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가 탄생했다. 양자경이 동양인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봉준호의 <기생충>이 작품상, 윤여정이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타면서 아시아 영화와 배우가 아카데미라는 높은 장벽을 차례로 허물었는데, 올해 양자경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엣 원즈>로 단단한 유리천장을 깨고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이다. 깔끔하고 담백하면서도 내공을 담은 수상 소감도 화제였다.
양자경이 누구던가. 85년 데뷔 이후 아시아의 독보적 액션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그렇게 양자경은 우리에게도 무척 익숙한 배우다. 남성 위주의 액션영화 판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강렬한 액션으로 관객들에게 확실한 인장을 남긴 <예스 마담> 시리즈가 그녀의 초기 대표작이라 할 것이다. 여성 액션스타 양자경의 활약은 중국은 물론 아시아 전체로 범위로 확대해도 가히 독보적이었다 할 수 있다. <예스 마담>은 작품성을 말할 만한 영화는 물론 아니다. 줄거리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양자경의 곡예에 가까운 화끈한 액션, 호쾌한 발차기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양자경은 말레이시아 화교 출신으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미인대회를 통해 연예계에 데뷔했다. 발레를 전공하다 부상을 입어 연기로 방향을 틀었는데, 그녀의 부드럽고 우아한 액션은 이런 그녀의 전적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여러 영화에서 조, 단역을 거쳐 1985년 <예스 마담>으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4편까지 출연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1988년 결혼과 함께 은퇴를 선언했지만 몇 년 뒤 이혼하고 다시 영화계로 컴백했다. 복귀작은 <폴리스 스토리3>으로 역시 자신의 장기를 십분 발휘한 작품이었다. 당시의 성룡도 성룡이지만 양자경의 빠르고 화려한 액션도 그에 못지 않았다. 한마디로 넘사벽이었다. 지금도 그 정도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는 여배우는 찾기 힘들다.
반환을 전후로 홍콩영화는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고 홍콩영화는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양자경도 그냥 그렇게 잊혀지나 싶었는데, 뜻밖의 영화에서 그녀를 만나게 된다. 바로 세계적인 화제작인 1998년작 <007 네버다이>에서 본드걸로 등장한 것이다. 아시아인이 본드 걸을 맡은 것도 처음이었지만, 더 신선했던 것은 양자경은 이전의 수동적인 본드걸과는 확연히 다르게 강하고 주체적인 여성을 연기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본드걸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았고 큰 화제를 모았다. 그렇게 양자경은 중화권을 넘어 할리우드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중화권 여배우로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게이샤의 추억>, <미이라3>를 비롯 최근에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등의 작품에 출연하여 존재감을 증명했다. 마침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것이다.
<예스 마담>도 신선했고 <007 네버다이>도 무척 인상적이었며 최근작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도 물론 좋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양자경 하면 역시 무협영화 속 고수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가령 중국 무협영화의 명작 <와호장룡>에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제대로 보여준 수련, 그리고 우리 배우 정우성과 호흡을 맞추며 무예를 숨긴 채 평범하게 살아가려는 <검우강호> 속 여인 정징이 떠오른다. 정중동, 절제와 인내로 강호를 헤쳐나가는 강한 여인 양자경이 가장 인상적인 것이다. <와호장룡>의 초반부, 장쯔이가 청명검을 훔쳐 달아나려 하고 양자경이 그걸 막는 액션 시퀀스는 언제봐도 감탄이다. 역시 무용을 전공한 장쯔이였기에 그러한 장면이 가능했을 것이다. 끊지 않고 거의 원테이크 처럼 이어지는 그 우아하고 역동적인 대결에서 장쯔이는 복면을 한 설정이니 대역이 가능했지만 양자경은 거의 대역없이 실력을 발휘한다. <검우강호>는 어떤가. 실력을 꽁꽁 감추고 평범한 아낙네로 살고 싶어했으나 결국엔 절정의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장면에선 무협영화 보는 재미와 쾌감을 제대로 살려준다. 양자경의 매력과 진가를 백프로 발휘하는 장르는 그러므로 무협영화가 첫 손가락이다.
양자경은 말레이시아 미인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양자경은 눈에 띄게 예쁜 외모는 사실 아니다. 8, 90년대를 풍미했던 중화권의 수많은 여배우들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도 양자경이 예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대신에 양자경은 굵직굵직하게 잘 생겼다는 느낌이 강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뭔가 기품이 느껴지는 외모인 것 같다. 그래서 특히나 무협영화에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품이 넓고 올곧으며 강인한 여자 협객으로 아주 제격인 것이다. 물론 양자경이 무협 및 액션영화에서만 빛을 발한 것은 아니다. <게이샤의 추억>이나 아웅산 수지를 다룬 <더 레이디> 같은 영화를 보면 연기의 폭이 깊고 넓다는 느낌을 받는다. 요컨대 이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탈만 한 사람이 탄 것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멋진 수상 소감처럼 앞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주길 기대하며 다시 찾아온 새로운 전성기를 오래 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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