 평단과 관객의 지지를 받는 거장들이 많은데, 흥미롭게도 첫 작품이 가장 좋았던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중국영화를 놓고 생각해보니 역시 여러 감독들이 있는데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감독이 왕가위, 지아장커, 에드워드 양이다.

 

[그림1] <초록물고기> 포스터

 

  왕가위, 설명이 필요 없는 세계적 감독이고 많은 열혈팬을 가지고 있는 스타 감독이기도 하다. 1987년 <열혈남아>부터 근작인 <일대종사>까지 여러 편의 작품이 있고 작품마다 열광을 이끌어 내고 있는 감독이다. 나 역시 무척 좋아하는 감독이고 그의 작품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들라면 망설임 없이 데뷔작 <열혈남아>을 꼽는다. 왜 그런가. 가장 풋풋했고 담백했다는 생각이 들고, 무엇보다 왕가위 영화 중 거의 유일하게 리얼리즘의 기법으로 만든 영화다. 꾸밈이나 과장 없이 담백하고 사실적으로 만든 느와르 영화인데, 당시 범람하던 감정적으로 과잉된 여러 홍콩 느와르와 뚜렷이 대비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복잡한 서사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비유나 상징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관객들에게 전해주는 감정적 울림이 컸다. 사실적으로 공감되는 안타까운 사랑, 피 끓는 우정이 잘 담겨있다. 유덕화, 장만옥, 장학우, 만자량 등 홍콩의 유명배우들의 초기 시절을 보는 재미도 크다. 이후 그들은 각자 수많은 영화를 찍으며 더 유명해져 갔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이 영화 <열혈남아>에서 각자 최고의 연기를 펼쳤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배우들이 펄떡펄떡 살아있는 영화가 이 영화다. 왕가위 신드롬을 일으킨 영화는 뒤에 이어지는 <중경삼림>, <타락천사>, <동사서독> 등이지만 나는 이 영화 <열혈남아>가 월등히 좋다.

 

[그림2] <열혈남아> 스틸컷

 

  소위 6세대를 대표한다고 잘 알려진 대륙감독 지아장커, 그도 이젠 중견 감독이고 꽤 많은 작품을 가지고 있다. 소박한 독립영화에서 출발하여 이젠 매 작품 많은 주목을 받는 중화권 거장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1999년 <소무>부터 근작 <강호아녀>까지 20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데, 나도 그의 작품들을 부지런히 계속 따라가고 있다. 최근작들은 규모도 크고 더 화려한 면이 많은데, 아쉽게도 갈수록 힘이 좀 빠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아장커 역시 데뷔작 <소무>에 대한 인상이 가장 깊다. 감독의 고향이기도 한 산서성의 시골마을 펀양을 배경으로 대책 없이 한심한 좀도둑 소무의 일상을 따라가는 영화인데, 짠하기도 하고 찡하기도 한 영화다. 개혁, 개방이 진행되고 있다는 90년대라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지방 청춘들의 상실감, 박탈감과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한 체념 같은 것이 느껴져 보는 내내 연민과 쓸쓸함이 느껴진다. 지아장커 초기작들에 감독의 페르소나처럼 연기했던 왕홍웨이의 리얼한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다. <소무> 이후 이어진 <플랫폼>, <임소요> 등 소위 지방 청춘 3부곡이 가장 좋았다.

 

[그림3] <소무> 포스터

 

  앞서도 여러번 거론했던 대만의 에드워드 양, 중화권을 넘어 그를 세계적 거장으로 꼽는 것에 전혀 이견이 없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하나 그리고 둘>도 너무 좋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도 물론 좋아하지만, 그의 데뷔작 <해변의 하루>가 나는 가장 좋다. 에드워드 양은 이 데뷔작에서 이미 뭔가 다름을 제대로 보여준다. 내러티브, 미장센, 배우들의 연기가 모두 훌륭하다. 40년 전 영화라는 느낌이 전혀 안 들게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작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고 할까. 이 영화로 촬영감독 일을 시작했다는 크리스토퍼 도일이 선사하는 유려한 미장센 역시 감탄을 자아낸다. 적재적소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음악도 훌륭하다. 장애가, 호인몽의 젊은 모습도 상당히 인상적인데, 배우들의 연기 또한 활력 있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그림4] <해탄적일천> 포스터

 

  모든 예술가에겐 데뷔작이 있다. 처음이다 보니 미숙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작품이 쌓일수록 더욱 깊어지고 좋아지는 경우가 더욱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데뷔작에는 예술가의 작품세계의 원형이 여과 없이 담겨있고 재능이 곳곳에서 발휘되는 경우도 많다. 소위 떡잎부터 다르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더 나아가 데뷔작에서 정점을 찍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거장들의 데뷔작을 잘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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