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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연재] 선충원의 「도시 어느 여인」(2)

 

 

도시 어느 여인(2)
(都市一夫人, 1932)

 

 

선충원(沈從文)

 

  당연히 나는 강을 건너 한커우로 가 그 소장 친구를 찾아갔다! 나는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만 했고, 아직도 물어볼 이야기가 많고 그렇게 나이도 지긋하고 품덕이 있으며 인생에 대한 환멸로부터 벗어나는 데 솜씨가 있는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여 나를 도와주길 바랐다. 왜냐하면 이 사건으로 나는 견딜 수 없는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은 너무나도 상심에 빠졌지만 내가 무엇을 손해 본 것인지 알지 못했다.

  강변에 오르고 길을 가며 나는 정신없이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저께 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그 두 사람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고 소장이 한바탕 늘어놓은 이야기도 듣지 않았을 거고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인간사란 예측할 수 없고 나는 그 두 사람과 벌써 친해졌고 진작부터 가장 좋은 친구로 지낸 느낌이었다.

  소장 거처에 이르러서야 그가 나간 지 한참 지난 줄 알게 되었다. 나는 거기서 좀 기다리다가 쪽지를 남기고 멍하니 거리를 걸었다. 좀 지나서 불현듯 다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진작에 소식을 듣고 내 집으로 달려간 거 아닌가?“ 그래서 강을 건너 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과연 소장이 있었고 그를 보자니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이 사람은 나를 보자마자 신문을 건네주며 내 손을 오랫동안 꽉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서로 마주 볼 용기도 잃었으니 이 사건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친구는 좀 있다가 웃으며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으면 그가 정말 조용히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죽는다는 건 좋은 거야, 이런 결말도 나쁘지 않지.“ 나는 괴이하단 생각이 들어 그가 의외의 태도를 보였기에 말할 용기를 내었다. 그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하늘만 알 것이다! 증거와 연유를 파고들면 침몰하여 바닥에 가라앉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무엇을 소망하고 계획했는지를, 어떤 종류의 심판을 받아야 가장 공정한 심판이라 할 수 있는지를. 이건 정말 하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2

  1927년 무렵, XX 사단은 최우수 부대 표창을 받아 X 지역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이 영예는 1930년까지도 두루 일컬어졌다. 어느 날 사단 본부로 네 명의 청년이 와 그들 군사학교 교육 주임의 소개장을 들고 사단장을 예방했다. 이 회견 건은 참모부로 지시가 내려와 참모장인 어느 상교(上校)가 사단장을 대신하여 무슨 용무인지 한 차례 구두 심문하고 과거 경력을 비롯해 사상 방면에서 무슨 문제는 없는지 검증한 후, 곧이어 넷 가운데 셋은 모두 중위 부중대장으로 임명하여 중대로 내려보내고 나머지 하나는 상위 계급을 주어 참모부에 남아 근무하게 하였다. 이 청년은 대학을 다니다가 군사학교로 옮겨 군인 정신이 투철했다. 여타 다른 젊은 대학생처럼 희생할 각오로 굳게 다짐하며 항로를 바꿔, 출신이 좋고 얼굴은 희고 키가 크며 몸과 마음 모두 건장하고 사상이 발라, 관상으로 보자면 의지가 굳고 정직하기 이를 데 없어 아주 이상적인 군인이라 하겠다. 젊은이는 시대를 논함에 자기만의 철학이 있어 혁명 대오에서 여러 동지들 간에 견해 차이가 생겨 다툼을 벌이곤 했다. 흠결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런 성실하고 순수한 부분은 이런 젊은이의 영혼이 완전무결함을 증언하고 있다 하겠다. 참모부 근무를 시작한 후 얼마 안 있어 몇몇 동지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몇 차례 격론을 벌였다. 인내, 성실, 복종, 근면, 이런 덕목이란 하급 장교에겐 하나도 모자라면 안 되고 이 젊은이는 하나도 모자람이 없고 게다가 고상하다 말할 수 있는 기질은 보통 젊은이 사이에서 군계일학과 같았고 개중 탁월하여 홀로 우뚝했다.

  이 젊은이는 일상 업무 처리 과정에서 처음 왔을 때 본 그 참모장으로부터 일체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이 상교는 나이가 오십 전후로 무슨 오류가 있었음에 틀림없어, 군대에서 적당히 지내는 것보다 대학교 근무가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이 상교는 일본 사관학교를 초기에 졸업한 인재라서 업무를 선택하는 자유에 제한을 받게 되어, 중국 고서를 수도 없이 읽는 한편 다른 동료 군인들과 어울려야만 했다. 타고난 성품이 보기 드물게 좋아서 이 성정 때문에 다른 사람과는 달리 군인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게 다른 동기들은 모두 고속 승진하여 성장 독판을 지냈지만, 그는 겨우 그가 학생으로 가르치고 동향인 사단장 부대에서 참모 직무를 참을성 있게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이 젊은이와 노장교 사이에는 누가 봐도 다 아는 우정이 생겨났고 서로가 서로를 지극히 존경하면서 계속되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서른 살 정도였지만 지혜와 성격이 서로 잘 맞아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우정을 쌓게 되었다. 나이 많은 사람은 술을 무척 많이 마실 줄 알았고 노병 클럽이라는 곳에 자주 가서 고상한 백철미주(白鐵米酒) 종류를 마셨다. 이 클럽은 이름하여 ”노병“이라 했지만 오는 사람들은 대개 그 지역 고급 장교들이었다. 이들 장군, 유명인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미 퇴역하여 일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은 한직에 머물며 별반 하는 일이 없거나 혹은 나이가 좀 들었기에 술 한잔하면서 우스갯소리를 했고, 도박을 해도 평생 돈 딸 일 없는 몇 명은 포카를 구경하거나 하여, 모두들 서로 어울리기 더없이 좋은 장소라고 여겼다. 특히 나이 좀 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오락을 위해 자연히 이곳으로 오게 되어 이곳을 떠나면 군인 신분으로 다른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비록 고급 장교들이 이곳을 독차지하고 있었지만 이 클럽 발기인은 사실 군 경력이 있는 노장군이므로 노병 클럽이란 이름이 붙었다. 노병 클럽은 XX에서 매우 유명하여 그 안에서는 정치를 논하지 않고 정당한 오락을 중시하고, 오락 가운데 설사 부도덕한 행위가 있더라도 그 존재를 용납하진 않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가장 합리적인 규칙은 바로 여자는 출입금지라는 것이었다. 당초 발기인은 군인 사회에서 신망을 얻은 사람으로 클럽 내에 여인을 들이지 않도록 했는데 여인은 재수가 없어 군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 생각에 찬성하여 곧 하나의 규칙이 되었다. 규칙을 실천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군기와도 같이 모호한 구석이 하나도 없기에 이 클럽은 XX 지방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이 명성이란 바로 클럽이란 이름으로 조직된 다른 단체에서는 결여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고, 이 클럽을 좀 더 도덕적으로 만들기 위해 사리에 밝은 상교 이사 하나가 여인 한 분을 모셔다가 모든 일을 주재하도록 하자 주장했다. 이사회에 이 안건을 상정하며 그 상교가 내놓은 명목은 바로 ”도덕“이었다. 그렇게 희한하게도 이 안건은 통과되었고 그 즉시 어느 중년 여인이 클럽으로 오게 되었다. 듣기로 비밀에 부친 이야기는 바로 클럽을 주재하러 온 여인이 원래는 그 노장군의 정부라는 것이다. 장군이 죽은 후 매우 빈궁하여 여인은 갈 곳이 없었고 상교가 그 소식을 듣고 모두들 그 여인을 도울 방법을 찾자 했는데 여인이 금전적 지원을 거부하므로 모두들 상의 끝에 이 방법을 생각해냈다. 모두들 쉬쉬하는 가운데 노장교 몇 명만이 이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 여인 나이는 서른다섯 가량 되었고 여전히 젊은 자태를 유지했고 성정이 단정하고 명민하여 노병 클럽으로 온 후 몇몇 노장군들이 이 여인을 매우 존중하고 예의를 갖춰 대했다. 그래서 그곳으로 오는 다른 사람들은 추측하길 이 여인이 매우 지체 높은 군인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했지만 이 여인이 노병 클럽 최초 발기인의 애인인지는 알지 못했다.

  X 사단의 상교 참모장은 이 여인의 과거 모두에 대해 다른 노병보다 아는 게 많았다. 다름 아닌 그가 바로 클럽 이사회에 제의한 사람으로 노장군이 살아생전 가장 친한 친구였고 노장군이 죽을 때 이 비밀 정부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한 사람이었다.

  이 여인은 민국 초기 베이징의 상류층 귀족 사교계에 출몰하곤 했다. 그녀는 가난한 집 고운 여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모가 수려하며 모친을 따라 팔기 귀족 집안을 왕래하며 구슬꽃을 꿰고 자수를 놓으며 생계를 꾸렸다. 뒤에 어떻게 노 외교관 저택에 양녀로 들어가 생활과 운명이 완전히 변하여 거기 간 후로 다른 사람들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세월을 보내며 호화롭고 부귀한 기질을 배워 사치를 부리고 제멋대로 하는 습관이 들었다. 총명하고 조숙한 여인이 늘 그렇듯 양부 동의도 받지 않고 외교부에서 일하는 젊은 과장에게 시집갔다. 이 남자도 그녀와 결혼하며 집안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모두 젊고 용모가 수려하여 서로 옥석의 반쪽이 되었으며 결혼 후 매우 정열적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후 남자가 일이 잘못되어 두 사람은 상하이로 건너가 거기서 얼마간 지내며 여기저기 돈을 빌려 흥청망청 써댔다. 이 젊은이도 바보가 아니라 처음에는 여인 보길 선녀처럼 하고 시키는 일이면 안 듣는 것이 없다가, 상하이에 간 후 큰 빚을 지면서 여인의 약점을 조금씩 파악하여 여자 하나 때문에 집안과 인연을 끊는 일이 바보 같은 짓인 줄 깨닫고 사소한 다툼을 몇 번 벌이고 훌훌 털고 떠나 다시는 보지 않았다. 그가 어디로 갔을까? 여인은 알지 못했지만 여인이 그 후 생활한 면모를 보건대, 그 남자가 떠난 일은 아주 총명한 결정으로 조금도 잘못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자살했을 수도 있어, 여자는 그때 남자가 떠나야 하는 이유를 알지도 못했고 그 뒤로 그 어디서도 그 남자 이름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함께 살던 남자가 떠난 후 경제적인 지원도 끊겼다. 민국 초기 상하이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모두 상인들로 아직 사교계의 꽃으로 활동하던 여자가 없었고 그때 그녀는 겨우 나이 스물로 자연히 베이징으로 돌아가 그 양부에게 사죄하고 화해하여야만 생활할 방도가 나왔다. 그래서 먼저 베이징으로 편지를 보내 낱낱이 고한 후 양부에게 지난 일이 모두 잘못이었다 자인하고 노외교관이 조금 은혜를 베풀어 돌아갈 수 있길 바랐다. 노외교관은 편지를 받자마자 오백 원을 부치고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오라 했고 베이징으로 돌아가서 노인 면전에서 가엾은 눈물을 좀 흘리고 잘못을 인정하고 자책하는 말을 하면 자연히 일 년 전의 상황을 회복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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